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아름다운 것만 예술이 아니다. 우울하고 처절한 서글픔은 깊은 성찰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재일제주인 故 송영옥 화백의 상당수 작품에는 짙은 어두움이 느껴진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평생을 방황하듯 살아온 경계인의 색이 묻어났기 때문일까. 송영옥 탄생 100주년인 올해, 그의 고향인 제주에선 자이니치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그의 분노·절규를 기억하기 위해 제주도립미술관에서 2월 25일까지 그의 특별전을 마련했다. 버거운 역사의 무게를 온 몸으로 견뎌온 송영옥의 일생과 예술세계. 누구보다 거기에 천착해온 김복기 경기대 교수(아트인컬쳐 대표)를 통해 지난 100년간의 송영옥을 만나보자. <제주의소리>는 송 화백을 조명한 김복기 교수의 글을 두 번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설 특집-디아스포라, 재일제주인 故 송영옥] (上) 한국 근현대사 온전히 품은 예술가

1. 디아스포라의 유산

송영옥(宋英玉, 1917-1999)은 ‘자이니치(在日)’_1)다. 화가 송영옥의 생애와 예술은 이 자이니치라는 키워드를 빼놓고는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바로 송영옥의 정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이니치는 한국 디아스포라(diaspora)의 유산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일본, 소련, 중국으로의 디아스포라는 다른 지역에 비해 지극히 타의적 강제적 성격이 강하다. 해방 이전,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는 열강들의 패권 각축장이었으며,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 민족은 수난의 역사를 걸어야했다. 특히 재일한국인 사회는 지배와 식민의 관계에서 출발했을 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는 남북 이데올로기 대립의 축소판 혹은 대리전이라 할 수 있는 민단과 조총련의 ‘제2의 분단’이 존속해 왔다. 여기에서 조총련 계열에서 활동했던 많은 작가들이 민족미술사의 조명에서 오랫동안 누락되었다._2)

198160_228368_1534.jpg
▲ 송영옥 화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송영옥도 오랜 세월 남한과 단절되었던 화가이다. 나는 1989년 5월 컬렉터 하정웅(현재 하정웅미술관 명예관장)의 일본 자택에서 송영옥 작품을 처음으로 실견(實見)하고, 그 강렬한 표현성에 강한 인상을 받은 바 있다. 이후 나는 1990년 4월 도쿄에서 송영옥 취재를 단행했고,_3) 이름 석 자 정도만 전해지던 송영옥의 존재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했던 것이다._4) 하정웅 컬렉션이 없었더라면, 송영옥의 존재는 일본미술사는 물론이고 한국미술사에서도 영영 사라졌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하정웅은 1993년과 1999년 재일한국인 중심의 미술작품 672점을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했는데, 그중에 송영옥의 작품 47점이 포함되어 있다. 자이니치의 귀국!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화가 송영옥은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 4월 13일, 고혈압에 의한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하정웅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와의 첫 대면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다시 송영옥의 생애와 예술의 길에 성큼 다가선다. 그 여정은 일제와 남북분단이라는 현대사의 파란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다. 그 가열한 체험과 처절한 생애를 거울로 비춰놓은 자화상이라 해도 좋다. 한마디로 송영옥의 ‘자전(自傳)의 그림’이다. 

2. 제주에서 오사카로, 떠돌이 70년

1917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송영옥이 일본 땅을 밟은 것은 1929년 소학교 4학년 때다.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자 일생의 운명을 좌우했던 이 시간을 송영옥은 뒷날 이렇게 회고했다. 

