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72) 빌렘 플루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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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렘 플루서 (원서:1983, 독일어),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윤종석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1999년.

우리는 모든 것이 급변하여 공들여 쌓은 전문지식, 과학기술도 불과 몇 년 이내에는 구식이 돼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 시대를 사는 세대들에게 있어 ‘변화’라는 말만큼 흥분되고 불안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탄생은 각 시대 라이프 스타일, 가치관 등에 있어 ‘뉴 노멀(New Normal, 새로운 표준화 또는 새로운 정상)’을 출시(?)해 왔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기술 진보, 기술 혁신과 더불어 늘 ‘새로운 정상’의 탄생과 소멸로 점철된 역사를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란 궁극적으로 기술 혁명의 역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정상’의 궤도에 갈아타서 제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라 했던가! 컴퓨터 화면이나 스마트 폰 화면 안에서 커뮤니티를 만들어 네트워킹하고, 화상 통화도 하고, 물건도 사고팔며, 음식도 주문하고, 온라인 송금도 하고, 잡다한 지식과 정보도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때로는 디지털 기기의 다양한 장치와 프로그램들이 가공한 가상세계를 체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의 책《사진의 철학을 위하여》를 주목해 보면 어떨까 하여 이번 호에 소개하고자 한다. 제목만 보면 이 책은 ‘사진’ 영역에 집중한 철학서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진의 역사로부터 20세기 말 디지털 혁명의 뿌리를 캐고, 디지털 문화가 당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위기를 성찰한 문화비평서다.

저자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1920~1991)는 마샬 맥루한(1911~1980)과 더불어 오늘날 대표적인 미디어 철학자이자 디지털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체코 프라하의 유태인 집안에서 출생하여 나치의 박해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했다가, 1970년대 초 브라질 군사독재의 위험을 피해 유럽에 다시 망명한 후 주로 프랑스와 독일의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는 특히 1980년대 초반부터 컴퓨터 등 전자 미디어로 인한 소위 '디지털 혁명'으로 상징되는 미디어의 변화로 야기되는 인간 사고방식과 문화의 패러다임 교체에 천착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짤막한 에세이 형식의 철학서로 책이 나온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당시 저자가 다루는 주제가 예언적이었기에, 오히려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읽기에 더 흥미롭고 적절하다. 당시 저자는 이 책의 후속으로 1985년에 《기술적 형상의 우주 속으로》를 발표했고, 1987년에는 《문자, 글쓰기에 미래가 있는가》를 발표했다. 이 저작들은 그림과 문자 텍스트, 문자 텍스트와 이미지(형상)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오늘날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미디어의 발전 경향과 디지털 혁명의 미래상을 예언했다.

그의 글쓰기는 체계적이기 보다는 과감한 절충성과 도발성을 띤 대화체 문체로 자극적이며 명쾌하다. 특히 본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는 가설의 성격을 띤 철학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저자는 일부러 참고문헌이나 종래의 연구물을 인용하지 않으며, 저자 자신의 ‘사진’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그와 연동한 우리시대 문화비평의 설 길을 압축적으로 거침없이 써 내리고 있다. 

사실, 198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세계적으로 인터넷은 물론 스마트폰, 디지털 카메라가 우리의 일상을 점령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저자는 어떻게 해서 이들 매체가 머지않아 우리사회에 그리고 인간문화에 이러저러한 효과와 영향을 끼치고, 심지어 그것이 인간문화의 패러다임을 교체할 것이라 예언하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내심 궁금해 하면서 읽는 내내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미디어(매체)의 탄생과 발달에 연원을 둔 인간 문화에 대한 성찰이다. 여기서 미디어(media)란 원래 서구사회에서 인간과 초월적인 세계(신) 사이를 교신해 주는 매개, 즉 ‘샤먼’을 의미했는데, 오늘날에는 인간의 신체가 소외된 가상의 망(網)인 인터넷, 신문, TV, 통신기기 등 인간의 소통을 매개해 주는 것을 통칭한다. 물론 미디어(매체)란 것이 시대에 따라 인간의 삶에 그 개입방식을 달리 했어도, 인간은 미디어(매체)를 통하여 자신의 근본구조를 변혁시키고자 바깥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전달하려는 의지와 행위로 점철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미디어(매체)인데, 이것이 곧 인간 문화인 셈이다.

저자는 태초 이래 혁명적인 미디어로 ‘그림(Bild)’, ‘문자’, ‘기술적 형상(technische Bilder)’을 꼽고 있다. 여기서 ‘그림’이라 번역된 독일어 Bild는 그림, 영상, 형상, 이미지란 의미이고, 마찬가지로 ‘기술적 형상’에서 ‘형상’ 또한 그림, 영상, 이미지란 의미이다.

책머리에 저자의 말을 엿보자.

