[제주비엔날레-탐라순담(耽羅巡談)] (22) 윤여일 제주대학교 SSK연구단 전임연구원

제주비엔날레 2017 프로그램 중 하나인 ‘탐라순담’은 탐라 천년의 땅인 제주도의 여러 인물들과 함께 토크쇼·집담회·좌담회·잡담회·세미나·콜로키움·거리 발언 등 다종다양으로 제주의 현안과 의제에 대해 이야기(談)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누구나 주인공이자 손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는 12월 31일까지 약 50회에 걸쳐 ‘제주 하간듸’(많은 곳)서 ‘제주 사름’(사람)이 ‘제주를 곧는’(말하는) 탐라순담이 열립니다. 제주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의 여러 담론 속에서 제주의 가치, 제주의 현안을 길어 올리고 사회적 예술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탐라순담[耽羅巡談] 스물두 번째 순서는 지난 25일 오전 11시 제주시 아라동 시옷서점에서 윤여일 제주대학교 SSK연구단 전임연구원이 ‘여행한다는 것과 공부한다는 것’을 주제로 진행됐다. 

사회학자이자 번역가인 윤여일 연구원은 중국 베이징과 일본 도쿄, 교토를 다니며 동아시아에 대한 연구를 벌여왔다. 멕시코, 과테말라, 인도, 네팔, 중국, 일본 등을 다니며 인문 여행서인 <여행의 사고> 시리즈를 냈다.

윤여일 연구원에 따르면 여행은 공부의 한 가지 형식이다. 여행자는 왜소한 하나의 개체지만, 하나의 작은 세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여행은 한 개체가 타지에 가보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의 작은 세계가 크고 낯선 세계와 부딪치는 일이기도 하다. 수평적인 이동의 체험을 매개 삼아 자신을 수직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그때 여행은 달리 없는 물음의 과정이자 공부의 형식이다.

이날 탐라순담에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살아왔거나, 결혼하면서 제주도로 이주했거나 제주도에 여러 번 여행을 왔다가 이주해온 이들이 둘러앉아 각자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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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순담 스물두 번째 순서는 윤여일 제주대학교 SSK연구단 전임연구원이 '여행한다는 것과 공부한다는 것'을 주제로 이야기에 나섰다. ⓒ제주의소리

윤여일
: 내 소개를 하기보다 준비한 글 하나를 읽고 여기 계신 분들이 이 글을 통해 연상되는 것을 말해주면 내가 그것을 듣고 그 내용으로부터 논점을 찾아서 이야기를 나눠보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한다.  

여행은 공부의 한 가지 형식이다. 공항을 빠져나온 여행자는 기대감에 들뜬다. 상상 속에서 생략과 압축을 감행해 자신의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최단 거리로 잇는다. 따분한 시간들은 잘라내고 비행기에 오르기 전부터 기대해온 핵심이 순간으로 곧장 향할 심산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매끄러운 도하지 위에 자를 대고 선을 긋듯 목적지에 직선으로 가닿을 수는 없으며,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진공지대가 아니다. 여행은 대체로 일상으로부터 떠나 어딘가로 가서 무언가를 보고 오는 일이지만, 그러려면 여행자는 목적지보다 먼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들러야 한다. 여행에서는 일상으로부터 일탈과 일상으로의 인접이 공존한다. 그래서 여행길에서는 소소하더라도 반드시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마찰이 잇따른다.  
여행자는 왜소한 하나의 개체지만, 하나의 작은 세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행자는 몸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 내지 평소 자신을 에워싸던 역사적·사회적·정치적·문화적·경제적 의미의 자장을 여행지로 데려간다. 따라서 여행은 한 개체가 타지에 가보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의 작은 세계가 크고 낯선 세계와 부딪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면 낯선 세계는 여행자의 그래서 여행은 위험하다. 신변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행에서는 적절치 않은 때, 즉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험을 해버릴 수 있다. 이때 여행자가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려고 재빠르게 가져다쓰는 해석틀은 대체로 기시감, 미추, 문화적 차이 같은 것들이다. “저건 다른 나라에서도 본적이 있는데.” “저건 예쁜데.” “저건 한국과 많이 다른데.” 이 해석틀은 호기심이야 불러일으키겠지만, 의미 파악이 호기심 수준에서 멈춰버리곤 한다. 더구나 잘 모르는 것을 대충 알만한 것으로 처리한다는 점에서, 여행지가 모처럼 제공해준 사색의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다. 
여행자가 첫눈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태의 윤곽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길거리에 자욱이 깔린 사회적, 역사적 먼지는 여행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현지사회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읽어내려면 조사를 하고 왔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일단 첫눈에 주어지는 서툰 감상을 괄호쳐두고 섣부른 의미 부여를 참아내는 사고의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눈(보고)과 가슴(느끼고), 머리(판단하고) 그리고 행동(반응하는) 사이에서 의미 교환이 이루어질 때 그 과정이 즉흥적이지 않도록, 그 절차를 되도록 면밀하게 살피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시감 속에서 낯설음을 발견하고, 아름다움 속에서 현실에 드리울 수 밖에 없는 추함을 감지하고, 독특함을 포착했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맥락으로 시선을 넓혀갈 수 있는지 모른다. 
만일 노력해봤는데도 드러난 거소가 침묵에 처해진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관계를 읽히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할까. 그럴 공산이 크다. 여행자는 그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행지를 매개 삼아 자신을 여행하면 된다. 그곳 생활이 음영을 헤아리지 못하고, 생활을 수놓는 물적 토대에 무지한 까닭에 현지사회로 진입하지 못하겠다면, 대신 그 노력으로 자신을, 자기 사고의 관성을 응시해볼 수 있다. 
현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딱해 보인다면 혀를 끌끌 찬 뒤 호텔방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그처럼 가벼운 동정의 배후에는 어떤 우월감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지 자문할 수 있다. 자신과 같은 여행자들이 몰려와 그곳이 관광지로 변해가고 공동체가 해체되고 저임금노동이 늘어나며, 자신이 손에 쥔 고급 카메라가 그들의 궁핍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지는 않는지 자문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현지사회를 함부로 평가하는 유권해석과 끌끌 혀를 차되 대상으로부터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면책특권을 멋대로 향유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할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은 원하면 언제라도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조건이 서툰 연민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할 수 있다. 현지인들은 식물처럼 그 땅에 뿌리박혀 있고, 자신은 동물처럼 여기저기를 오갈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처럼 수평적인 이동의 체험을 매개 삼아 자신을 수직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그때 여행은 달리 없는 물음의 과정이자 공부의 형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번에 맡은 주제가 ‘여행은 공부가 될 수 있다’, ‘공부의 방편이 될 수 있다’ 이런 내용이어서 읽어본 글이다. 이제 여기 오신 분들의 말들을 들어보겠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내 체험을 다시 끄집어내서 얘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다. 

