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41) 안 무너지는 하늘을 작대기로 받치려 한다

* 무너난 : 무너진의 제주방언. 안 무너난 곧 안 무너진, 무너지지 않은
* 작대기 : 기름한 막대기 (주로 물건 따위를 버티는 데 씀)
* 바투쟁 : 받치려고의 제주방언. 여기서는 ‘하늘을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의 뜻

아직 하늘이 무너지지 않았다. 무너지지도 않은 하늘을 작대기로 받치려 한다는 말이다. 좀 우스꽝스럽다.

한데 이를 뒤집어, 하늘이 무너지려 하니 밑에서 작대기를 들이대고 무너지지 않게 받친다는 말로 들린다. 그래도 웃음이 나오는 건 매한가지다.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무너지려 하거나 반쯤 무너진 하늘, 정도가 문제 되지 않는다. 빨랫줄을 바지랑대로 받치는 거라면 모를까, 하늘을 작대기로 버티게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니까.

우리 제주 선인들은 풍부한 상상력을 지녔던 것 같다. 상황에 따라선 불가능한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이런 비유가 나올 수 없다. 장차 나타날 수 없는 불가역변화(不可逆變化)를 가정하면서 그에 대한 대응논리를 펴고 있지 않은가. 섬사람들에게 이런 담대함이 있다니 한편 놀랍기도 하다.

달리 “작대기로 하늘 바투쟁 헌다”고도 한다. 표현이 조금 다를 뿐 빗대고자 한 바는 거기서 거기다. ‘안 무너난(안 무너진)’ 라고 ‘무너지지도 않은’이라 조건을 전제한 것만 다를 뿐.

그러고저러고 간에 하늘을 긴 막대기 따위로 받친다는 것은 허황하기 짝이 없는 일. 부질없는, 한낱 공상(空想)에 불과하다. 대우주를 덮고 있는 하늘을 밑에서 떠받치다니.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무슨 전설 속의 얘기를 듣는 것 같다. ‘터무니없는’의 ‘터무니’는 맷돌의 손잡이를 뜻하는 말이다. 손잡이가 없으면 맷돌을 굴릴 수 없다. 그러니 ‘터무니없는’은 허황한 일이란 의미다.

이를테면 황당무계(荒唐無稽)함을 뜻한다. 사람의 언행이 터무니없고 허황해 믿을 수 없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가 황당무계다. 

요즘 말을 보면, 되는 대로 ‘황당하다’고 갖다 붙여 둘러대는데 원래의 뜻에서 조금 엉뚱한 쪽으로 변질돼 쓰이는 사례라 하겠다. ‘다리를 건너다 넘어져 냇물에 쓸렸다지 않나? 그런 황당한 일이 일어나다니”처럼.

‘하늘을 작대기로 받치려’ 했던, 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한 사건들, 한둘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떤 야사보다 더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나온다. 혀를 찰 정도다.

▲ 조선초기에는 관청에 출근하지 않고 결근하거나 조퇴하는 관리들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매를 쳐서 이들을 징계했다. 

어이없는 일로 처벌을 받는 관리들도 적지 않았다. 임금에게 올리는 글(상소문)에서 본인 이름 앞에 ‘신(臣)’ 자를 붙이지 않았다고 해서 파직(罷職)된 관리, 건국 직후 저녁 시부터 새벽 4시 경까지 사대문(四大門)을 통과하거나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야간통행금지령이 실시됐는데, 영(令)을 어겼다가 파직된 대사헌(사헌부의 으뜸 벼슬, 종2품)도 있었다.

▲ 태종 때 공조전서(工曹典書) 이 우(李瑀)의 황당무계한 사건.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순상(馴象)을 바치므로 삼군부(三軍府)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 우가 가 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해 그를 그만 밟아 죽이고 말았다.

▲ 조선 초기의 대표적 문신인 변계량(가사 경기체가 「화산별곡」의 작가)은 20여 년 동안 대제학(홍문관‧예문관의 으뜸 벼슬. 정2품)을 지내면서 크게 존경을 받았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후처를 방에 가둬 놓고 창문 구멍을 내어 음식을 주거나, 소변도 자유롭게 보지 못하게 하는 등 박대를 하다 결국 탄핵을 당했다.

모두 과거 역사 속의 일들이다.

“작대기로 하늘 바투쟁” 하는 일이 오늘에 일어나지 말란 법이 있는가. 

▲ 얼마 전, 서울의 유명 음식점 한일관 대표가 프렌치 불도그에 물려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목줄을 하지 않은 개에게 물려 패혈증으로 사람이 희생됐으니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라니.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1000만 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꺼리는 사람도 많은 세상이다. 더욱이 도마뱀과 이구아나 같은 파충류를 버젓이 데리고 음식점 같은 데 나가는 사람들에게 분명 문제가 있다. 눈곱만치도 타자(他者)를 배려하지 않는 점 말이다. 좋아하는 쪽 건너편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싫어할 권리도 존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제주의 자연파괴가 심각한 수위에 이른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 섬의 허파라 할  곶자왈이 파헤쳐지고 있는 난개발의 심각한 현실을 나몰라라 오불관언(吾不關焉), 소 닭 쳐다보듯 하는 것만 같아 가슴을 쓸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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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무너난 제주에 작대기 바투쟁 헌다”라 바꿨으면 좋겠다. 제주는 더 이상 무너져선 안된다. 무너지기 전에, 더 무너지지 않게 온몸으로 부둥켜안아야 할 섬이다. ‘작대기’를 받쳐서라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심지어 제주의 돌이 대량 밀반출되고. 팽나무가 수없이 배에 실려 바닷길을 건넌다는 보도에 가슴 친 게 오래전 일이다. 이러다가는 제주에 쓸 만한 돌멩이, 나무 한 그루 남아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발 제주의 자연이 더 이상 훼손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천연의 숲 곶자왈이 파헤쳐지는 것은 제주의 명줄을 끊어 놓는 일에 다름 아니다. 제주의 돌과 나무를 파 가는 것은 곧 제주의 속살을 도려내는 일이다. 제주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을 누가 대신 해주겠는가. 제주인의 책무다. 제주인은 이 섬의 파수꾼이다.

아직 제주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다간 무너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안 무너난 하늘에 작대기 바투려 헌다.” 

이 말이, 제주인들에게 충격적인 메시지가 됐으면 좋겠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제주, 그러나 이러다 머잖아 무너질 것이 눈에 보이는 제주다. ‘무너진 뒤 작대기를 받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사후 약방문이다.  

“안 무너난 제주에 작대기 바투쟁 헌다”라 바꿨으면 좋겠다. 제주는 더 이상 무너져선 안된다. 무너지기 전에, 더 무너지지 않게 온몸으로 부둥켜안아야 할 섬이다. ‘작대기’를 받쳐서라도.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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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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