“11세의 내가 3년 연상의 형과, 제주에서 배를 타고 아버지와 맏형이 사는 오사카(大阪)의 츠루바시(鶴橋) 주소를 들고, ‘키미가요마루(君が代丸)’_5)라 부르는 배를 탔다. 1주일간의 항해를 거쳐 오사카 항에 도착한 것은 3월 5일, 아직 쌀쌀한 날이었다. 어느 한 사람 마중 나와준 사람도 없이, 맏형 댁까지 찾아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1년간은 무아무중(無我無中)으로 동네 공장_6)에서 일하고, 다음해 봄 야학교 5학년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공장과 학교에 다니는 일은 12세의 내가 견디기에는 큰일이어서, 밤마다 이부자리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_7)

설상가상, 오사카에서 측량기사로 일했던 부친의 실직으로 기나긴 가난의 생활이 시작된다. 송영옥은 야간중학 2학년을 중퇴하고 그림을 지망했지만,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20세가 되어서야 오사카의 나카노시마(中之島)양화연구소_8)에 들어가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쌓았다. 송영옥은 꿈이 그리던 정식 미술학교에 진학한다. 그는 1941년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의 조선인 재학생으로는 김윤민(金潤玟, 1919-1999), 윤재우(尹在玗, 1917-2005), 임채완(林采完, 뒤에 임호(林湖)로 개명, 1918-1974), 백영수(白榮洙, 1922-), 김광남(金光男) 등이 있었다. 선배로는 6.25 때 북으로 간 전통화가 청계 정종여(靑谿 鄭鍾汝)_9)가 있었고, 후배로는 제주 출신의 변시지(邊時志, 1926-2013), 양인옥(梁寅玉, 1926-1999), 김광수가 다녔다._10) 유학생들의 고향은 제주도와 영남, 호남 지역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미술학교 재학시절에 송영옥은 오사카시전에 입선하는가 하면, 이후에는 시장상, 가작상을 수상하는 탄탄한 역량을 보이기도 했다. 이 무렵 그의 작품은 우리가 흔히 보았던 재현적 사실주의 유형의 평범한 인물화였다. 위대한 화가로의 꿈에 부풀어 있던 행복한(?) 시절의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시대는 점점 암흑으로 빠져들었다. 송영옥은 군수공장에 강제 동원되었으며, 그림이니 하는 문제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여러 명의 청년 미술학도들은 전장(戰場)의 이슬로 사라졌다._11) 

해방을 맞은 송영옥은 그 이듬해에 귀국 길에 올랐으나, 엄청난 양의 짐 꾸러미 때문에 승선 위반으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듬해에도 그는 똑같은 좌절을 겪는다. 그 사이에 한반도는 6.25전쟁의 전화(戰火)에 싸이고 말았고, 동족상잔은 또 다시 귀국 길을 가로막았다.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 송영옥은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칸사이(關西)종합전, 일본앙데팡당전, 요미우리(讀賣)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

송영옥이 두 개의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이력은 그의 예술을 조명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일본앙데팡당전은 전전의 아카데미즘과 기성 미술단체의 부활에 대항하여 1946년에 결성된 일본미술회가 1947년부터 열기 시작한 전시였다. 이 전시는 1950년대에 리얼리즘 계열 작가들의 주요한 작품 발표장이었다. 여기에 조양규, 송영옥, 김창덕, 백령, 표세종, 이철주, 허훈, 오일 등 재일화가들도 다수가 참가했다. 또한 1949년부터 완전히 같은 이름의 또 다른 일본앙데팡당전이 요미우리신문사 주최로 시작되었다. 이 전시를 ‘요미우리앙데팡당전’이라 불렀다. 요미우리앙데팡당전 역시 리얼리즘 계열의 색채를 농후하게 띠었다._12) 

송영옥은 이 시기에 고향 제주에서의 유년기 추억을 회상하면서 섬, 바닷가의 삶을 형상화한 작품을 그려내고 있다. <어부>, <망(網)> 등의 작품이 그것이다. 오사카 시절 송영옥의 작품은 매우 거칠고 둔탁한 느낌을 준다. 어둡고 칙칙한 색감에다 어딘가 마무리가 덜 된 듯한, 표현주의적 경향의 그림이었다. 꽃 그림이나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여인 좌상 등 유미주의적 경향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작품이었다. 형식적으로는 1930년대 멕시코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1930년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미술운동 등과 예술적 유전인자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겠다. 