최수진
: 글 읽으면서 굉장히 큰 공감을 했다. 나는 제주에 온지 두 달 정도 된 장기 여행자다. 1년정도 살아보려고 왔다. 제주를 너무 좋아해서 20대 초반부터 10여 년간 일 년에 서너 번씩 오기도 하고 열흘씩 지내다 가기도 했다. 제주는 나의 마음의 고향과 같다. 너무 여러 가지로 지쳐서 서울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을 때면 항상 제주에 오고 싶었다. 장기로 올 수 있는 용기가 없다가 올해는 여러 가지로 상황과 조건이 맞았고 이번이 아니면 제주에 장기로 살러 올 수가 없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었다. 막상 제주에 왔더니 장기 여행자로 왔기에 제주가 삶이 터전이 되어야 했다. 여행 올 때와는 하늘부터 달랐다. 여행해서 느꼈던 제주와 살아 나가야 한다고 바라본 제주는 달랐다. 두렵고 굉장히 서울과 다르지 않은 제주였다. 내가 제주에 왔다고 하니 사람들이 다 나더러 용감하다, 부럽다 하는데 정작 나는 한 달반 동안 제주를 제대로 못 느끼고 있었다. 일자리 알아보며, 제주는 특성상 일일 구한 후 거주지를  구해야 한다고 조언을 들어서 한 달 동안은 셰어하우스와 게스트 하우스를 전전했다. 이 뜨내기 삶이 너무 힘들었다. 매번 3일 지나고 다음은 어디서 자야하나 고민하다 너무 피폐해져서 아라동에 집을 구하고 일자리 구하며 저녁에 알바하고 있다. 여기 주신 문장 들 중 ‘따라서 여행은 한 개체가 타지에 가보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의 작은 세계가 크고 낯선 세계와 부딪치는 일이기도 하다’란 문장이 내 마음 같았다. 제주를 여행했을 땐 참 좋았는데 제주에 와서 내가 왜 이렇게 힘들었나 생각해봤다. 나라는 하나의 작은 세계가 제주라는 큰 세계와 부딪혀 봐야 살아남는 건데 그 과정이 없이는 제주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데 나는 그 여행 때 느꼈던 좋았던 느낌만으로 제주에 와서 살면 당연히 좋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왔다. 제주라는 낯선 세계와의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힘들게 있다가 서울로 돌아가면 안 되는데, ‘즐거워야 하는데 그러려고 제주 왔는데’ 하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이 과정을 겪고 나면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 즐겁고 행복한 제주 생활을 만들어 나가려면 내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뒤에 있는 문장 중에 ‘여행자는 그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행지를 매개 삼아 자신을 여행하면 된다’고 했는데 이게 정답인 것 같다. 내가 뭔가 제주를 정복하러 온 것도 아니고 그 동안에 내가 잊고 살았던 난 자신을 발견하러 온 것이니까. 내가 나약한 인간임을  느끼고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이런 나의 모습들을 바라보는 것도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윤여일
: 너무 소중한 말씀이고 그 안에 중요한 논점들이 몇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행하러 왔을 때와 살러 왔을 때 왜 감각의 차이가 발생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신 덕분에 우리가 제주를 떠났다 다시 제주로 돌아 올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타지 사회에 대해 얘기 한 것을 모 사회에서 감수하려면 훨씬 더 감수 능력이 필요할 것 같다. 여기서 발생하는 이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것. 우리가 잠깐 동안 바깥 사회를 나갔을 때 얘기를 할 텐데 그 얘기를 경유하고 돌아왔을 때 거기서 번지는 사고의 자원들을 가지고 본인의 제주 여행과 제주 살이에 대해서 어떻게 다시 얘기할 수 있는 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 또 하나는 자신의 발견이라는 대목이다. 자신의 발견이라는 테마가 요즘 여행에서 자아 찾기라는 형태로 정말 중요한 컨셉이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 그것과 좀 다른 것 같다. 타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도 어떤 식으로든 흔들리거나 심지어 해체되는 과정을 겪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렀을 때 여행이 여행다워 지는 것 같다. 
여행한다는 감각과 산다는 감각이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 바깥 사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지금 제주에서 여행한다는 것과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지, 그리고 타지를 매개해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은정
: 나는 제주에 온 지 7년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여행 중이라고 생각한다. 7년 되니까 떠나고 싶다. 왜냐하면 관계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친한 여러 가지 관계가 생기니 ‘내가 여기 죽으면 장례식에 올 사람이 많아지겠구나. 떠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선생님의 글 중에 현지인들은 식물처럼 그 땅에 뿌리박혀 있고, 자신은 동물처럼 여기저기를 오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우월감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고민을 했다. 고민을 하는데 그게 우월감이라기보다 두려움인 것 같다. 식물처럼 되는 게 무섭다. 내가 이 땅에 정착하는 게 무섭다기보다 관계를 맺고 이 관계를 통해 내가 이 사람들에게 맨살로 노출되는 감각이 무섭다. 너무 가까운 사회가 되는 것이 겁나서 내가 약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서너달을 외국으로 장기 여행을 했었지만 항상 그들을 타자화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이 사람들과 다른가 같은가에 대한 고민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라고 해 봐야 내가 만나는 삶이라고 해 봐야 실제로 그 나라의 삶을 산다기보다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업에 종사하는 사람만 만나게 되는데 이런 관계들이 그 나라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볼 수 있나 라는 고민이 들었었다. 그래도 어쨌든 그 나라 사람인 건 사실이고 관계는 관계니까 이걸로 충분한가, 내가 모든 건 다 알 수 없으니까 이런 고민들을 했었다.  

윤여일
: 여행이라고 하는 말이 여행을 목적으로 놨을 때 뒤에 나오는 주요한 술어가 하나는 ‘간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떠난다’이다. 사실 그 두 가지가 표면적으로는 일치하긴 하지만 이유는 다른 것이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여행을 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향해가는 것이다. 지금 말씀하셨던 관계라는 말을 거기에 넣어보면 평소에 가졌던 관계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처음으로 시작하는 관계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우리는 여행을 간다. 여행을 갈 때 거기에 있는 아름다운 풍광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가서 만나는 상인일 수 도 있고 여행길에 만나는 친구일 수도 있을 텐데 여행에 가서 만나게 되는 관계에 대한 기대감을 하고 가는 것이지 않나. 그래서 여행이라고 하는 행위가 그런 의미에서 관계라는 것을 되사필 수 있는 중요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 적어 놓은 것처럼 여행이라는 게 자신의 일상에서 일탈하는 행위인데 남의 일상으로 인접하는 행위이다. 지금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지쳐있는 지금의 심리상태가 한편으로는 남의 일상으로 다가가고 싶다는 어떤 종류의 자세를 일으켜낸다. 그게 여행이 갖고 있는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을 한다. 왜 이쪽에서는 힘들어서 떠나는데 왜 그 힘들다는 게 저쪽에 갈 수 있는 의욕내지 동력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잘 사고할 대목이 있을 것 같다. 처음에 여기에 여행하듯이 살고 계시다고 하셨는데 발을 반쯤 공중으로 떼고 있는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 거기에서 지금 떠난다와 간다라고 하는 그것이 의미하는 다른 상태라고 하는 것, 지금 여기에서 일상으로 지내시긴 하지만 뭔가 계속 그 감각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런 느낌이 든다. 생각해볼 대목이다. 화두로 따진다면 여행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 중요하게 생각해 볼 대목인 것 같다. 이것도 하나의 논점으로 삼도록 하겠다.

김태연
: 제주에서 나고 자라서 터전을 여기에서 삼고 있기 때문에 나의 삶의 대부분은 떠나온 사람들을 만나는 삶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를 돌이켜 보면 학교를 걸어가는 길에 수학여행 온 남학생들이 야유를 보내는 것을 경험하거나, 고등학교 때에는 용두암과 가까운 학교를 다녔는데 저녁 먹고 산책하고 있으면 항상 관광버스가 와 있어서 관광객들의 사진 안에 찍히는 현지 사람이 되는 과정을 거쳤다. 대학교 때 제주올레와 저가항공이 생기면서 여행객과 살러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생경한 느낌이 많아지는 것 부딪침이 많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동안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비슷한 사람들과 거의 균일화된 일상을 살았다면 그들이 와서 제주도는 불편해 라는 관점을 내보내기도 하고 제주도는 이래서 좋다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장점들을 꺼내주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관광지 여행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 느껴가고 있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하게 되기도 하고 나는 너무 좋은데 어떤 여행자 혹은 이주민에게는 불편한 지점이 되기도 하고 이런 상반된 시각 안에서 때로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면서 지내고 있었다.

윤여일
: 나 역시도 여행을 나가서 며칠 동안 어디에 있다가 어디로 갔다가 그런 식으로 다닌 적도 있지만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3년 혹은 6개월 살아본 경험이 있다. 나 자신도 어딘가를 가면 그곳에선 낯선 사람인데 그 이후에 저를 찾아서 누군가가 한국에서 오면 위치가 애매하게 변하는 상황들을 겪었다. 태연이 말한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그것을 화두로 끄집어 내 본다면 원래 그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여행자 뭔가 이질적인 사람들이 그 공간 속으로 찾아 들어왔을 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내딛어보면 여행지들을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여행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런 물음도 가능할 것 같다. 여기서 계속 살고 있었는데 낯선 맥락 속에서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고 그 사람들을 보게 되고 관찰하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그런데 그 사람들의 시선을 매개해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다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계기가 어쩌면 그 안에서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이 곳은 정말 뜻밖의 여러 장소에서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이 곳과 자기의 관계 자체가 바깥의 이질적인 요소와 맥락들로 인해 변화하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이곳에서 앉아서 여행하기라고 할까 이 자리에 있으면서 여행하기라고 할까 뭔가 이런 일들도 발생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이라는 개념을 넓게 확장한다고 하면 그 또한 우리가 다뤄보려는 하는 여행은 공부의 한 가지 형식이다라는 것 안에서 사고해 볼 수 있는 내용일 것 같다. 

신태희
: 제주에 시집온 지 19년 정도 되었다. 이스라엘 키부츠 자원봉사 갔다가 예루살렘에서 제주사람인 남편을 만났다. 우리나라에 IMF가 한창이었을 때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못가는 사람들이 그 곳의 공용어가 영어이다 보니 그 곳으로 많이 왔었다.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이 여행을 제안했다. IMF 때문에 희망이 없어진 청년들에게 대륙을 횡단하는 호연지기를 실시간으로 우리나라에 전송하면서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오자. 키부츠 생활을 정리하고 7-8명 정도의 사람들과 여행을 시작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여권에 이스라엘 도장이 찍혀 있으면 중동을 건너 올 수 없어서 이집트에서 여권을 바꾸는 작업을 해야 했는데 한 달 정도가 걸렸다. 6개월 정도 여행을 했는데 비행기를 탈 돈이 없어서 걷거나 기차, 버스를 타고 노숙도 하며 여행을 했었다. 들어와서 1년 이내에 남편과 결혼하고 제주도로 왔다. 남편과 결혼하면서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하면 우리가 여행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것은 내 꿈이었다. 현실은 너무 팍팍했다. 제주도에 왔는데 남편의 월급 너무 작고 두 아이는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건축분야는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지 않고 연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굉장히 힘들어서 카드론도 쓰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자수성가한 분이셔서 내가 도와 달라고 해도 도와주지 않으셨다. 여행과 현실은 너무 극명하게 대비가 되었다. 나중에 들은 소리가 여행지에서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고. 여행지에서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들뜬 상태이지 않나. 현실에서 떠나있고.  사실은 지금도 많이 힘들다. 남편이 지금도 나를 굉장히 많이 훈련시키는 구나라고 생각한다. 너무 힘들어서 마흔 들어서면서 시를 썼다. 예전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시로 소환해 보고 그런 작업을 했다. 예전에 여행할 때 이집트에서 오아시스 마을에 갔는데 돈이 부족해서 시장을 보기 전에 늘 가격을 조사하러 갔었다. 딱 모퉁이를 드는 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여기에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느낌을 <지도에 없는 마을>이라는 시로 썼다. 그 모퉁이를 돌았을 때의 냄새와 햇빛 아직도 그 감각이 살아 있다. 여행을 쭉 못하다가 지난 여름 휴가 때 오사카를 여행을 해 봤다.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훈련하는 것이었다. 3년 후에 남편을 떠나고 제주도를 떠날 거다. 다가오는 10월에 도쿄를 끊어서 가는데 전지 훈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간에는 애들 키우느라 돈도 없어서 여행을 못 했었다. 항상 현실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어서. 그래도 제주도에 시집와서 5년간은 바다를 보면 와 바다다 남편이 주는 상처가 자연으로 다 치유가 되었었다. 지금도 제주도가 너무 좋다. 제주도가 나로 시를 쓰게 만들었고 거기에 남편이 동기부여를 많이 주어서 <분홍 여우가 온다> 라는 시집이 하나 나왔다. 지금도 여전히 남편은 나를 시를 쓰게 만든다.  

