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0주년 신년칼럼] 고희범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2017년 지난 한 해는 화려했다. 

1700만 국민이 촛불로 혁명을 이루어냈다. “이것이 나라냐”는 국민의 탄식에 대한 응답으로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려는 민주정부가 탄생했다. 3년 동안 바다에 처박혀있던 세월호가 인양돼 감춰졌던 참사의 진상을 드러냈다. 

켜켜이 쌓인 적폐를 청산하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는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일 년 내내 뉴스 보기가 즐거운 것도 오랜 만의 일이었다.

이제 새해가 밝았다.

국민의 지지함성 속에 적폐 청산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지방선거는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올 것이다. 

특히 4·3은 70주년을 맞는다. 40주년이던 1988년 비로소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각각 처음으로 4·3 관련 공개행사를 열었다. 50주년이 되던 1998년에는 특별법 제정운동이 시작돼 이듬해 12월 국회에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60주년인 2008년에는 제주4·3평화재단이 설립됐으니, 4.3 문제 해결을 위한 도정은 10년 주기로 주요 고비들을 지내온 셈이다. 지난 30년 동안 이런 과정에 미미하게나마 관여하면서 역사 발전의 생생한 모습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감회가 새롭다.

70주년이 되는 새해에는 어떤 이정표를 세울 것인가? 민간 차원에서는 70주년을 준비하는 범국민위원회와 기념사업위원회가 구성돼 10개의 공동과제를 설정해놓고 활동 중이다. 

의미있는 작업들이 이미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4·3특별법 개정안이 발의된 것이다. 개정안에서는 ‘제주4·3사건’의 정의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정리하고, 그동안 유족들의 오랜 숙원이던 피해 배상 등이 포함됐다.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은 대상자들이 일부라도 생존해있는 동안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절박한 문제다. 제주도의회가 4월 3일을 지방공휴일로 지정하는 조례를 제정한 것도 의미가 크다. 4·3 교육을 위해서나, 전 도민적인 추모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해야 할 일도 많다.

4·3기념관에 누워있는 ‘백비’의 침묵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6명이 희생된 이후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불법적인 탄압과 폭력이 끝없이 자행됐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무장봉기가 발발했다. 단정단선 반대 주장도 유독 제주에서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펼쳐졌던 것임을 살펴봐야 한다. 

▲ 4·3기념관에 누워있는 ‘백비’의 침묵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48년 4월12일 한국여론협회가 서울 종로와 충무로를 지나는 시민 126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단 6.6% 만이 자발적으로 선거인 등록을 한 것으로 답했다. 절대 다수가 선거인 등록을 거부했거나 강압에 의해 등록한 것으로 답한 데서도 드러난다. 

일제의 폭압적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다 해방된 땅에서, 해방된 지 2~3년 밖에 안 된 시점에서, 통일된 독립국가 건설을 외친 당시 제주도민들의 뜻이 어떤 것이었는지 헤아려야 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로 무차별 학살당한 것으로만 이해된다면 어쩌면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 그 발발 원인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연구를 통해 4·3은 그에 걸맞은 이름을 찾아야 한다.       

미국의 책임을 밝히는 문제도 가볍지 않다.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의 하나인 4·3이 미군정 시기에 발생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미국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의 책임을 묻는 운동과 함께 관련 자료 발굴과 연구도 이루어져야 한다. 진압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한 근거를 미군 G2보고서 외에 작전·군수보고서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미국은 엄청난 학살 피해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거사 해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차의 하나로 ‘책임자 처벌’ 문제가 남는다. 국가폭력의 책임자들이 모두 사망한 상황에서 법률적인 처벌은 불가능하지만 역사의 심판마저 지나칠 수는 없다. 가혹한 탄압을 명령하면서 서북청년단을 제주에 내려보내 상황을 악화시킨 4·3의 1차적 책임자 이승만을 비롯해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강경진압을 주장해 수많은 양민 학살을 야기한 조병옥, 해안선에서 5km를 벗어난 지역의 통행금지와 이를 위반한 사람은 무조건 총살하도록 하는 포고령을 발표한 초토화작전의 책임자 9연대장 송요찬, 북촌리 사건을 비롯한 집단학살의 직접 책임자인 제2연대장 함병선, 제주도 총무국장 고문치사 등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저지른 서북청년단 제주도위원장 김재능, 마약 중독자로 온갖 잔혹한 짓을 일삼은 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 등 4·3과 관련한 ‘반헌법행위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이와 함께 비이성적인 만행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무고한 도민들의 목숨을 구했거나 제주도민의 진실을 대변한 의인들 또한 발굴·기록되어야 한다.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벌이고 무차별 진압에 반대하다 쫓겨난 9연대장 김익렬,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도민들에 대한 학살명령을 거부했던 성산포 경찰서장 문형순 등을 포함해 묻혀있는 의인들이 대상이다. 제주도 전역에 마을마다 크고 작은 공헌을 했던 의인들이 많이 있다.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절 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4·3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 군사정부로부터 모진 고초를 당한 소설가 현기영, 시 ‘한라산’을 썼다가 옥고를 치른 시인 이산하, <제주민중항쟁>을 펴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른 시인 김명식 등을 포함해 우리가 채 알지 못하고 있는 유명 무명의 인사들을 70주년 추념식에 초청해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위로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제주4·3평화재단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도 필요하다. 5·18재단은 전국의 양심적인 단체의 추천을 받아 이사진을 꾸린다. 5·18민주항쟁의 정신을 전국적 차원에서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적절한 방식으로 보인다. 4·3의 경우 정부가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한 유일한 과거사인 데다 대통령이 공식사과를 함으로써 일각에서는 과거사 해결의 전범처럼 여겨지고 있고 피해 규모나 역사적 위치가 남다른 점 등으로 국내 과거사 해결 사례 가운데 맏형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위상에 걸맞게 사업과 활동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마땅하다.

4·3과 관련한 자료발굴과 연구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다. 연구기관으로는 민간단체인 제주4·3연구소가 유일하다. 지난 1989년 설립된 이래 획기적인 성과를 기록해왔다. 4·3 경험자 수천여명의 증언 채록을 통해 4·3을 드러내 말하도록 한 것은 기록과 공론화의 시작이었다.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져온 학술지 발간, 민간연구단체로서는 보기 드물게 매년 개최해온 국제학술대회, 암매장 유해 발굴 사업 등 독보적인 4.3 연구활동은 물론, 보수우익세력의 4.3 흔들기에 맞서 성명서와 항의문을 발표하고, 4.3특별법 제정 운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연구소는 환경이 열악하다. 젊은 연구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맥을 이어가기도 힘겨운 형편이다. 국립대학교의 역할로서 전남대학교에는 5·18연구소가 설립돼 있는데 제주대학교에는 왜 4·3연구소가 없는 것인가? 70주년을 맞아 되돌아볼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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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희범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이런 크고 작은 주제들에 대한 논의가 70주년을 계기로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70주년인 새해에 뭔가 서둘러 이루려 하기 보다 2018년을 4·3 해결 과제의 실천을 향해 나아가는 시점으로 삼을 수 있다면 이 또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4·3의 정신을 다시금 확인함으로써 4·3의 비극을 딛고 제주가 세계 평화와 인권의 아이콘으로 우뚝 일어서는 새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 고희범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전 제주4·3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추진 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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