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71)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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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7.
긴 연휴 끝에 쓰는 글이라 지금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있는 책을 새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제프리 윅스(Jeffrey Weeks)의 『섹슈얼리티: 성의 정치』로 마음을 굳혔다. 예전에 영어본을 대충 훑어본 기억으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다룰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많이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제주대학교의 도서관은 물론 어떤 도서관에서도 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연휴가 시작되었고 원고마감은 8일이니 책을 구매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제를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증오와 혐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대안을 찾기 위해서 내 안에 남아 있는 소비주의의 단면의 결과물이자, 언제나 ‘처참한’ 심정을 갖게 하는, 서문과 목차만 읽은 책들 사이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때 최근에 서가에 ‘뒹굴기’ 시작한 책 한권을 발견했다.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마티야 센(Amartya Sen)과 함께 역량접근(capability approach)을 주도하고 있는 마사 너스바움(Martha Nussbaum)의 책이었다. 철학과 사회과학에서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비합리적인 이성의 어두운 면 정도로 취급받았던 감정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감정의 격동』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소개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분량이었다. 본문만 624쪽이니. 하지만 이 걱정은 금방 사라졌다. 흥미로웠다. 아마 사회과학과 철학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손에서 놓기가 쉽지 않을 만큼. 흥미로운 만큼 날카로운 비판의 비수가 수없이 가슴에 꽂히는 것 같았다. 너스바움이 책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고수하고 있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성전’처럼 받들어지는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자유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 한참동안이나 사람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 아니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너스바움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는 인권으로부터 시작했으며, 그것은 곧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취약’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상호의존적’이지만, 인간이기에 ‘실존적으로 자기중심적’이라고 말이다. 다소 복잡하고, 다양한 이론적 전통에 근거한 논증을 거치고 있지만 너스바움의 주장을 단순화시키면 인간은 매우 취약한 존재라는 것, 그런데 유아의 단계에서는 그러한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완벽하다고 착각한다는 것, 그리고 어린 아이가 스스로와 돌봄 제공자를 구분하고 자기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을 겪게 되지만 사람들은 완벽함이라는 규범적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들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혐오의 감정이 싹터 나온다. 

“자신이 통제력이 없고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를 회피하거나 감추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어떤 면에서 통제력을 가지거나 완벽하길 기대하기 때문인 것이다. 유아가 [자신의] 필요 상태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두 명의 완벽하지 않은 존재간의 장난스럽고 창조적인 ‘미묘한 상호 작용’ 속에서 긍정적인 기쁨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바람직한 발달과정을 거치면 신뢰를 통해 전지전능감과 초월감을 점차 이완시킬 수 있게 된다.”(350)

“‘미묘한 상호작용’이라는 위니콧의 생각에 담겨 있는 것처럼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려면 가정과 사회 측면에서 모두 [적절한] 양육이 이뤄져야 한다. 완벽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가정과, 지배적인 사회 행위자들이 결핍과 취약성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균형이 무너져서 공허함이 분노나 우울증 또는 이 둘 모두를 유발할 위험성이 크다.”(365)

너스바움이 ‘원초적 수치심’이라고 부르는 완벽함에 대한 동경은 혐오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너스바움은 심리학적 임상결과와 역사연구를 토대로 혐오의 감정은 우리들 자신을 동물성으로부터 차단하려는 욕구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우리들 몸에 대한 혐오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은 취약하고, 냄새나고, 배설을 하며, 점액질이 흘러나오는 불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은 완전함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의해 은폐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은폐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동물과 우리들 사이에 놓인 존재를 ‘상상해야’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유사 이래 특정한 혐오의 속성들(점액성, 악취, 점착성, 부패, 불결함)은 반복적이고 변함없이 일정한 집단들과 결부되어 왔으며, 실제로 그들에게 투영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권을 지닌 집단들은 이들을 통해 자신들의 보다 우월한 인간적 지위를 명백히 하려고 한 것이다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불가촉천민, 하층 계급 사람들은 모두 육신의 오물로 더렵혀진 존재로 상상되었다.”(201)

이처럼 집단적으로 완벽함의 신화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완벽하지 못한’ 존재들이 필요하다.  모두가 생물학적으로 취약한 존재이지만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그 취약함이 덧씌워질 수 있는 ‘타자’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너스바움의 설득력 있는 주장처럼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여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성 차별적 혐오는 이러한 형태의 투영이 거의 모든 사회에서 변화 없이 규칙적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해주는 경험적 출발점이 된다. 여성은 출산을 하기 때문에 동물적 삶의 연속성, 몸의 유한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또한 여성은 정액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남성의 몸에서 빠져나간 정액이 남성에게 혐오를 유발한다면, 남성들은 혐오 물질로 인해 여성들이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여성은 유약하고, 끈적거리며, 유동적이고, 냄새나는 존재로서, 여성의 몸은 오염된 불결한 영역으로 상상되어 왔다.”(208)

여전히 여성을 바라보는 차별적 시선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더 이상 위와 같은 생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있겠지만, 그리고 정확히 그런 생각에 근거하고 있지 않더라도 여성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공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혐오의 대상은 그 어떤 실제적인 근거를 가지지 않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또 다른 사람들로 채워질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그 자리에 동성애자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종교적인 근거를 갖는다. 하지만 너스바움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에 동성애를 비난하는 문장은 단 한 차례밖에 나오지 않는다.(「레위기」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마라. 이는 가증한 일이다.’) 그런데 탐욕을 비난하는 문장은 수백 개가 있다. 공동체를 위협하고 공동의 가치를 위협하는 것은 탐욕스러운 사람들과 탐욕스러운 행위이지만 그 누구도 그것의 전염성과 해악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비난을 하지만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 사람들의 평등한 시민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은 있어 본 적이 없다.(470)