윤여일
: 이 글 때문에 무언가가 상기되었다면 그 대목을 듣고 싶다. 한 가지 화두는 여행과 상기 작용일 것이다. 여행을 다녀 온 후 가령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고 도시를 다녔던 나의 체험의 향 같은 것들이 내가 돌아온 후에 내게 어떻게 남아 있을 것인가 혹은 내 정신의 일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나도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나도 불쑥 다니다가 특히 긴 여행을 하고 난 후에 기억의 손이 불쑥 내밀어서 나를 잡아서 약간 어지러워지는 순간이 있는 것 같다. 시로 만들 생각은 못하고 일상의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니까 뭘 해야 하니까 흘러버리고 만다. 지금 말씀하셨던 것처럼 여행이라고 하는 게 떠난다는 행위가 어차피 올 것을 전제하기에 사실 그 예감 속에서 우리는 여행을 다닌다. 사진을 열심히 찍는 이유도 돌아와서 그때 어떤 것들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떠나게 만들었던 이유는 돌아오면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도 어떤 특정한 시간을 경험한 것이 되고 어떤 체험을 한 상태의 나는 가기 전의 나와 조금이라도 어떻게 다른 나일 것인지, 그리고 여행의 상기 작용이 ‘그 때 좋았다’ 이상의 상기 행위, 즉 뭔가 과거의 걸 기억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내 현재와 관련해서 미래를 끌어오는 방식으로 과거에 있는 여행 체험이라는 것을 소환하는 방식은 뭐가 될 것인지 라는 식으로 옮겨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이 전에 키부츠에 있었고 대륙을 횡단했고 그때의 어떤 경험이 지금 얼마 전의 오사카와 앞으로의 도쿄라고 하는 어떤 미래의 선택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제주에 있는 현실이 달리 보이게 된 부분이 있을 거다. 그걸 조금 섬세하게 문장으로 옮겨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금 있는 현재와 과거에 다녔던 여행과 그 여행이 예감케 하는 미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현재 일상의 풍경을 보는 나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 어떤 종류의 힘 작용을 하고 있는지 라고 하는 내용은 시의 언어도 필요할 것 같고 뭔가 그걸 어디까지 최대한 끝까지 문장을 쓸 수 있는 지 산문의 언어로도 표현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시라고 하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적분의 의미이지 않나. 생각했던 것들을 결정체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 것을 미분화 시키는 과정, 즉 뭔가로 응결되어 있었던 것들을 최대한 풀어내서 어디까지 이것을 문장화 시킬 수 있을 것인지, 그런 과정을 주제넘을 진 모르지만 워낙 그 체험이 중요할 테니까 그걸 시를 써 내는 동시에 반대로 산문을 쓰는 과정을 하시는 것이 그 때 여행 다녔던 경험들이 지금의 많은 것들을 이끌어 내고 내딛게 하는 식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신숙
: 나도 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는 항상 모국어가 있어야 사유를 만족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느낌이라 항상 외국으로 나가는 여행이 굉장히 두렵고 지금도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해외에 나가면 한국의 문제를 잊어버리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굉장히 인상적인 말을 지인에게 들었었는데 그분이 언제까지 여행을 하냐면 모국어를 잃어버릴 때 까지 여행을 한다고 말했다. 그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 그게 너무 매력적이었다. 여행에 대한 순수한 이상향이다. 이 글을 읽어봤을 때 여행은 뭔가를 계속 캐낸다는 광부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여기 서점을 운영하면서 하루에 한명씩 제주도를 여행하는 엄청난 밀도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제주에서 이주민이 아닌 원주민이 차린 유일한 책방이다. 아까 김태연이 말한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여행객들과 또 여행이라고 하면 화려해 보지만 관광이라는 미명하에 각종 유흥업에 종사하는 많은 또래의 현지의 벗들을 보면서 살아온 선천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때 제주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었다.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 하일지의 <위험한 알리바이>. 그 당시엔 인터넷이 발달했던 때가 아니라서 그들이 집필했던 책들을 뒤져서 그들이 제주도에 대해 어떻게 썼나를 느꼈을 때 굉장히 거리감도 있고 공감도 가지 않았다. 작가들이 제주도를 바라보는 것도 차이가 있었고 어렸을 때 읽으면서 불평불만도 많았었다.  스무 살 넘어서 처음으로 여행했던 곳은 미아리588, 그 후 너무 궁금해서 금강산 여행도 갔었다. 필리핀과 동남아 여행을 갔을 때는 성매매를 하는 천막 같은 곳을 버스 타며 본 후 너무 큰 충격 받았던 이 세상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던 경험들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제주도에서 나의 문제의식은 관광의 미명하에 부서지는 것들을 굉장히 많이 접하는 원주민으로서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행들을 계속 진행했던 것 같다. 그래서 스물아홉살에 3개월 단위로 떠다니면서 책을 읽으면서 접했던 달동네에서 살아보고 청량리 근처에서도 살아보고 마장동 이런 곳만 계속 다니면서 그런 식의 제주도의 유린된 정서와 맞는 어쩌면 더 끔찍할 수도 있는 곳으로 여행을 다녔다. 그런 부딪힘 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경험했던 여행의 상처들이 내가 다시 또 여행을 가게 될 때에는 굉장히 주요한 마음이 되었다. 물론 그것들이 여성주의 운동으로 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서점에서 운영하며 20대 때 부닥치는 것들을 경험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주는 제주도의 또 다른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하나 이주민이 많이 오면서 생각하게 된 것인데 내가 원주민으로서 이주민들이 오거나 문화 예술이 다가 왔을 때 굉장히 새롭고 환기적인 느낌을 받지만 그들이 나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시원한 청량감이 있지만 뭔가 진액 같은 것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주도는 여행 오는 사람들이 부딪히니까 여행이라는 단어가 학습적이고 문화콘텐츠처럼 와서 떠나고 그런 것만을 벗어나서 여행자를 대하는 원주민의 감성과 상처받는 것도 같이 더. 올레도 원래는 농로였다. 그런 길을 지금은 가벼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윤여일
:  강정마을에 대한 글을 써야 될 일이 있어서 민군복합관광복합미항 지역발전계획이란 문건을 읽은 적이 있다. 해군 기지가 지어진 다음에 크루즈가 들어올 수 있는 항만을 건설하는 거기는 앞으로 기지촌이자 관광지가 될 공사를 진행 중이다. 거기 지역 발전 계획 보면 강정마을이 크루즈항의 배후지라고 적혀 있다. 강정마을 속에 항구가 만들어지면 항구가 주어가 되어서 강정마을 전체가 혁신도시 인접지, 배후지로 언급이 되는 것이다. 
거기의 문장들을 보면 관광 혹은 여행이란 말이 얼마나 난폭한 표현인지. 거기가 동네길을 도로화 시키고 용천수 지역을 공원화 시키고 이런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언어로써 여행이라는 말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친환경이란 말도 환경친화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환경과 가까운이라는 뜻이어서 그냥 범섬에 접근할 수 있고 그 곳에 있는 내천에 아무 때나 가볼 수가 있다는 의미가 물리적으로 가깝다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서 사는 사람들이 거기서 사는 권리와 거기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할 수 있는 소비적 선택지를 등가적으로 맞춰주는 말로써 여행이란 말이 그 문건 안에 쓰여 있었다. 아까 다른 여행을 고민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콘셉트로 이 자리를 만드신 이유일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제주 여행으로 돌아온다면 얘기 해볼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난 다른 부분에 주목하고 싶다. 누군가가 여행을 다닐 때 모어를 잃어버릴 때까지 기억이 안날 때 까지라고 말씀하셨는데 화두로 만든다면 가령 나는 한국어를 모어로 사용하고 있다. 글 쓰는 것은 모두 한국어로 쓴다. 만일 내가 멕시코사람으로 태어났고 소설을 쓴다고 하면 내가 글을 써쓸 때 그 글을 꼭 멕시코인들만 읽을 필요는 없다. 페루나 스페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다. 스페인어가 멕시코에서만 쓰는 언어가 아니니까. 하지만 난 한국어로 글을 쓰면서 일본에 있는 재일조선인, 중국에 있는 조선족, 북한사람을 내 독자로 생각해 본 적 없다. 내가 모어로 글을 쓴 다는 행위가 항상 국한되어있는 영토 감각 안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태어났고 이 언어를 주입받았기 때문에 이 언어로 사고하는 한해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어떤 독자의 범위가 늘 그 안에 제약되어 있다 쓸 때 계속 그 제약 속에 있는 거다. 내가 글을 쓸 때 이 범위에 한국이라는 반도적 공간 외의 사람이 읽을 것이라는 것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죽을 거다. 이 책이 번역되지 않는 한은. 외국에 나가서 외국어를 사용하면 외국어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의미의 강 같은 게 있다. 나는 저기로 가고 싶다. 그런데 뭔가 말을 꺼내서 하면 할수록 내가 알고 있는 어휘는 이렇게 나 있으니까 나는 일로 가고 싶은데 몸은 점점 이쪽으로 움직이면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내가 가고 있는 곳 사이의 괴리가 점점 더 벌어진다. 내가 지금 하고자하는 얘기는 그래서 한국어 사용자기 때문에 안타깝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모어가 바깥에 나가서 모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면서 얻게 되는 한국어에 대한 다른 종류의 체험 같은 것들이 내게 있는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학문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개념어 사용을 많이 한다. 어려운 얘기를 고증담론 뭐 이런 것들을 하다가도 굉장히 추상적인 얘기긴 하지만 그 안의 사람들의 표정을 봐 가면서 적당한 사례를 들어가며 시각을 끌어 낼 수 있는 것들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가령 외국어로 얘기를 해야 되면 나 스스로가 추상명사 같은 것을 꺼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뒷감당이 안 되니까. 그래서 역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령 근대가 되었던지 정치 혹은 사회가 되었던지 내가 이 개념을 한국어로서 정말 제대로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내가 한국어 사용자고 하니까 내가 말하는 관성 안에서 편히 꺼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덧붙여서 하는 것이지 실제로 내가 그 개념을 얼마만큼 그 개념을 인식을 하면서 면밀하게 성찰을 하고서 내가 그 개념을 쓰는 것인지 라고 하는 것을 외국어로 얘기할 때 그 언어가 낯설어 지는 감각을 통해서 경험했다. 어차피 나는 외국어로 얘기를 해도 사고는 모어로 하지 않나. 그래서 이것은 외국어 능력의 부족함 많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모어로 한다고 해도 내 생각이 충분치 않았고 그런데 모어를 쓰는 동안에는  사고의 충분치 않음이라는 게 명료하게 안 드러나는데 오히려 그것을 다른 언어로 얘기하려고 하다보니까 그것이 드러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깥에 나가서 모어사회가 아닌 곳에 있고 거기서 외국어를 사용하다가 하게 되는 경험은 다시 돌아와서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모어 감각에 대해 다시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가령 책을 쓴다. 멕시코라고 하자. 여기에서 누군가 만나서 그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쓴다고 해 보자. 그러면 나는 1인칭, 그 사람은 3인칭이 되어버린다. 1인칭 복수인 우리라던가 2인칭인 당신이란 표현을 사용할 때 나는 독자로서 한국인들을 떠 올린다. 하지만 그 독자라는 사람들을 나는 만자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인칭으로 가리키면 제일 멀리 있는 그라고 하는 사람은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만났던 직접적인 부대낌, 접촉을 했다라고 하는 게 모어로 글을 쓸 때는 그 사람이 제일 멀리 있고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우리 혹은 당신 너를 향해서 한국어로 글을 쓰는 그 시간 속에서 글을 쓰게 되는 거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얘기 하고 싶은 것은 바깥에 나가서 우리 아닌 외부적인 것을 만났을 때 우리 더 나아가서는 나라는 것이 어떻게 흔들리고 해체의 경험을 겪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은 다른 형식, 책을 읽거나 논문을 쓰거나 할 때에는 경험할 수 없는 뭔가 다른 사고의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모어라는 것을 여행을 통해 여행할 수 있을 것인지. 뭔가 모어가 낯설어 지는 체험을 겪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아무리 여행해도 나는 모국어를 잃을 것 같지는 않다. 모어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낯설어지는 것은 경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때 모어만이 아니라 모어 사회에서 갖고 있었던 여러 가지 현상을 대하면서 갖고 있었던 판단기준, 거기에 대한 어떤 감수의 형식 감수의 방식들이 낯설어지는 경험들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모어 사회로 다시 잘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는 물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지혜
: 사실 제주도는 사투라가 좀 심하지 않나. 우리 엄마는 충청도 분이시고 아빠는 제주도 분이시다. 두 분이 결혼하시고 제주도에 내려와 살게 되었는데 그것도 사투라가 아주 심한 제주도의 시골 마을에서 사셨다. 아빠가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늦게 퇴근할 때까지 엄마가 대화할 수 있는 상대라곤 돌도 안 지난 언니 밖에 없었다. 할머니와 시골 어른들이 육지 며느리인 우리 엄마에 대해 배타적이셨을 뿐 아니라 그 곳에서 사용된 제주도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엄마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모어이긴 하지만 사투리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우리 엄마에겐 제주도어는 외국어였다. 중학교 때 엄마와 외할머니가 통화를 하다가 할머니가 우리 아빠를 바꾸라고 하셨다. 엄마가 제주도에 살면서 너무 힘들게 사투리를 배우시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본인은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고 통화한다고 생각하셨는데 계속 사투리만 말씀하시게 되었던 거다. 외할머니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셔서 결국 아빠가 중간에서 통역처럼 하시는 걸 봤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이 드느냐고 하면 외국어든 사투리든 내가 그 곳에서 장기간으로 살고 그 곳에서 내가 터전을 내리고 고생하는 시간들이 있으면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겠지만 모어를 잃어버리는, 그곳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 있지만 모어가 어느 정도 상실되는 시간들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모어를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어렸을 적에 텔레비전에서 박찬호 선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스무 살 넘어서 미국으로 간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는데 대답하기 전에 한국말을 떠 올리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Umm umm’하면서 되게 거부감이 들었었다. 그러다 엄마가 생각이 났다. 그 사람이 얼마나 거기에서 고생하며 적용하려고 노력했으면 자신의 언어가 잘 기억나지 않게 되었을까. 얼마나 다급하게 그곳의 언어를 획득하려고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수진
: 나는 언어는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로 가서 2달정도 지내다 왔다. 그 곳에서 굉장히 자주 익숙하게 쓰게 되는 말이 “Sorry.” “Excuse me.”와 같은 말이다. 박찬호 선수 이야기 할 때 나도 공감했다. 엄청 비하하고 웃음거리 이야기로 했었다. 그런데 내가 주 다녀온 후에 지하철을 탔는데, 나는 호주에서 오래 산 것도 아니고 2달 정도 살고 영어도 엄청 능숙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전철 문 앞에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앞에 사람들이 많아서 좀 비켜주세요 라는 말을 해야 하는 데 나도 모르게 “excuse me”가 나왔다. 
그때 나도 박찬호 선수가 생각나면서 그가 고작 1년 정도 살다 와서 그러는 게 좀 우습다 생각했었는데 내가 지금 두달 살아놓고 이러고 있구나. 그런데 그 습관이 한 달 이상 갔다. 잃어버린다기보다 어떤 언어가 더 익숙해지는가. 내가 살고 있으면 그 곳의 언어가 익숙해지는 것 같다. 그 기간 동안. 


