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박물관의 특별한 문화 체험(1)] 일제의 아픈 기억, 평화박물관 등

제주도에는 공사립 합쳐서 크고 작은 37개의 박물관이 있다. 아직 박물관으로 등록하지 않은 곳까지 합치면 45곳이나 되는데, 서울시를 제외하곤 광역지자체 면적 대비 박물관 수로는 전국 1위다.

사철 관광지로 박물관 잠재 입장객이 많은 점은 특히 사립박물관에겐 큰 매력이어서 육지에서 제주도로 이전 예정인 박물관들도 있으니 앞으로 제주의 박물관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전문가들은 제주도에 제대로 된 박물관이 현재 몇이나 되냐는 의문도 던지는데, 이것은 관광지라는 지역 특수성을 먼저 고려해야 답이 나올 것이다. 제주의 박물관은 고전적인 뜻의 박물관이 아닌 곳이 많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 박물관을 순회하는 것은 우리에겐 아직 낮선 문화다. 그러나 이국적인 풍광과 함께 하는 제주의 박물관 순회는 분명 특별한 추억이 될 것이고, 여러 등급의 박물관을 비교 판단하는 눈을 기르는 귀한 학습 기회도 될 것이다. 인상적인 박물관이 10여 분 거리 내에 거듭 나타나는 제주의 주요 박물관들을 5회에 걸쳐 돌아본다.

눈에 보이는 족족 19금(禁) '건강과 성교육박물관'

 
▲ '여자 화장실 훔쳐보기'의 체험(?). 작은 구멍에 눈을 대고 버튼을 누르면 소변 보는 여자 화면이 정면으로 보인다.
ⓒ 곽교신
성교육박물관은 요즘 한창 매스컴을 탄다. 프리섹스가 말로는 친하지만 아직 행동으로는 내놓고 친하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이보다 좋은 대중적 관심거리도 드물 것이다.

이 박물관에서 눈을 끄는 전시물들은 사진으로 실을 수가 없다. 성기가 노출되고 행위가 노골적이니 그러하다. 관람 중에 끊어지는가 하면 다시 들리는 여자의 신음소리는 공연히 아랫도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어쨌건 들어가기 머쓱한 성인용품 판매점에나 있을 진품명품(?)들을 보고 듣고 만져보니 일단은 신난다.

그러나 신혼여행이나 되면 모를까 가족여행이라면 아이들은 어찌해야 할지. "엄마 아빠 공부 좀 하고 올테니 차에서 기다려라" 해야 하나. 아니면 "이젠 우리 사회도 왜곡된 성지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라는 김완대 관장의 말을 덥썩 믿고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며 데리고 들어가야 하나. 그러나 어차피 미성년자 입장 불가.

'성박물관'을 연다고 하자 동네의 반발이 심해 단어를 더 붙여 '건강과 성교육박물관'이라 지었다는데, '건강'만 붙이면 박물관도 웰빙이 되나? 하긴 야한 자료들이 넘치는 인터넷에 비하면 이 박물관 콘텐츠는 웰빙이라고 우겨도 되겠다.

젊은 관람객층은 "콘텐츠(자극 강도)가 약하다"는 말을 하고 나간다는데, 이 말은 성교육박물관의 목적이 자극인지 교육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중요한 화두가 아닌가 한다. 아쉬운대로 '문화로서의 성'을 다룬 것이라 해두면 좋을까.

관람 문의 064)792-5700. 입장료 9000원. 연중 무휴.

제주도를 소리의 섬으로 '소리섬박물관'

 
▲ 5만여 개의 조개껍질을 2층 천정에서 1층 바닥까지 늘어뜨렸다. 조개가 부딪는 소리를 들으려고 만들었단다.
ⓒ 곽교신
이 박물관은 입구부터 '아, 이걸 어디서 봤더라'를 생각하게 한다. 강릉의 '참소리박물관'을 다녀온 관람객은 바로 짐작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강릉 출신의 황영준 대표가 고향에서 본 '참소리박물관'을 모델로 제주에 내려와 개관한 곳. 그러나 모든 전시물이 참소리박물관 복사판은 아니다.

"소리에 관한 모든 것을 듣고 즐기고 배우는 박물관을 지향한다"는 황 대표의 말인데, 직접 만지고 조작하며 소리를 들을 것이 많아 어린이들은 좋아 할 듯.

디스플레이에 돈을 아끼지 않은 흔적은 보이나 개관을 위해 단기간에 유물을 사모았기에 오랫동안 유물을 모아온 '컬렉터 특유의 정열'은 안 느껴진다.

거의 모든 사립박물관의 운영이 막막한 마당에 박물관도 이익을 낼 수 있는 분야 같아서 시작했다는 황 대표는 '관장'이라는 직함도 쓰지 않는다. 기업 개념으로 시작한 박물관에 우리 사회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결과가 주목되는 곳이다.

관람 문의 064)739-7782. 입장료 6000원. 연중 무휴.