어사, Couple Fishing, 1958,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jpg
▲ 송영옥의 작품 <어사>(Couple Fishing), 1958,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여자마술사, Female Magician, 1960,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jpg
▲ 송영옥의 작품 <여자마술사>(Female Magician), 1960,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폐선, A Scrapped Ship, 1961,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jpg
▲ 송영옥의 작품 <폐선>(A Scrapped Ship), 1961,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3. ‘제2의 분단’ 속에 살면서 

송영옥의 작품이 양식적 틀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은 1957년 오사카에서 도쿄로 삶의 무대를 옮기면서부터이다. 이 시기부터 그는 구상적 형식을 견지하면서도 형태를 일그러뜨리고 변형시키는 작품으로 변모하게 된다. 또한 이 무렵 그는 이미 조총련계 사람이었다. 남과 북은 더욱 냉전 이데올로기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다시는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상황에 빠진다. 소수자(minority)로서의 설움은 더해갔다. 

“한일 국교수교 이후 국적을 따로 신고해야 할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필요성이나 당위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대다수 재일교포들은 일제 때부터 가지고 있던 ‘조선’이라는 국적을 그대로 둔 거지요. 오히려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막연히 조선을 원했어요. 저도 그랬고. 바로 그 때문에 친남한 단체인 민단에서 빠져버린 겁니다. 조총련에서 활동 한번 하지 않은 사람이 졸지에 빨갱이가 돼버린 겁니다.”_13)

그리고 송영옥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후배화가 조양규(曺良奎, 1928-?)_14)의 월북행을 체험하면서 북송선의 허구를 체득하게 된다. 조양규는 맨홀, 창고 등을 소재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소외를 표현주의 형상으로 드러냈다. 그는 강인한 질감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을 파고드는 작품을 자유미술전, 일본앙데팡당전에 출품해, 당시 일본화단에서 각광을 받았다. 특히 미술평론가 하리우 이치로(針生一郞)는 “대상의 무거움과 가벼움, 그 상호관계 속에 떠오르는 공간의 격렬한 긴장과 운동은 일본의 전후 10년간의 미술 속에서 하나의 정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했다._15) 조양규는 1960년 니이가타항에서 북한으로 건너갔지만, 이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물론이고 말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송영옥은 이제 남과 북 어느 곳도 선택할 수 없는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조국과는 오랜 단절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때의 답답한 심경을 절절하게 담은 작품들이 1970년대를 거쳐 군사정권 시기까지를 지배했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갈망하고 애원하고 호소하는 듯한 절규의 몸부림과 목소리를 금세 읽어낼 수 있다. 

작품 <문(門)>에는 어두운 창고 속에 형편없는 몰골의 한 사람이 서서 삐죽이 열린 문틈 사이로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따스한 바깥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 어둠 속에서 문밖 광명의 세상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극한 속의 인간 상황을 그려낸 것이다. 그리고 <이별-귀국선>은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떠났던 조양규와의 이별의 아픔을, 낡아빠진 배와 부서진 사다리를 통해 다시는 탈 수 없는 귀국선과 오버랩시키고 있다. 담벼락을 힘겹게 기어오르는 갈구의 손의 표정을 그린 <작품 67>에서도 귀국에의 열망 혹은 재일교포의 신분상승 욕구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갈림(귀국선), Separation-ship return home, 1969,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jpg
▲ 송영옥의 작품 <갈림(귀국선)>, Separation-ship return home, 1969,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송영옥의 작품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특수한 삶, 말하자면 ‘한국-북한-일본’에서 파생되는 민족, 이데올로기, 삶의 현장 등 세 가지 상황에서의 정신과 생활을 복합적으로 담고 있다. 작품 <삼면경(三面鏡)>이야말로 하나의 인물이 세 가지 거울 속에서 세 가지의 다른 얼굴로 비치는 이른바 ‘다중 언어’, ‘다중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의혹>은 어느 날 큰 딸이 교통사고로 정신병자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가족인 사위는 위자료나 챙기고 자식까지 버리고 도망쳐버린, 자신의 비근한 일상의 체험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 없는 삶이나 처절한 인생 역정을 감옥처럼 보이는 차디찬 독방에서 혼자 고함치는 <절규>도 있다. 그 분노하는 인간상은 마치 성난 야수처럼 온몸으로 요동을 친다.