윤여일
: 아까 얘기 하면서 모어라는 표현과 모국어라는 표현을 같이 썼는데 정말 그렇다. 지금 말씀 들으면서 느껴지는데 국 단위로 모국어라는 말과 모어라는 말이 다를 수 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제주에서 언어라고 한다면 한 겹 정도가 더 있다. 그 사고 안에. 

김신숙
: 내가 아까 얘기 했던 모어를 잃어버릴 때까지 여행하고 싶다던 사람의 캐릭터는 술주정뱅이다. “Excuse me”를 할 정도 아니고 전생과 도를 믿으십니까 하는 정도다. 나는 언어가 인공지능이라고 생각 한다. 모든 언어와 그런 것들은 다 조정을 당한다. 규격화된 사회 안에서 규격화된 학교를 나오고 규격화된 삶에서 내가 조정 당한다고 생각한다. 내 모든 고정관념들. 
그 와 중에 그래도 내가 언어적 틀을 해체 하면서 낯선 개념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시이기 때문에 암울한 세상에 내가 시를 쓰면서 견디고 시를 쓰고 있다. 그래서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살아왔던 환경 때문에 내가 적극적으로 성매매촌이나 일본을 여행하더라도 사창가 거리를 함께 여행하는 테마 여행으로 같이 많이 하는데 시가 굉장히 모든 언어로 같이 번역이 된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시를 쓰는 거다. 이 사람 우리의 환경을 모르는 되게 공부가 필요한 듯한 시를. 그런데 시옷서점의 사장님은 공부가 하지 않더라도 느낌들이 느껴지는 시를 쓰신다. 무지개 정신지체 요양원에서 오랫동안 병상생활 하신 분의 시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것은 공부한 시야 이것은 공부한 시가 아니라 여행 같은 문장이야 이런 느낌이 드는 게 ‘봄비 내리는 소리 종 없는 소리’ 이렇게 두 문장이 있었다. 이건 모든 사람이 다 인정할 수 있는 문장이지 않나. 여행이라는 것은 모국어가 아닌 그 지역의 엄마의 소리를 듣는 것. 모든 곳에 엄마의 소리 근원적인 소리가 있고 여행을 할 때는 그런 엄마의 소리에 가까운 것에 길을 잃다보면 
자기의 모국어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다. 거기에 빠져 가지고. 지금 우리가 여행을 하거나 여행을 통해서 공부한다는 것은 모어에 가까운 여행을 지향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래도 사회에 필요한 것을 끄집어내는 뭔가 캐내는 광부같은 느낌이라 부지런한 광부가 되어야지 하는 느낌으로 듣고 있었다. 아무튼 그 분은 술주정뱅이이고 그래서 술에 취해서 그 곳에서 모어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윤여일
: 차학경의 <딕테>라는 책이 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시인, 모어, 여성, 쓰다 등 여행과 관련해서 끄집어내진 주요한 화두와 관련해서 꼭 말씀드리고 싶은 책이다.  
아까 내가 말 했던 것은 가령 내 체험에서 그런 건데 일본에서 2년 동안 지냈던 시기에 1980년 광주에 관한 세미나를 했었다. 뒷풀이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엔 일본어를 잘했을 때였다. 누군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갑자기 던졌다. 그 때 되게 긴장했었다. 왜냐면 일본어가 어느 정도 편안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적을 의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질문을 던진 분은 한국인 여성분이고 질문을 받은 분은  일본인 남성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잇는 유일한 한국인 남성이었다. 긴장이 되었다. 왜냐하면 만일 일본인 남성에게 질문한 후에 그 질문을 내게 질문하면 이라고 생각하니 깜깜해졌기 때문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실감일거다. 여성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어떤 남성에게 물어봤고 그 자리에 나는 남성으로서 있는 것이고. 그래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어떤 정치적인 견해를 묻는 것이 아니라 사실 어떻게 생각해라는 것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 일본인 남성한테 없는 실감은 비록 수요집회에 가본 적은 있지만 나에게도 그다지 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국적이다. 일본인 남성이 거기에 대해서 뭔가를 얘기한 다음에 혹시 나에게 동일한 질문이 왔을 때 내 대답이 일본인 남성이랑 거의 같다라고 한다면 그럼 국적은 어느 의미를 갖게 되는 거지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좀 지났고 그 일본인 남성은 대답을 못했다. 중요한 문제니까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다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분이 일본에서 80년 광주에 대한 세미나를 같이 하는 분이기 때문에 당연히 정치적 견해는 있을 거라고 본다. 그분이 얘기 하지 못한 것은 그 질문에 대해 감당할 수 있는 실감이 별로 없어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고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그 실감이 그다지 있지 않다.  그런데 왜인지 나한테는 그 질문을 안했다. 그건 또 왜 일까?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질문 안하신 걸까? 그날 나에게 주어지진 않았지만 내가 대답할 수 없었던 그 답은 그 다음에 생각을 했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지. 근데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모어 사회에 있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어떤 것들, 역사적 소요로서의 위안부 문제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거기서 뭔가 발언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말 소요로서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언제든지 내가 관심 가질 때면 발언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개체로서 거기에 스스로 진입하려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소위 주어졌다고 착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함부로 라고 할까 섣불리 발언 할 수는 없는 것이구나. 특히 당시에는 일본에 있었으니까 한국과 일본 사이의 뭔가 민족주의 문제를 둘러싼 논의의 구도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폭력적인 언어를 쓰는 댓글 다는 사람들은 이런 권리를 어떻게 얻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시기였다. 아까 모어에 대한 내용과도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 자리에서 경험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주어진 일본과의 관계 안에서의 어떤 역사에 대해서 그것을 내 재산처럼 내 지갑에 쟁여놓고 필요에 따라 꺼내서 쓰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정신의 일부로서 삼는 과정이 그것에 대해서 발화하기 위해서는 동반되어야 하는 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랑 다른 경험이긴 한데 이 심극까지를 여행은 요구한다고 난 생각한다. 그 안에 참여했을 때 그 장을 경험해 오면서 내가 우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명하지 않고 우리라는 곳 안에 한국인이 되었든 한국사회가 되었든 그 안에 어떤 균열면이라고 하는 것이 외부 세계를 나가서 들어올 때 들어오면서 균열면이 발견된다면 그것이 여행의 중요한 의미가 되는 것 같다. 아까 이야기 했던 것처럼 바깥에 나가서 다른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자기 사회로 동시에 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칫 잘못하면 타 사회에서 경험을 할 때 그 경험에 대한 판단 기준이 우리사회는 이런데 라는 식으로 우리사회가 너무 쉽게 설정되어 버린다. 그러면 타지 사회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너무 자명한 것으로 하나의 일원화 된 것으로 구축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 사회로도 진입할 수 없게 되고 동시에 자기 사회에 대한 이해도 엷어진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깥에 나가서 그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진입한 만큼 자기 사회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진입을 했을 때 그 자기 사회란 것이 단일한 사회가 아니라 자명한 사회가 아니라 그 안에서 여러 가지 균열면이 보이게 되고 그 균열면을 사고하고 뭔가 생각한 지점을 끄집어냈을 때 그걸 가지고 아마 내가 나아가는 그 사회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지사회로서의 진입과 자기 사회로의 진입에 대한 회고 같은 것들이 동시에 진행 되어야지 여행이 여행다워지고 여행이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버린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활과 매개되어지는 어떤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구준모
: 제주에 온지 한달 되었다. 내가 여행을 생각하고 실제로 가는 게 크게 한번 바뀌었다.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이어서 그것을 해결하고 학교 졸업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특히 해외여행이 내가 가능한 선택지 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환경 운동을 학생 때 했었는데 특히 국외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을 비난할 만한 생태적 도덕적 근거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런 나의 현실적인 상황과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 지향하는 사고를 섞어서 쉽게 이렇게 생각하는 되는 거였다. 예를 들면 뉴욕을 한번 왕복비행하면 2년 정도 쓸 수 있는 이산화탄소를 소비하게 되는 것이고 여행이 자본주의적인 소비문화와 결부되어있고 그때는 내가 갈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이 두 가지 계기로 깨어졌다. 하나는 2009년에 제주에 여행 온 것과 또 하나는 2013 결혼하면서 신혼여행을 외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마음의 장벽이 깨짐과 동시에 말 그대로  신세계를 만났다. 내가 알고 내가 경험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일단은 시작적으로 육체적 감각적으로 경험하면서 그 세계에 빠지게 되었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도 최저임금이하로 벌며 살았지만 1년에 서너 번은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서 외국에 나갔다. 내 생각에 내가 지적인 관심도 많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여행에 탐닉하게 된 것은 육체적인 감각들 특히 시각적인 감각들 때문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시각적 감각들로 인해 막 빠져 들면서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그렇게 4-5년을 다니고 나서 제주로 오게 되니까 어쨌든 물리적 환경도 달라지고 제주도에서 새로운 생활을 경험해야 하고, 그동안 주로 여행을 아내와 함께 다녔는데 서로 시간을 맞추는 것들도 힘들어지면서 해외로의 여행이 이번에는 쉬어가는 타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 동안 금기시했었던 그 이후에는 엄청 탐닉했던 여행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준 것인 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감정이 되게 복잡하다. 여기 오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나는 현재 그런 상태이다.
 