“이 책은 태초 이래로 인간 문화에는 두 가지 대립되는 전환점이 존재한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그 첫 번째 전환점을 기원전 2000년대 중반 무렵 완성된 ‘선형문자’의 발명이고, 두 번째는 현재 우리 자신이 그 증인인 ‘기술적 형상(technische Bilder)’의 발명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3쪽)

태초에 인류는 이른바 ‘그림’의 시대였었는데, 이후 문자의 발명으로 ‘문자’의 시대로 이행하게 되었고, 오늘날 기술의 발달은 알파벳을 대체하고 다시 이미지가 우위를 점한 ‘기술적 형상’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 기술적 형상의 시대로 대변되는 우리시대는 예컨대 사진, 비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등의 프로그래밍된 기계장치에 의해 생성되는 이미지(그림)의 세계가 우리의 미디어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저자 플루서는 ‘기술적 형상’의 발명은 문화의 분열과 해체를 막아보기 위해 것으로, 전체 사회에 대해 타당성을 지니는 코드로 발명되었다고 낙관한다. 말하자면 기술적 형상의 발명으로 문화(예술과 과학 그리고 정치)의 위기가 드디어 극복될 것이라 예견한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상 미디어의 위와 같은 대혁명을 거치는 동안 문화는 크게 세 갈래 분열되어 표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는 전통적이지만 개념적·기술적으로 풍성해진 그림에 의해 자양분을 공급받은 아름다운 순수예술의 갈래로 홀로 서고, 둘은 난해한 해석적 텍스트에 의해 자양분을 공급받은 과학과 기술의 갈래로 뻗어 가고, 셋은 값싼 텍스트에 의해 자양분을 공급받은 광범위한 사회계층의 갈래로 각각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술적 형상은, “첫째로는 그림을 다시 일상생활 속으로 끌어들일 것이라는 의미에서, 둘째로는 난해한 해석적인 텍스트를 표상 가능토록 하고, 셋째로는 값싼 텍스트들 속에서도 계속 영향을 미쳤던 섬세한 마술을 다시 가시화 시킬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발명된 것이다. 기술적 형상은 예술, 과학, 그리고 정치를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를 형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미, 진, 선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코드로서 문화(예술과 과학 그리고 정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22쪽)

특히 ‘기술적 형상’의 영역에서 저자가 그 희망을 걸어 보는 장르는 ‘사진’이다. 사진은 탈역사 시대의 산물이다. 여기서 ‘탈역사’는 ‘개념(알파벳 세계)으로부터 그림(이미지)으로 돌아 왔다’는 뜻이다. 즉 텍스트 숭배에 대한 투쟁으로서의 그림(이미지)이 우리시대 다시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는 사진적 카테고리 속에서 사고를 하기 시작한다. 사진은 디지털 미디어의 고전적, 선구적 형태로 인간의 근본구조의 변화를 초래할 막강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이들이 사진사란 장치 작동인들이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가능성을 실현시킴으로써 사진 프로그램을 모두 소진시키려 한다. 즉 사진사는 사진 프로그램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능성을 남김없이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장치를 조작하고, 이리저리 돌려보고, 그 속을 엿보고 또 뚫어지게 관찰한다. 그가 장치를 매개로 세계를 주시하는 것은 이 세계가 그의 흥미를 끌기 때문이 아니라, 정보를 산출하고 사진 프로그램을 활용하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다.” (31~32쪽)

그들의 몸동작은 사진기에 의해서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그들은 상징과 유희하며, 제3차 영역(정보가 생성되는 활동영역)에서 활동하며, 정보에 관심을 갖고, 가치 없는 사물을 생산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활동을 가장 부조리한 활동이라고 간주하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저자 플루서는 사진사들을 이미 ‘장치적 미래’의 인간이라 불렀다. 사진사들 자신이 장치라는 콘텍스트 속에서 자유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존재임을 플루서는 간파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위의 전문 사진사와 아마추어 사진광들은 별개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진기를 갖고, 찍고 싶은 사진을 찍는다. 비록 카메라가 복잡한 과학적·기술적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카메라를 작동시키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들은 점점 더 완벽해지는 장치의 자동성에 도취된 이들이다. 심지어 저자 플루서는 아마추어 사진클럽을 두고 "장치적인 구조의 복잡성에 도취한 사람들의 모임, 환각에 몰입하는 장소, 탈산업적 아편소굴"(66쪽)이라 표현한다.

전문 사진사와는 달리 사진광들은 ‘정보’를 생산하기는커녕 그 실체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잉여적 영상을 찍으며, 장치에 의한 기억저장을 만들어 낼 뿐, 결코 정보를 산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들 사진광들은 사진을 자동적으로 모사된 세계로 간주한다. 이러한 사진을 그저 표면 위를 훑어보는 하나의 영상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사진의 해독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정작 중요한 사진들 또한 가려지고 만다. 저자 플루서의 ‘사진의 철학’이 경계하고 염려하는 사진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갈래이다.

어쨌든 이 책은 사진사와 사진기의 관계를 현대의 자동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기계장치와 그것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문제로 해석하면서, 소위 정보화 사회—탈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조명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시대 문화비평의 현주소를 가늠할 수 있는 지침서로 추천할 만하다.

* 이 책과 관련해서 빌렘 플루서 또 한 권의 책 《코무니콜로기》(김성재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1996년)도 일독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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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자(미학자·번역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및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근·현대 문화매체론, 제주미학론, 제주 ‘이미지’ 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미얀마 산책》(2008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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