삼면경, Three Sides Mirror, 1976,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jpg
▲ 송영옥의 작품 <삼면경>(Three Sides Mirror), 1976,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절규, Screaming, 1974,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jpg
▲ 송영옥의 작품 <절규>, Screaming, 1974,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송영옥은 조국 밖에서 남한의 정치정세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1972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수갑을 찬 형상의 <갇힌 사람>, 방독면과 방패에 깔린 처절한 인체를 다루어 광주민주화항쟁의 비극을 고발한 <5.17-`80광주> 등은 민주와 자유에의 준엄한 발언이었다.

송영옥의 작품 중에는 재일교포의 인권 문제를 사회적 발언으로까지 이끌어 올린 작품도 있다. 원폭 피해자 문제를 다룬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작품 <침묵>은 일본국회의사당 건물을 배경으로 이목구비가 흉측하게 일그러진 유령 같은 무서운 몰골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 얼굴은 물론 원폭으로 희생된 얼굴(불상으로 은유했지만)이다. 

그는 말했다. 

“죄진 놈들(그는 항상 일본사람을 이렇게 불렀다)이 오히려 큰소리치고 있으니….” 

그 외에도 히로시마평화기념관 등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에서 그는 아주 직설적으로 원폭 피해에 대한 보상을 촉구하는가 하면, 그 피해자들에게 추도의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17일자 下편 이어집니다> 

5.17-`80광주, 5.17-'80 Gwangju, 1981,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jpg
▲ 송영옥의 작품 <5.17-`80광주>(5.17-'80 Gwangju), 1981,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각주 

1) 자이니치는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북한인)을 지칭하는 일본말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에 살고 있었던 한반도(조선 반도) 출신자들로, 해방 이후에 귀국하지 못한(혹은 않았던) 사람들이다. 자이니치의 국적은 일본의 외국인등록법에 따라 ‘한국’ 또는 ‘조선’으로 표기된다. 패전 직후인 1947년 자이니치에게는 ‘조선’ 국적이 주어졌다. 해방 이전 우리나라의 마지막 국호가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뤄지고, 영주권 자격을 얻고 싶은 사람들은 국적을 ‘한국’으로 선택했지만, 북한을 지지하는 이들이나 조국의 분단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여타 사정으로 그냥 ‘조선’을 유지한 사람도 많았다. 이 재일교포 사회는 친남한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약칭 민단)과 친북한 단체인 재일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로 나뉘어 오랜 세월 격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2) 김복기, 「미술 속의 디아스포라, 어떻게 볼 것인가」, 『아트인컬처』, 2002년 2월호. 

3) 당시 송영옥은 도쿄의 니포리에 살고 있었다. 재일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곳은 도쿄에서도 빈촌에 속하는 허름한 동네였다. 골목길을 한참 들어가서 낡은 건물, 비좁고 컴컴한 나무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방 한 칸이 있다. 넉넉하게 잡아 3-4평의 공간. 여기가 송영옥의 작업실이자 생활공간이다. 방 한가운데 앉아서 작품 제작과 잠자리를 모두 해결하는 공간이다. 엉덩이를 붙이고 차근하게 취재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가난했다.

4) 김복기, 「한 재인교포 화가의 자화상」, 『월간미술』, 1990년 8월호, pp. 47-52.

5) 키미가요마루는 1922년부터 1945년에 걸쳐 제주도와 오사카를 운행했던 일본 여객선이다. 정원은 365명이었지만, 늘 정원의 2배 가까운 승객이 배를 탔다고 한다. 1928년 당시 배 운임은 12엔 50전. 여직공의 월급 2배에 막먹는 고액이었다. 이 여객선은 1945년 미군의 오사카대공습 때 B-29 폭격기에 의해 격침됐다. 제주 말에는 ‘크다’는 것을 ‘키미가요마루 같다’고 표현하는 관습이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6) 송영옥은 생전에 이 공장을 ‘유리공장’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본화가 시부타니 에이지(谷英治)는 송영옥의 <개> 시리즈에 주목해, 동물 속에 나타나 있는 생명감, 유동감의 원천을 송영옥에게 물어본 즉, “옛날에 유리동물을 만든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태연하게 말했다고 한다. (시부타니 에이지, 「송영옥-생명감의 대류(對流)」, 1981. 송영옥 개인전 도록.) 