윤여일
: 여행에서 느끼는 감각 특히 여행이 1차적 눈을 만족시키는 거고 어떤 사람에게는 2차적으로 입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니체의 표현 중에  뭔가가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은 잘못 모고 있다는 것이라는 표현이 있다.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범주 안에서 밖에 그것을 못 본다라는 뜻이고 그래서 그것이 안 보인다. 아니면 일면만 보인다고 하는.  
한자어로 덕(德)에는 눈 목(目)자가 있다. 이 옆에 여러 가지 표현이 있다. 행동한다는 것도 있고 눈 목자 아래에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고 또 눈 목자에 열십자라는 것도 있는데 내 방식대로 해석을 하면 이것은 복수성 의미하는 것 같다. 즉 본다고 하는 것 안에는 이미 여러 가지가 작용하고 있다. 마음이라는 것을 여기 적어 놨던 것처럼 뭔가 판단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복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때 ‘나’라고 하는 맥락과 ‘나’가 있는 낯선 사회와의 충돌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회 안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선택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해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봤을 때 그 옆에 있는 움직임들이 촉발되게 되는 것이지 않나. 그래서 ‘본다’라고 하는 게 사실 여행을 지배하고 있는 거의 가장 중요한 감각이긴 한데 그 ‘본다’라고 하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무엇인가, ‘본다’라는 동사와 관련해서 그것에 인접한 다른 동사들이 있는데, 그것으로부터 짚어도 여행은 공부의 한 가지 형식으로서 사고할 지점들이 많이 있을 것 같다. 원래 이 자리를 갖기 전에 4-5월 정도에 김태연 기자와 만나서 여행이란 주제를 하고 싶다 얘기하고 그 사이 페루와 볼리비아 다녀왔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은 강연처럼 하면서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찍어온 사진을 보여주며 막 다녀온 여행에 대해서 얘기하려다가 이번 다녀온 여행 끝판에 가방을 도둑맞으면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여행의 여자라는 표현도 쓰고 싶지 않는 상태에서 카메라조차 들고 있지 못하고 있다. 여행을 혼자 다니는데 사진 찍는 사람으로서 카메라와 동반하는 느낌이다. 내가 카메라에 무엇인가를 보여주면 카메라가 언젠가 내게 그것을 사진의 형태로 다시 보여준다. 착상을 해서 그것을 보존시켜 주면 그것이 나에게 형상이 된다. 상이 있는 거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형태가 되는 과정이다. 되게 좋은 동반자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관계를 아주 잘못 맺은 경우였었다. 그래서 뭘 하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 일단 여행은 공부의 내용이란 것이다 이거 하나 준비를 하고 그 자리에 모인 분들이라면 여행이란 말을 꺼내면 뭔가 당연히 얘기가 흘러나올 것 같고 논점을 끄집어내는 것은 당연히 가능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여행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복잡한 프리즘이다. 그래서 거기에 뭔가 투과되는 빛이 반사되는 양상이 당연히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여행이라는 말 앞에 우리가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산다’를 구성하고 있는 ‘떠난다, 머문다, 간다’라는 동사들이 당연히 그 안에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냥 여행 얘기로 뭔가 말을 듣기만 하면 그 말을 끌어내기 위해서 짧은 글 하나만 있으면 이 시간은 충분히 유의미하게 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태연
: 뭔가를 결론 내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이제 이 여행이라는 얘기를 제주도에서 한다는 게 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주제를 말씀해 주셨을 때도 이게 탐라순담과 무관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다. 관광지 여행지인 제주에서 살고 있는 분들도 여행 중인 분들도 오셨으니 모두에게 여행이라는 것은 다 각자 다른 것들로 조합이 되어 있다. 

김신숙
: 나도 부정적으로 여행의 나쁜 것들만 얘기 했지만 제주도의 청년들 특히 어린이 학생들이 국내여행이나 해외여행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조카들이 큰 후부터는 이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많이 다니게 되었다. 이 아이들이 경험을 해야 커서 나처럼 두려워서 배낭여행을 머뭇거리는 그런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로 여행이라는 것은 공부의 한 형식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 또 제주도 같은 경우에 여행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과정이 더 많이 필요한 것 같다. 제주도를 여행의 플랫폼화 해서 이 곳을 다 쓰겠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많이 보는데 그렇다면 여기에 남아 있는 애들에게도 강화시킬 수 있는 교육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제주도에 살면서 이 곳에 오는 모든 이주민들을 다 환영한다. 다만 이곳에 이주해 온 이주민들의 삶을 바라보면 그들이 이 거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내가 어렸을 때 이 거리를 바라보는 눈빛과 닮아 있다. 동서남북 지리를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잘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가는 여행문화와 그 아이들이 나중에 세계 각지로 나갈 수 있는 여행꾼들이 될 수 있는 콘텐츠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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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순담 스물두 번째 순서는 윤여일 제주대학교 SSK연구단 전임연구원이 '여행한다는 것과 공부한다는 것'을 주제로 이야기에 나섰다. ⓒ제주의소리

