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48) 빠른 말 성안 가고 있으면 느린 말 고으니머를엔 간다

* 잰 : 빠르다. ‘잰걸음’의 ‘잰’
* 몰 : 말(馬)의 제주방언
* 감시민 : ‘가고 있으면’의 제주방언
* 뜬 : 느린, 굼뜬, 뜨다, (동작이)느리다
* 고으니머를 : 옛 지명, 지금의 제주시 일도 1.2동 일대의 속칭

성안은 성내(城內)인데, 구체적으로 제주목사가 집정하던 관가가 있는 지금의 제주시 관덕정을 중심으로 한 관중을 일컫는다. 동쪽 지역에 사는 사람이 성안에 오려면 고으니머를라는 고갯마루를 넘어야 한다.

말을 탈 경우, 빠르고 늦고의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빠른 말이라 해도 성안에 이를 때쯤이면 느린 말도 성안 가까운 고으니머를에는 닿게 된다는 것이다. 빠르다고 해 봤자 차이는 그리 큰 게 아님을 비유하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시간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나 거기서 거기, 오십 보 백 보다. 

이 속담은 주로 제주시 동쪽 마을 사람들에 의해 입에 오르내렸다.

제주시 서쪽 지역에서는 “잰 몰이 성안 감시민 뜬 몰 도그네 간다” 했다. ‘도그네’란 오늘의 외도로 빠른 말이 성안에 당도할 즈음이면, 느린 말을 탄 사람도 성안 가까운 도그네에 도착하게 된다. 빠르고 늦고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게 그리 현격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므로, 자만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이 속담은 주로 제주시 서부지역 주민들에 입장에서 회자됐다.

“경 잰 체 허지 말라게. 느 몰이 암만 뽈랑 성안에 간댕 허고, 우리 몰이 뜨댕 허여도여도 가차이 있는 고으니머르엔 간다게. 무신 큰일 허쟁 경 와릴 말고. 난 촌촌이 갈거난 경 알라 이?”
(그렇게 잰 체 하자 마라. 네 말이 아무리 빨라서 성안에 간다 해도, 우리 말이 뜨긴 하나 가까이 있는 고으니머를에 간다야. 무슨 큰일 하려고 그렇게 서두를 말이냐. 난 천천히 갈 테니 그렇게 알아라 이?)

이건 경마(競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상의 일, 말 타고 나들이하는 실제적 상황이다. 

예전에야 무슨 자동차가 있었는가. 지금은 길거리가 차로 넘쳐나지만 80년대 중반만 해도 거리가 텅텅 비었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고, 밭과 집 사이를 그나마 있는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오갔다. 그러니까 말을 타고 다니는 경우도 그리 흔한 풍경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말 등에 안장을 얹어야 하고, 격에 걸맞은 복장에 신발도 갖춰야 하니 손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도 섬을 돌거나 몇 마장 밖 먼 곳을 나고 들 때는 말이 최고의 교통수단이었음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런다고 무슨 화급한 일이 아니라면, 설령 말을 탔다 한들 그리 재게 부릴 필요가 무엇이랴. 더욱이 옛날 길은 도로 포장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 아닌가. 바닥이 우둘투둘한데다 자갈이 나뒹구는 험로였을 것인데…. 

말을 무리하게 부릴 것도 아니거니와 말을 탄 사람도 까닥하다 낙상할 우려인들 왜 없을까. 말 타고 바깥출입할 때 속력을 사정에 따라 알맞게 조절하는 것은 현명한 일, 삶의 지혜였다. 

제주인의 그 지혜로움이 함축된 속담이다. 비록 물질적으로 빈궁해서 삶이 힘들고 괴로워도 정신적인 여유만은 잃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빨리 가 봐야 고작 2,30분 앞서고 뒤 서는 것이다. 서두른다고 나아질 것도 없고 한 발짝 먼저 간다고 무엇이 갑자기 좋아질 것도 없는 게 사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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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성산읍 말테우리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과연 제주인들은 물정에 밝았고 사리를 꿰찼다. 앞서가려거든 가거라, 나는 느긋이 가리라 하고 있지 않은가. 참 멋들어지고 의연한 모습이다.

“잰 몰 성안 감시민~”에는 제주인의 인생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척박한 땅에 씨 뿌려 검질매며(밭매며) 땀 흘려 거둬들여야 보릿고개에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는 곤궁을 면치 못했다. 그게 어느 한 해의 풍흉(豊凶)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운명적인 것이었다. 아마 예전에는 평생 그런 고난의 연속이었음을 우리는 익히 안다.

그럼에도 서두르지 않고, 앞뒤를 다투지 않는다. 투덜대거나 구시렁거리지도 않는다. 이게 내게 주어진 팔자거니. 운명이거니 하면서, 그래도 사노라면 이보다는 조금이라도 좋은 날이 있을 거라는 기대만은 한시도 저버리지 않고 살았다. 그게 우리 제주인의 낙천적인 삶의 태도였지 않을까.

토끼와 거북의 경주에서 우의적(寓意的) 표현이 내보이려 한 함의(含意)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늦음의 미학, 삶의 의미를 직설로 풀지 않고 두 동물의 경주에 빗대어 넌지시 비춰 말하고 있는 우화의 주제 말이다.

타고난 속력으로 치면 비교도 안되는 거북이가 토끼를 젖히고 승자가 될 수 있던 그 ‘근기(根氣)’가 끝내 속도를 제압한 것이다. 성실하고 겸손한 자의 시종여일한 노력이 ‘승리’라는 아름다운 가치를 실현한 것이 아닌가. 빠르다는 것, 그것은 결코 강한 것이 아니다. 강하게 보일 뿐이다.

‘재고 뜬 것’, ‘빠르고 느린 것’은 물론 경기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물리적인 것은 사람의 삶을 결코 지배하지 못한다. 성패를 좌우하는 보다 결정적 요인은 성취하려는 욕구, 곧 실천 의지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빨라야 성안, 늦어도 고으니머르, 빨라야 성안, 늦어도 도그네 아닌가. 거기서 거기인 것을.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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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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