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73)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유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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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박정태 역, 이학사, 2011. 출처=교보문고 홈페이지.

1. 지식인이라는 낡은 어휘 

바야흐로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다. 알파고의 위력을 체감한 사람들에게 이 단어는 매우 현실적이고 위협적이다. 정책입안자들은 이 어휘를 기반으로 국가적 어젠다를 기획하고 있고, 이러한 틈을 타서 많은 전문가들이 그것을 강연의 소재로 삼아 밥벌이에 나서고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필자로서는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아 늘 불안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에 지역 공동체에서 주최한 소위 ‘제4차 산업혁명 전문가’의 강연을 들어 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둔한 머리 탓일 것이다. 기억에 남는 것은 많은 직업들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고,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매우 우려스러운 진단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같이 강연을 들은 한 젊은 엄마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어떤 교육을 시키는 것이 좋을지 질문했다. 강사의 대답은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진부하고,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의외여서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그 강사는 자신의 아이들은 일찍이 컴퓨터를 전공해서 취직의 전망이 밝다는 자랑을 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사회는 사물인터넷 등으로 모든 것을 감시하는 사회가 될 것이므로, 그런 전방위적인 감시에도 살아남으려면 ‘신독’(愼獨)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요약하자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직업적인 능력을 갖추는 동시에 수양을 통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훌륭한 답변이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4차가 아니라 제5차 산업혁명이 곧 닥친다고 한들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요즘의 아이들에게 ‘지식인’이란 네이버 ‘지식IN’을 의미할 것이다. 지식인이라는 어휘가 예전에 가졌던 무게는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고, 지식인 계층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는 것도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의 여파인지 몰라도 지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터넷 검색 능력일 뿐, ‘지식인’이라는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과 시간 따위는 인생의 낭비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여러 직업이 사라지는 것은 우려하지만 ‘지식인’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이미 곁에는 든든한 ‘지식IN’이 있고 앞으로는 AI가 더 강력한 지식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제4차 산업혁명 전문가’는 아마도 마지막 형태의 지식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그런 정도의 대답은 ‘지식IN’이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는 순간 더 이상 그런 전문가의 강연을 듣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2. 지식인을 위한 변명

마르크스에게 깊은 감화를 받은 사르트르는 1965년 일본에서 세 차례 강연을 하면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역설했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그 강연내용을 묶은 것이다.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말하면서 사르트르는 왜 굳이 ‘변명’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그 단어 속에는 태생에서부터 보편적인 진리의 담지자가 되기 힘든 한 지식인으로서의 개인적인 고뇌가 담겨 있다. 

사르트르는 『구토』와 같은 소설을 쓴 실존주의자였음에도 마르크스주의적인 실천의 문제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던 인물이다. 마르크스와 같이 자본주의가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그는 소련, 북한, 쿠파 등을 자유민주주의보다 우월한 체제라고 옹호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실천의 문제는 자본주의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로 귀결된다. 이런 실천은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혹은 실현되어야 하는 보편적 진리에 입각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지식인의 고유한 업무이다. 따라서 지식인은 그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진리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당파성과 일치하는 것인데 지식인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층인 자본가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전문가’이다. 여러 분야의 지식을 다루는 전문가로서 그는 보편적인 지식에 접근할수록 프롤레타리아의 당파성을 실현하는 것이 역사법칙에 부합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쁘띠 부르주아로서의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보편적 진리의 구현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이 안고 있는 모순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처럼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지배계급에 의해서, 전문가 자신을 분열시키는 모순과 더불어서 만들어집니다. 한편으로 보면 상부구조와 봉급자, 하위 관리인 그는 지배자(“사”기업 또는 국가)에게 자신을 직접적으로 의존하면서 필연적으로 3차 산업의 한 집단으로서 특수층 속에 자리 잡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의 전문성은 언제나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주입된 특수주의,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그 특수주의에 대한 부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는 ‘부르주아 학문’이란 없다고 단언하지만, 그의 학문은 그 자체의 한계로 인해 부르주아적이며, 또 그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탐구를 하는 바로 그 순간만큼은 그가 자유롭게 작업을 하는 것이 사실이며, 바로 이 때문에 그의 현실 조건 속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그에겐 더욱더 쓰디쓰게 느껴지는 것입니다.”(45-46쪽)

이러한 자기 고백 속에서 스스로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고뇌가 느껴지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르트르가 ‘변명’을 통해 지켜내고자 했던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앞으로도 계속될지는 의문이다. 그런 지식인의 종말은 사르트르가 주장하듯이 그가 태생적으로 모순적인 인물이라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가 시대에 맞지 않는 ‘계몽적’, 혹은 ‘엘리트주의적’ 지식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지식인이란 지식인이 아니고서는 결코 접근하지 못할 ‘보편적인 진리’를 인식하는 인물이다. 그 보편적인 진리 속에는 공동체의 목표, 형식, 이념적 지향 뿐 아니라 정치, 경제적 제도와 법률에 관한 것도 포함된다. 한 마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에 관한 큰 그림은 지식인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혹은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은 오로지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이익을 실현할 대리인으로서의 임무를 지식인에게 위임할 때에만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런 일이 여전히 가능하려면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지식인을 자신들은 모르는 어떤 지식을 다루는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대중매체에 나오는 전문가의 말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알기 위해서 몇 가지 키워드를 인터넷에 입력하는 것으로 충분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오늘날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라는 것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지식IN이 지식인을 대체하고 있는 오늘날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진다. 스마트기기와 AI에 바탕을 둔 정보사회가 발달할수록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정보맹이 될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정보량이 많아질수록 가치 있는 정보를 선택하기는 어려워진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의 역할은 누구나 지식인이 될 수 있는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전가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향해야 할 공동체에 대한 큰 그림을 특정한 지식인에게 위임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고민할 수 있다면 그것이 민주주의에 가장 부합하는 그림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지식인’이 보편화된 오늘날 우리 모두가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여전히 말해주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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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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