윤여일
: 내가 여행을 다니려는 이유를 말씀 드리자면 <여행의 사고>란 책의 프로필에 ‘읽고, 쓰고, 다니고, 옮긴다’라고 썼다. 처음부터 여행은 나에게 공부의 목적이 강했다. 학문이라는 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 눈높이와 관련된 것일 텐데 나는 사회학을 공부했다. 사회학은 약간 세상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는 눈높이라고 하면, 철학은 뭔가 현상을 아래서 쳐다보는 눈높이, 그리고 문학이라는 것은 세상의 현상, 사람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횡으로 보는 눈높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전공은 사회학이고 주로 공부했던 것들은 철학인데, 나는 문학책은 못 읽는다. 언제부턴가 의식적으로 안 읽기 시작했다. 시에는 계기가 있어서 최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눈높이가 나에게 줄곧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문학을 통해 획득해야 하는 이 눈높이를 나는 무언가를 하면 획득할 수 있을까가 나의 관심이었다. 내게 중요한 중국인 스승이 계시다. 중국인 스승에게 일본에 있었을 때 대학원 수업이 있었고 그 수업자리에서 선생님이 수업하시는 방법이 아주 흥미로웠다. 한사람만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처럼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질문을 할 때 내가 생각했을 때 뭐 질문을 저렇게 밖에 못해 라는 생각이 드는 질문에 대해서도 항상 참 좋은 질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게 단지 립 서비스가 아니라 선생님 입을 거쳐 가면 질문이 정말 좋은 질문이 되었다. 모두가 같이 음미해야 될 질문이 되었다.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해 답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을 진전시키는 방법으로 자기 얘기를 거쳐 가셨다. 흥미로웠던 게 자기 얘기를 거쳐 갈 때 항상 체험담을 꺼내셨다. 그래서 되게 추상적인 질문이라 하더라도 그 선생님의 얘기를 거치며 그 자리에서 모두가 실감할 수 있는 어떤 이야기가 되었다. 즉 그 선생님의 체험 속에 있는 어떤 종류의 보편성이라고 할까 번역 가능성이라고 할까 뭔가가 있는 거다. 선생님의 발언 속에서 그것이 기입되니까 원래 누군가의 고민 속에서 나온 그 얘기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얘기가 되는 회로같은 것들이 있었던 거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 선생님을 떠날 시기가 되었는데 뭔가 이것을 스스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여행을 가고 특히 여행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이라는 게 자신의 체험인데 자칫 잘못하면 시간에 따른 수기 형식이 되어 버린다. 언제 어디에 갔는데 어땠다라고 하는 식이. 그런데 그건 굳이 독자들과 함께 공유할만한 글이 되지는 않을 거다. 세상을 횡으로 대하는 눈높이가 부족하다는 그 사실 내가 결여되었다고 느끼고 있는 그 부분을 내가 문학책을 읽거나 문학 행위를 하면서 얻지는 못하니까 여행기를 쓴다고 한다면 그 눈높이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겠다 라는 예감 속에서 여행을 갔던 거다. 그 때 인물과 사상이라는 잡지에 매달 연재를 했었다. 그런데 여행을 계속 가다보니 한 달에 한번 2년 동안 가다보니 체험을 과장하게 되었다. 매호마다 매달 마다 다른 여행지에 대한 글이 필요한데 계속 여행을 다니고 있을 순 없으니까 한번 나갔을 때 ᄈᆞᆯ리 다녀야 하고 원고료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그렇게 여행을 다녀서 쓴다고 해도 여행비 충당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되도록 비용 안들이고 글감을 얻을 만큼 세게 체험하고. 그 전에는 여행을 가서  그 여행을 한 걸 가지고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쓰다와 여행하다가 역전되어서 쓰기위해 여행 다니게 되어서 여행을 착취적으로 하게 되었다. 몸도 힘들어 지고. 이런 식으로 계속 다녀서는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동안 여행을 안다녔다. 쓰기라는 행위를 여행과 같이해서 나는 되게 좋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읽고, 쓰고, 다니고, 옮긴다’라고 했는데, 읽는다고 할 때 우리가 텍스트를 읽는다. 텍스트에서는 보통 읽었을 때 밑줄 긋게 되는 문장이 있다. 어떤 텍스트는 뭔가 행간이 읽히는듯 하다. 쓰여진 것 너머에 있는 쓰여지지 않는 것 아직 문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것들이 읽히는 듯 하다. 아니면 어떤 텍스트 같은 경우에는 특히 두꺼운 책의 경우 뭔가 내가 집중해서 읽으면 그 책의 전치사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어떤 작가가 관심이 있으면 한권의 책을 읽고 다른 책을 읽고 ‘이 책과 이 책의 관계는 뭐지?’, ‘이것은 어떤 삶속에서 나온 책이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읽는다고 할 때 그 읽는다에 여러층의가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만약에 우리가 그것을 여행지를 읽는다는 식의 얘기로 옮겨본다면 문면으로 드러나서 우리가 밑줄을 긋게 되는 것은 우리가 본다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 온 것이겠다. 어떤 이제까지의 체험들이 있고 그것을 환기시켜서 특히 뭔가가 내 눈에 꽂히게 되는 게 있는 것이겠다. 만약에 우리가 텍스트에서 행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행지에서 뭘까? 뭔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직주해 내는 삶의 논리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 공간이 낯선 여행자에게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있지 않나. ‘이 상황에서 저 사람들은 왜 윙크를 할까?’ 사회마다 밑그림 같은 것들이 있을 거라 난 생각한다. 눈에 드러나는 것은 아닌데 사람들의 동선, 사람들의 행위의 양상을 얼마간 결정하는 것.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서울은 도쿄와 밑그림이 비슷한 곳이어서 서울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 도쿄에 가도 일본어를 모른다 해도 별로 길을 잃는 일은 없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인도의 바라나시에 가면 길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사회의 밑그림이 다르기 때문에. 만약 텍스트에서 행간이라고 한다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그 사회를 만들어내는 직조해 내고 있는 삶의 논리 같은 것, 내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데 그 안의 행위의 양상 속에는 있는 어떤 것들이 있을 것이다. 한 텍스트의 전체상이라고 한다라면 여행지에서는 뭐가 될까? 그건 아마 그 사회에 관류하고 있는 사회적인 이념일수도 있을 테고 가치일수도 있을 테고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일수도 있을 것이다. 보통 여행가서는 우리가 텍스트에서 읽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 정도를 읽는다. 하지만 실제 읽을 수 있는 것은 훨씬 더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읽으려고 할 때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그런데 이것은 텍스팅 된 것과는 다르다. 텍스트는 어차피 내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되어있다. 행간은 여러 차례 읽으면 드러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여행지 안에선 행간 자체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전체상은 더더군다나 읽기가 어렵다. 물론 그 여행지에 가기 전에 배경 지식을 미리 가지고 준비해서 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자칫하면 독해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에 근거해서 거기에서 내가 접하는 내용의 의미를 끄집어내게 된다. 뽑아내듯이. 결국 아까 이야기 했던 눈의 시선이 위로 가 버리는 것이다. 가령 인도에 가기 전에 불가촉천민에 대해 잔뜩 무언가 내용을 읽히고 가면  사람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불가촉천민으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얼마간의 배경 지식은 필요하긴 한데 그것은 자칫하면 눈높이를 옮겨버릴 가능성이 크다. 거기서는 지식이 되게 위험하게 쓰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여행에서 해보려고 했던 것은 일단 문면 안에 드러나는 내 눈에 와 닿는 것들을 먼저 보고 그리고 행간을 읽고 전체상을 일고 싶은데 그것이 지식의 행위 그러니까 보통 언급되는 좁은 영역에서의 지식을 빌리지 않고 그런 눈높이를 갖는 게 여행의 목적이었다. 그 선생님이 그 수업에서 하셨던 것처럼 내 어떤 체험을 되는 데 까지 분해해서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체험의 형태로 가공해 내는 것 이라는 것을 나에게 부과하고 싶었다. 여기 수면이 있다. 수면에 돌을 던지면 파장이 일어난다. 돌이 더 깊은 곳에 들어갈수록 파장은 넓게 퍼질 것이다. 