너스바움을 따라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동성애 문제는 소위 ‘도덕적 공황’을 초래하고 있다. 이성간 결합에 근거한 ‘정상적인’ 가족제도를 위협한다고, 도덕적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제도에 문제가 생긴 것이 게이와 레즈비언 탓일까?(472) 너스바움은 오히려 “많은 미국인들이 게이 결혼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결혼이 가부장적 통제를 벗어난 섹스(그리고 여성)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통제력의 상실을 초래하는 변화에 대한 이러한 불안감과 신봉해 오던 가치의 쇠퇴는 쉽게 나르시시즘적 공포와 경직성을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결혼제도가 위협받고 있다는 두려움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남성 지배를 벗어나려는 여성에 대한 공황”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474)

하지만 결혼제도의 위기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가족은 폭력, 학대, 멸시의 장소이기도 하며, 결혼은 여성에게는 출산, 양육, 돌봄에 대한 부담을 지우는 제도적 억압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건설적인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공포는 이러한 문제들이 고민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487-8)

여성혐오와 동성애 혐오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취약함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완벽함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낸 결과임은 동성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감지된다. 비록 두려움과 도덕적 분노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여성동성애자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 이성애자 여성들이 동성애 남성에게 가지는 혐오의 감정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가장 극심한 혐오는 대개 남성들이 남성 동성애자들을 향해 표출된다. 남성의 몸이 침투될 수 있다는 생각,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정액과 배설물이 남성의 몸 안에서 섞인다는 것은 “상상 가능한 가장 혐오스러운 사고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211)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너스바움의 주장을 따라가게 되면 혐오는 “사회적 순수함에 대한 비현실적인 낭만적 환상에 사로잡히게” 해서,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취약한’ 존재이며 그래서 ‘사회적으로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잊게 만든다. 동료 인간들 중 특정한 대상을, 그 어떤 위해도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물처럼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취급은 전염과 유사성에 대한 신비적 사고를 통해 특정집단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들까지 희생시키는 태도로 이어지기 쉽다.”(200)

어쩌면 ‘실존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기에 ‘생물학적 취약성’을 부정하고 ‘사회적 상호의존성’을 회피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굴복한다면 인간은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고 그럼으로써 존재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동물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감정을 가지며 사회적인 상호의존성을 발전시킨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언어적 존재로 지식을 전승시키면서 지속적인 진보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특징을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너스바움이 주목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생물학적 취약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사회적 상호의존성’을 학습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그럴 때에 ‘실존적 자기중심성’은 타자에 대한 혐오가 아닌 호혜와 평등의 원리 속에서 순화될 수 있다. 비록 “나르시시즘, 동물성과 유한성에 대한 기피, ‘정상’에 대한 불안한 집착”을 피할 수 없더라도, “이러한 특징들이 호혜성과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이상을 훼손시킬 수 있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야하는 지는 분명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578) 사람들을 “자기 자신 안의 취약한 부분을 좀 더 들여다보고, 일반적이고 고정된 이상보다는 유연하게 자신에게 맞는 이상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하는 것이다. (371) 이런 교육에 의해 길러진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사회는 “최소한 우리의 공동된 삶을 형성하는 제도를 만들 때 우리 모두는 아이와 같으며, 많은 면에서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회”일 것이다.(43쪽)

너스바움이 이와 같은 입장에서 장애인 차별의 문제를 논하는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이 제시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이상에 맞게 인종차별주자와 성차별주의자조차 거꾸로 된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너스바움의 말도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있다.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를 주의 깊게 구분해서, 그들이 저지른 나쁘거나 유해한 행위를 비난해야” 하며 그들도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으로서 그들에 대한 존중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99) 그리고 한 때 포르노그래피로 비난받았던, 하지만 지금은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읽혀지고 있는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와 D. H 로센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논하면서 몸에 대한 혐오,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혐오가 투영되어 성적인 것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을 진단하는 대목도 흥미롭다.(257) 현대적 포르노그래피에 적용하자면 벌거벗은 몸과 섹스에 대한 묘사는 규제되거나 검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소비되고 있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은 그 내용이 여성을 “저열하고 학대받을 만한 존재, 학대를 원하고 요구하는 존재, 모욕을 주고 학대하고 싶은 남성 욕구의 배출구로 묘사함으로써 여성혐오적인 고정관념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섹슈얼리티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259) 이에 대한 불만은 너스바움의 말처럼 몸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동료시민이 평등을 침해받은” 것에 대한 분노여야 하는 것이다.  

여성의 몸의 상품화와 관음증이 난무하는 한국사회는 너스바움이 우려하는 것처럼 혐오와 도덕적 완벽함의 신화가 겹쳐져 만들어 낸 억압적 사회가 아닐까? 섹슈얼리티를 무겁게 짓눌러서 어두운 곳으로 밀어 넣어 억압하지만, 허울뿐인 도덕적 권위의 대낮을 피해 스스로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여성의 몸을 탐하는 음습한 밤을 즐기는 사회에 대한 공적인 수치심은 약자들에게 강요되는 낙인으로서의 수치심이 아니기에 너스바움이 받아들이고 권장하고 있는 수치심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이런 수치심을 느끼게 될 수 있게 될까? /서영표 교수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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