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발간, 제주4.3, 베트남전쟁 등 꾹꾹 눌러 담은 아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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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형 시인. ⓒ제주의소리
제주 문학판에서 ‘이종형’ 이름 세 글자는 솔직히 생산자 보다는 조정자의 역할이 강했다. 문인협회, 작가회의...소속 단체는 달라도 공통된 숙원이나 다름없던 ‘제주문학관’을 위한 첫 단계인 제주문학의 집의 사무국장이란 녹록치 않은 자리를 묵묵하게 맡아왔다. 시간이 지나 제주문학관 설립 계획이 올해 가시권에 접어들 때는 문학계 내부뿐만 아니라 이곳, 저곳을 오가며 조율하는 역할에 힘썼다. 여기에 그의 발품을 거치지 않았다면 서울, 일본, 베트남 등 타 지역 문학인들과의 교류는 쉽지 않았을 것이란 표현이 결코 허세가 아닐 만큼 각종 궂은일을 소화했다. 좋게 말하면 중요한 실무자요, 반대로 말하면 글과는 멀다는 아쉬운 평이 나올 만도 하다. 더없이 스펙터클했던 정유년 한 해가 끝나기 전, 이종형 작가의 첫 번째 시집 소식은 그래서 반갑기 그지없다.

작가의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도서출판 삶창)은 위와 같은 이유뿐만 아니라, 늦깎이 시인으로서 60 나이를 지나 첫 번째 선보이는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학생 시절 시인의 꿈을 품었지만 가슴 속에 잠시 접어둔 채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고, 성인이 훌쩍 지나서야 다시 돌아와 2004년 <제주작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4부로 나눠 시 50여편이 실린 책에는, 본인 개인의 역사부터 되돌아본다. “육군 대위였다는 육지것 내 아버지”를 둔 본인이 선택하기 전의 역사부터 ‘손주’라는 작은 생명을 맞이하는 고귀한 역사까지, 상처와 삶의 여정이 시 하나 하나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작가의 첫 번째 책은 개인적인 역사와 연결해 꾸준히 관심가져온 제주4.3을 꾹꾹 눌러 담았고, 직접 베트남을 방문해 느낀 전쟁과 학살의 역사도 동봉돼 있어 만만치 않은 무게감을 지닌다.

출판사는 “이 시집은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 4.3에 휘말린 개인사에 대한 감정들에 휩싸인 다음, 새로운 생명을 얻음으로써 맞게 되는 삶에 대한 담담한 기쁨을 거쳐, 베트남 민중들에게 손을 내미는 구조로 짜여진 셈”이라고 소개했다.

통점
이종형


들짐승조차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
좁디좁은 입구
키를 낮추고 몸을 비틀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
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겨울
좁은 굴속의 한기寒氣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
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 간
이 빠진 사기그릇 몇 점
녹슨 솥뚜껑과
시절 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

그 앞에서라면
당신도 아마
오랫동안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처럼
사나흘 족히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이종형


세 살에 아비 잃은 소년은
아비보다 더 나이 든 사내가 되었습니다

유품이라고 남겨진
새끼손가락 같은 상아 도장 하나
그 세월 긴 인연을 벗겨내기에
한없이 가엽고 가벼우나
마침내 사내는
세월을 거슬러 돌아와
소년에게 미안하다 합니다

먼 길을 돌아 걸어온 순례의 끝
죽음의 그늘을 벗기는
꽃이 피고 봄이 오고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간절한 노래는 다시 시작되나
나는 아직도 당신과 작별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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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를 쓴 안도현 시인은 “이종형 시인의 소개로 한라산에서 따 왔다는 고사리에다 제주 돼지를 썰어 넣어 볶은 안주를 먹은 적 있다. 이 시집에는 그걸 입에 넣고 물컹거리는 비계를 씹을 때의 서러운 느낌이 그대로 있다. 누대에 걸쳐 쌓여온 시간의 냄새, 역사의 뒤통수를 후려치던 순간의 비명, 그리고 먼 곳에서 무겁게 들려오는 무적(霧笛)이 있다”고 정성 가득한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작가는 책머리에서 “가만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일이다. 늦깎이로 詩를 만난 일. 詩가 맺어준 사람들을 만난 일. 詩가 곁에 있어서 그들과 함께여서 참 다행이다”라며 “지나온 시간들이 누추해지지 않아서, 태어나고 살아온 내력과도 마침내 화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차분하면서 겸손한 소감을 전했다.

출판기념회는 1월 6일 오후 4시 제주문학의 집 북카페에서 출판사가 마련한다.

도서출판 삶창, 120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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