그 수면에 있는 물을 낯선 타지라고 하고 나를 작은 돌멩이라고 한다면 내가 그 곳에 떨어져서 더 깊은 곳에 진입하면 진입할수록 내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 파장은 더 넓어져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쓰는 사람으로서 그런 것들을 나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싶은 게 있었다. 또한 동시에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학교 안에 학계에 있으니까 논문을 쓴다. 세상에는 써야 할 게 너무나 많이 있는데 학계에서 논문만 쓰다보면 세상에서 쓸 수 있는 것들이 얼마 안 되고 그리고 쓰기위해 읽을 수 있는 텍스트들이 너무 제한된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여행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삶으로부터 일탈해서 남의 삶에 인접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여행은 기본은 삶이고 여행이 삶 혹은 일상이라고 한다면 모든 것들이 주제가 될 수 있다. 모든 것들을 바깥에 나갔다 왔다는 경험을 통해 다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이제까지 읽던 책을 여행 간다는 감각 속에서 다시 읽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예감이 내게 있었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이라고 할 때 그 책의 내용 자체가 좋을 수도 있지만 그 책을 읽는 독자가 좋아야지 그 책이 좋은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난 생각한다. 좋은 때에 그 책을 읽어야 한다. 안 그러면 좋은 책이라고 얘기되는 것을 자칫 엉뚱한 시간에 읽어 버려서 나 자신에게 전혀 좋게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여행을 간다라고 생각을 하면 어떤 책들이 나에게 좋게 작용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나와 있는 어떤 것이든 여행에 나가서는 다른 각도에서 책을 볼 만한 여지가 있고 더군다나 나는 쓸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쓰는 것을 소설의 어떤 할 활동으로 부과한 저한테는 여행을 한다, 여행을 하고 쓴다는 게 나가서 쓰는 범위를 다른 방식으로 확장시키고 읽는 텍스트도 다른 방식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그런데 그것은 꼭 체험수기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자로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기입되는 방식이라고 하는 게 있는 것이지 않나. 그리고 다니게 되고. 다닐 때는 다니는 과정에서 맥락의 부대낌 같은 것들이 그 안에서  생기게 된다. 전에 미얀마에 있었을 때 미국에서 온 어떤 사진 기자랑 같이 여행 다녔었다. 그 사람은 사진을 찍어서 어디 웹 사이트에 올리면 그 사진을 신문사에 사갔다.  그쪽 지역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별로 돈이 없었고 나는 사진이 배우고 싶어서 일주일 동안 여행을 같이 다니게 되었다. 경비는 내가 대고 대신 낮에 찍었던 사진을 그 분이 밤에 이런 식으로 찍으면 더 좋겠다고 품평해 주는 방식으로. 그 분과 미얀마의 깊은 오지로 들어갔다. 불도 전기도 없는 한 마을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내가 처음 들어간 한국인이었다. 그 마을에서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큰 환대를 받았다. 그때 그 마을에서 가장 귀한 음식을 내주었는데 그게 일본 봉지 라면이었다. 술을 맛있었다. 거기에 있는 술을 잔뜩 먹고 다음날이 되었다. 우리도 나갈 때 이분들에게 뭔가 답례를 해야 하는데 가지고 있는 게 놓고 떠날 수 있는 게 돈밖에 없었다. 얼마를 드려야 되는 지에 대해서 그 사진기자와 나 사이에 약간의 논쟁이 오갔다. 나는 미얀마는 물가가 낮은 사회이긴 하지만 게스트 하우스가 없어서 묵으면 보통 호텔에 묵게 되고 호텔은 보통 30달러가 넘으니까 그리고 나에게는 이곳이 30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시간을 보낸 곳이기 때문에 최소 30달러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분은 30달러라고 하는 건 이 사람들에게 굉장히 큰돈이기 때문에 그 돈을 내고 가는 것 이 사람들에게 안 좋을 수 있다. 그 얘기가 어디까지 번졌냐면 자꾸 그렇게 되면 외국인들을 유치하려고 할 수 있고 그럼 그것 때문에 마을이 변할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갔다. 물론 그것은 그 마을 그 사회에 대한 그 사진기자의 애정일 것이다. 아까 그런 얘기를 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식물이고 나는 동물처럼 오고 갈 수 있다는 그 표현을 그 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때 내가 뭔가 행위를 해야 한다. 그 ‘덕(德)’자를 생각 해 보자. 여기는 선택지가 되게 여러 가지다. 내가 뭔가를 보고 경험했다. 내 마음에서 뭔가 판단이 일어나고 행위를 해야 한다. 어떻게 행위를 하는 게 옳을 것인가? 그 때 자명한 판단기준 같은 것은 없다. 그리고 판단기준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고 그리고 복수의 판단기준이라고 한다면 그것들의 경중이 다를 수 있다. 정말 별거 아니다. 얼마를 내고 나올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그런데 그 행위를 파고 들어가면 거기에서 걸어 나오는 얘기들은 되게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다. 결국 나는 30달러를 그 분은 3달러를 내는 방식으로 그 곳을 떠나왔는데 자명하지 않다. 그리고 ‘다닌다’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음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런 행위를 나는 마지막 표현이 ‘옮긴다’인데 옮겨 온다. 옮겨올 땐 더군다나 써야한다. 그걸 아까 얘기 했던 것처럼 한국어로 써야 된다. 그런데 한국어로 써야 된다 할 때 왜 내가 경험했던 그 사람은 내 글 안에서는 갑자기 그가 되어 버려서 3인칭으로 제일 멀어지고 나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우리라고 하거나 너라고 하는 한국어 독자들한테 그 글을 쓰게 되는 것일까. 이게 나한테 쓰는 동안에 계속 겪게 되는 중요한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쓸 때 감각이 조금 달라지긴 했다. 나에게 글 쓸 때 어떤 별자리 같은 어떤 글을 쓸 때 작용하는 것들이 있다. 그 별은 다 어떤 사람들이다. 나는 어떤 시간 속에서 글을 쓰는가와 관련된 문제이다. 별자리라는 것은 지금 우리 눈에는 동시에 보지만 그 시간들은 다 다르다. 나는 동아시아에 쪽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 내가 동아시아에 관한 글을 쓸 때 그 글에는 한국인만 있지는 않다. 이게 그동안의 여행을 통해서 내가 얻어낸 것이라고 한다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어떤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사상가가 있다. 일본의 친구들이 있다. 중국에서 여행하다가 만난 어떤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미얀마에서 봤던 어떤 장면들도 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많은 얘기를 나눠보고 뭔가 이 사람의 고민이 나에게 닿는구나 느꼈던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별처럼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는 지금은 살아있지 않은 동시대에 있지 않은 인물들도 있다. 과거의 사상가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루는 어떤 종류의 별들로 이루어진 별자리 같은 것이 있다. 지금 특히 동아시아 관련된 글을 쓸 때에는 그 공간에서 글을 쓰는 느낌이다. 그럼 그 사이에 어떤 인력과 척력 같은 것들이 작용한다. 내가 이 문장을 이렇게 쓰면 가령 그 중국인 선생은 어떻게 읽을까? 내가 지금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연극인이 있는데 그 연극인은 이 문장을 어떻게 읽을까? 루쉰이라면 이 문장에 대해서 어떻게 볼까?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네줄까? 그 별자리 속에서 이런 저런 힘의 관계 속에서 문장이 쓰인다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나는 중남미로 여행을 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직 그 세계까지로 쓰기의 시간이 확장되지는 않는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나에겐 확장이 안 될 것 같긴 하다. 지금 글을 쓸 때 그게 번역이 안 된다 하더라도 어떤 주제의 글을 쓸 때에는 그 감각이 그 공간으로 확장되어서 나는 한국어로 글을 쓰지만 그것이 한국어 독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사고하지 않고 최근에 그래도 몇 년 동안은 그런 실감의 공간속에서 나는 글을 쓰는구나 라고 하는 것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런 감각을 획득하게 된 게 나에게는 그 전에 다녔던 여행이 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다보니 쓰는 걸로 끝나버렸다. 항상 쓰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까 여행얘기로 꺼내서 쓰기 얘기로 결국 돌아오고 말았다.  