보고 난 후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 평화박물관

 
▲ 제주도민의 일본군 진지용 땅굴 파기 강제노역 마네킹. 평화박물관 관내에 있는 이 땅굴은 이영근 관장의 부친을 비롯한 동네 사람이 곡괭이 한 자루씩 들고 현무암층을 파들어간 곳이다. 확인된 길이가 전장 2km.
ⓒ 곽교신
 
"왜 이런 박물관을 국가가 맡아 운영하지 않고 개인이 하고 있느냐?"

북군 한경면에 위치한 평화박물관을 보고 나면 대부분 이 질문을 많이 한다는 이영근 관장의 말이다. 내국인은 그렇다치고 비교적 많이 오는 일본인 관람객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는 어디로 숨고 싶은 심정이라고.

그는 박물관 근처가 고향이다. 점점 훼손되는 일제 만행의 현장을 보존하고, 국력을 키워 더는 우리 역사에 그런 불행을 만들지 말자는 뜻으로 10여 년간 자료를 모으고 땅을 사들인 끝에 평화박물관이라 이름 지어 2004년 2월에 개관했다.

트럭 운전부터 시작해 관광버스 사업으로 번 약 15억을 이 박물관에 모두 털어 넣었다. 그러고도 20억의 빚을 짊어진 상태다. 그는 야간에 골프장 셔틀버스를 몰아 생기는 부수입까지 박물관 운영에 보탠다.

 
▲ 7월 5일 방문해 땅굴 작업에 쓰던 발동기를 유심히 살펴보는 가미키 사토루(神木悟)씨. 일제 관동군 소속으로 한경면 조수리 굽은오름에서 땅굴 작업을 담당했었다는 그도 81세의 노인이 되었다. 좌로 부터 일본인 통역, 이영근 관장, 제주대 김동전 교수, 앞쪽이 가미키씨.
ⓒ 평화박물관
 
이 관장은 일제강점기 때 그의 부친을 비롯한 동네 어른들이 땅굴 파기 노역에 강제로 징용되던 기억을 생생히 증언한다. 그가 일대를 사들여 관람객에게 공개 중인 땅굴도 그의 부친이 징용되었던 바로 그 땅굴이다.

이 일대는 제주 오름의 하나인 가마오름 지역으로 일본군은 군사작전상 유리한 지형의 이곳을 지하 주둔시설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땅굴 내에는 작전지휘실, 의무실, 휴게실 등이 골고루 설치되어 그 치밀함에 놀라게 된다. 땅굴의 치밀한 구조는 순전히 제주도민의 희생 결과였다.

한 조가 10일씩 땅굴에 들어가 작업을 하고 나오면 다음 조가 교대로 들어가는 식이었는데, 들어갈 때 있던 사람이 나올 때는 안 보인다던가, 강제 노역 중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한다며 데려간 후 얼굴을 영영 못 보고 하던 일이 부지기수라고.

 
▲ 언어 사기술로 정신대를 모으는 방법을 알리는 회람용 공문인 '통보'. 조선총독부 정보과에서 발행한 것으로, 정신대가 군부 자체 방침이 아닌 일제 행정조직에 의한 조직적 계획적 만행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 일본 국가기록원에도 없는 자료로 일본측의 복사 요청이 있었다고.
ⓒ 곽교신
 

 
▲ '정신대'라는 희대의 미명으로 끌려간 이 땅의 딸들이 모욕을 당한 댓가로 받은 일종의 화폐인 일본군 군표. 왼쪽의 정식 통화로 바꿔준다던 것도 거짓이었다. 이 전시물을 보는 피해 할머님들은 울음을 참지 못 하신다고...
ⓒ 곽교신
 

평화박물관의 전시는 디스플레이라 할 것도 없는 열악한 진열장 수준. 그러나 그 감동은 수십 억의 돈을 들인 국내 어떤 박물관보다도 진하다. 감동을 넘어 분노로 다가온다. 이 박물관을 개인에게 맡겨두고 있는 이 나라에 대해 화가 난다. 평화박물관을 보고 난 마음이 전혀 평화스럽지 않다.

이영근 관장은 평화박물관을 국가 또는 지자체에 기증할 의사를 갖고 있다고 했다. 어떤 시각으로 봐도 이것은 국가가 할 일이지 개인의 일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지만 공립화를 위해 접촉해보니 관(官)의 입장은 '시간이 지나면 처음과는 다르더라'라는 것이라는 말에 또 화가 난다.

일제는 제주 가마오름 근처 한경면 주민에게 땅굴 파기로 만행을 저질렀고, 우리 사회는 이영근 관장에게 역사 현장을 사비를 털어 지키도록 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7월 5일 평화박물관을 방문한 관동군 출신 '가미키 사토루'씨가 "왜 이 박물관을 한국 정부가 관리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는 말은 민족 자존심을 긁는 것 같아 차라리 반발심이라도 생겼다.

그러나 "왜 일개 버스기사한테 이 중요한 역사 유물, 유적을 맡겨두어야 하느냐"는 이영근 관장의 말에는 취재 임무도 잊은 채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이 나라에 정녕 지성은 있는가. 역사학은 있는가.

관람 문의 064)772-2500. 입장료 5000원. 연중 무휴.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의 기사제휴 협약에 의해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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