7) 송영옥, 「55년 만에 조국 땅을 밝고」, 『자유미술』, 1984년 7월호.

8) 나카노시마(中之島)양화연구소는 원래 오사카 출신의 양화가 코이데 나라시게(小出楢重, 1887-1931), 니에다 킨조(國枝金三, 1886-1943), 나베이 카츠유키(鍋井克之), 구로다 주타로(黑田重太郞, 1887-1970) 등 니카카이(二科會) 출신의 젊은 양화가 4명이 중심이 되어, 다이쇼(大正) 13년(1924년)에 개설했던 시나노바시(信農橋)양화연구소의 후신이다. 이론과 실기를 조합시킨 특색있는 교육을 펼쳤던 이 연구소는 많은 생도를 모으고, 칸사이(關西)의 중심적인 양화단체로 발전했다. 1931년 나카노시마로 옮겨, 연구소 이름을 개칭했다. 1945년 전쟁이 격화되어 폐쇄했다. 

9) 조선화가. 공훈예술가(1974). 인민예술가(1982). 경남 거창 출생으로 일본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조선미전에 특선 등 수차례 입상했다. 해방 직후 좌익 조선미술동맹 간부로 활동하다 6.25 때 월북했다. 평양미술대학 교원, 조선화 강좌장(1954~),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 위원장, 중앙위원회 부위원장(1964~)을 역임했다. 1984년 조선미술박물관에서 정관철과 2인전람회(유작전)를 열었다. 대표작으로 〈5월의 농촌〉(1956. 국가미술전람회 1등상),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1958. 국가미술전람회 1등상) 등이 있다. 월북 이후 필자가 처음으로 「북으로 갔던 화가 정종여의 생애와 작품」, 『월간미술』, 1989 1, pp. 76-87을 썼다. 송영옥은 1990년 필자와의 인터뷰 때, 청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청계의 기질과 작품 세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북한에서의 서신 소식 등을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조심스럽게 들려주었다. 그분 운명이 바로 우리나라의 운명이라면서. 

10) 오사카미술학교는 1924년 화가 야노 교손(矢野橋村, 1890-1965)이 설립해 1944년까지 존립했다. 일본화부와 양화부를 두었으며, 학년은 5년제, 본과 3년에 전공과 2년이었다. 이 학교에 대한 연구 논문으로는 김지영, 「해방 전 오사카미술학교의 조선인 유학생들의 실태와 귀국 후 행방에 대하여」, 『한국근현대미술사학31』, 2016. 12, pp. 203-230이 있다. 조선인 유학생들의 입학, 졸업 연도는 앞의 김지영의 논문과 송영옥의 증언이 약간 차이를 보인다. 앞으로 보다 정확한 연구가 요구된다.   

11) 송영옥, 앞의 글.

12) 고성준, 「재인한국인의 미술-일본현대미술사 속에서」, 『아리랑 꽃씨』(컬처북스, 2009), p. 20. 

13) 김복기, 앞의 글.

14) 조양규는 경남 진주 출생으로 해방 직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제주 4.3사건의 좌익연루자로 지목되어 수사망에 오르자 1948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막노동으로 일하면서 미술수업을 시작해 1952년 무사시노미술대학을 중퇴했다. 1960년 북한으로 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에 1년간 유학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후 북한의 미술잡지에 스케치를 남기고 있으나, 본격적인 활동상은 베일에 가려 있다.  

15) 하리우 이치로(針生一郞), 『전후일본미술성쇠사』(東書選書, 1979), pp. 88-89.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