신태희
: 서점에 가면 여행에 관한 책이 너무너무 많다. 예전에는 단순히 여행에 대한 안내서, <세계를 간다>나 <Lonely Planet> 같은 걸 보고 다녔었다. 이번에는 그 여행을 하고 난 다음의 결과물이다. 여행에 관한 단상이나 그런 느낌들. 일주일 전에 이병율 시인이 제주대학교 아라뮤즈홀에서 문학에 대한 얘기는 일절 안하시고 여행에 관한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하셨다. 여행은 공부다란 얘기를 그 분도 하셨다. 내가 여행가기 전에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나서 여행을 시작하려는 그 마음은 있는데 이게 다 하나님의 뜻인 것 같아서.

윤여일
: 그 시집이 이 공간에 있나?

신태희
: 있다. 예전에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갈 때 특이한 체험이긴 한데 분명히 기차역이었고 역무원도 있는데 우리는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렸고 기차가 안 왔다. 나중에 가보니 철로가 모래에 묻혀 있었다. 그걸 시로 쓴 게 있다. 여행에 관한 시를 쓸 때 그 때의 기억이 굉장히 강렬해서 그게 시로 소환 되고 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제주에서 떠나는 제주 여행을 하고 있다. 너무 떠나고 싶은데 당장 시간도 돈도 여력이 안 되니까 제주의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곳 가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보니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그게 다 없어질 풍경들이다. 허물어져가는 돌담이나 빈 공간들, 빈터, 그리고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 같은 것들. 이집트의 올드 타운 같은 곳도 그것을 고수하고 관광사업을 하는데 제주도 같은 경우는 그 것을 다 해체 시켜 버린다. 그래서 참 안타깝다. 시와 오아시스 같은 곳에 가면 흙으로만 지은 그런 옛날 집들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허물어 졌으면 보수도 하고 있다. 그런데 제주는 다 없애버리고 있다. 어제 신화 역사 공원에 가봤는데 너무나 안타까웠다. 진입로며 주차장이며 이런 것들을 조성하면서 얼마나 많은 자연 환경이 파괴되었나. 내 생각에는 제주도에 필요하지도 않는 놀이공원과 같은 공간들을 만들어서 우리는 제주에 빚지고 있는데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건가? 대세에 밀려나는 제주의 환경들과 그 올드타운의 정취가 없게 되었다. 

최수진
: 제주로 여행 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바다가 좋고 하늘이 좋고 그런 것도 있지만 나 같은 경우는 제주에 자주 오다 보니까 처음 왔을 때는 유명한 관광지를 일단 갔다. 하지만 그 다음부턴 사실 나도 지도를 펼쳐놓고 이 동네가 어디인지는 보지만 그냥 마을 곳곳으로 들어간다. 귤밭을 걸어가고 나도 모르게 갔던 그 골목에서 무서움도 느껴보고 또 그 돌담들에 대한 엄청난 감동도 받고. 제주의 옛 문화에 대한 정취가 남아 있는 게 좋다. 나는 우도도 정말 좋아했다. 10여 년 전에 우도에 갔을 때는 사람이 정말 없었다. 우도로 들어가는 그 배에 나랑 친구랑 우도 사는 자매아이 해서 넷이서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우도는 관광지가 아니었다. 우도 해녀 어르신들이 자기네 집 방한 칸을 민박으로 내주는 정도. 그 뒤로 우도는 엄청난 관광지가 되었다. 이젠 우도에 안 들어간다. 왜냐면 너무 두렵다. 내가 처음에 봤던 반했던 우도의 단상 같은 것들이 화면으로 봤을 때 바뀌어 있어서 실망하게 될 것 같아서 못 가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제주가 관광지화가 너무 크게 되면서 중국인들 많이 오고 그들의 투자들에 의해서 좋은 땅 서울 사람들이 얘기 할 때 제주의 좋고 멋진 땅은 중국인이 다 샀다더라 라는 소문이 있다. 그러다 보니 제주와 오는 게 꺼려지는 부분이 있다. 요즘에 사드 때문에 중국인이 안 오니까 사람들이 지금이 딱 제주 가야할 때다 중국인 없을 때 가야 한다고 얘기를 많이 한다. 올해는 제 주변에서 지금 제주도에 가야한다고 엄청 말을 많이 했다. 정작 제주에 여행을 오는 저 같은 사람들 중에 제주의 고유한 모습을 너무 사랑해서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결국 제주 안에서는 그것들이 여러 가지 환경적인, 그리고 관광지가 되어가는 어쩔 수 없는 순리 때문에 정작 우리가 제주에 가는 이유가 상실되고 다른 모습으로 자꾸 변하고 있다. 나도 관광객이고 여행자지만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항상 나는 제주가 왜 이렇게 발전하냐,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나 열변을 토했었다. 저도 역시 그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제주 이주를 앞뒀을 때 주변에서 굉장히 겁을 많이 줬다. 제주 토박이들이 굉장히 육지 사람들을 싫어하고 배타적이고 절대 가서 마음 주지 말라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아까 말씀 하신 것처럼 너무 큰 사전 지식을 갖고 오다 보면 내게도 편견이 생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조금 말을 싸늘하게 하거나 거칠게 하면 ‘역시 제주사람들은...’ 이렇게 편견이 생겼다. 내가 너무 그 마음을 갖고 와서 편견이 생긴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반대로 제주에 있는 분들도 외부에서 온 사람들 때문에 여기가 바뀌고 있다는 오해가 좀 풀렸으면 좋겠다. 외부에서 여행 오는 여행자들도 제주를 너무 사랑하고 제주의 정취를 너무 사랑해서 그게 좋아서 여행을 오는 건데 제주에서 그게 없어지는 게 너무 안타깝다. 멋진 리조트가 아니라 우연히 발견한 시골길 우연히 발견한 돌담에 반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들이 나누어 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자로서는.

윤여일
: 어떤 풍경을 봤을 때 이것이 보존되었으면 좋겠다라든가 이렇게 바뀌기 이전의 모습을 보고 싶다라든가 라는 것이 자신의 시선이 여행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그 사회에 대한 그 마을의 장면에 대한 애정인 것 맞는 것 같다. 그 풍경을 직주하고 있는 여러 힘 관계가 있을 것이다. 감상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거기까지 나아가야 한다. 

최수진
: 나도 그 부분에 공감한다. 그런데 제주에 계신 분들 중에 자꾸 여행자가 많아져서 제주가 망가진다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것도 맞는 얘기지만 반대로 여행자들도 제주를 너무 사랑하고 강정 마을 같은 경우도 서울에 있는 내 지인들 중에도 제주에 내려와서 강정마을에서 같이 운동하고 싸우고 그랬던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제주를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제주에 계신 분들 뿐 아니라 육지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제주에 대한 애정을 많이 갖고 그런 마음들이 있다. 

윤여일
: 제주에 온 1년 3개월 된 저로서는 제주에 대해 얘기하는 건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차피 더 있을 거니까 이곳에서 거주할 거니까 거주하면서 진입해야 하는 것 같다. 아까 얘기한 그거다. 어떤 역사적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내 소요가 아니라 거기서 발화하려면 진입하려는 개채로서의 내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그래서 그것을 말할 수 있는 내 시간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은 그런 말을 못하긴 했다. 한편으로는 여행이라고 하는 말이 우리의 기억과 문제의식과 말 속에서 여행한 두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이라는 말이 맨 처음 어떤 식으로 등장을 해서 어떤 식으로 돌아다니는지 그리고 그 말은 다시 이 공간으로 온 것 같다. 제주의 구체적인 이 공간으로. 그리고 두 시간동안 여행을 같이 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기록 = 이지혜 코디네이터, 정리 = 김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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