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초의 인문고전 전문도서관인 제주치과의사신협 부설 불기도서관(관장 신용래)이 2018년 새해를 맞아 2월 중순부터 ‘자본주의와 인간’ 특강을 마련했다. 중상주의에서 현대 행동경제학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이 바라본 자본주의 체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방향을 고민해볼 수 있는 자리다. <제주의소리>가 창간 14주년을 맞아 불기도서관과 공동기획으로 <인문강좌 톺아보기> 코너를 마련했다. ‘자본주의와 인간’ 특강을 시작으로 불기도서관이 연중 진행하는 인문고전 강좌를 곱씹어 뜯어보는 ‘다시 읽기’ 시간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말> 


[불기 인문강좌 톺아보기-자본주의와 인간](3) 경제적 인간과 상호적 인간 / 최정규 경북대학교 교수 


게임을 하나 해보려고 한다. 
상대방에게 만원을 주겠다. 상대방은 받은 만원을 당신과 어떻게 나눌 건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가 만원을 모두 갖고 당신에게는 하나도 안 줘도 되고, 당신과 반반을 나눠도 된다. 어쩌면 만원을 당신에게 다 줄 수도 있다. 그의 제안을 당신이 받아들이면 그의 제안대로 만원을 나눠 갖게 될 것인데, 만일 당신이 그의 제안을 거절하면 두 사람은 모두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상대방이 만원 중 2,000원을 당신에게 주고, 자기는 8,000원을 갖겠다고 한다. 받아들이겠는가? 거절하겠는가?

일명 ‘최후통첩게임’이라 불리는 이 게임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경제학 학문분과인 ‘행동경제학’에서 자주 활용되는 게임이다. 앞선 시간에 보았듯, 오늘날 주류 경제학에서는 ‘이기심’과 ‘합리성’을 인간 심성의 기본 전제로 삼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을 시장경제에서의 인간 행위를 설명하는 주요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극히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개인들이라면, 당연히 위의 게임에서 상대방으로부터 단 1원을 받더라도 그것이 이익이 되기에 받으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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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몫이 3천 원대 밑으로 내려가면 대부분 제안을 거절한다고 한다. 자신이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이기적인 제안자에 대해 응징하려는 욕구를 느끼는 것이다. 

또,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당신 앞에 서 있는 누군가가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둘 중 하나를 골라 먹으라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파란 알약을 먹으면 타인의 고통과 행복에 대해 무감각해질 것이고, 빨간 알약을 먹으면 타인의 고통이나 행복에 공감하게 될 것이라고. 

실상 우리에게 유리한 선택은 당연히 파란 알약을 먹는 것이다. 남 걱정하는 게 유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물질적으로도 훨씬 이득이 되고 그래서 생존에도 더 유리해지는 길이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마치 빨간 알약을 먹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타적’이고 ‘상호적’인 성향을 보이며, 이러한 성향은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동기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기도 하고,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자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징계하고 처벌하고자 한다. 즉, 사람들은 나의 이득만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동의 결과 타인의 이득(복지)이 어떻게 변화하는 가에도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상호성·호혜성: 자신에게 이득을 준 상대에게는 호의로, 피해를 준 상대에게는 적의로 대하려는 성향)

 자본주의 시대에, 왜 아직도 이타성이?

이는 앞서 보았던 주류 경제학에서의 이기심, 합리성에 기반을 둔 인간 심성과 대치된다. 첫 강의 때 다룬 바 있는 맨더빌은 <도덕적 덕성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서 도덕이란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당시 상업이 한창 융성하기 시작하고 상업에 기초한 계급이 세력을 획득하면서 기존의 지배층이던 계급 귀족들은 불안감을 느끼고 상업세력을 비도덕적인 자들이라고 몰고 갔는데, 맨더빌은 이를 부정하면서 도덕이란 지배층들이 피지배층들을 구워삶으려는 위선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오늘날 악덕 고용주는 피고용자들에게 이타적인 위선을 논하면서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도덕은 착취의 다른 얼굴에 불과하다고 보던 것이 18세기 초반에 성행하던 답이다. 

한편 두 번째 시간에 다룬 바 있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보수주의자인 하이에크는, 이타주의가 굉장히 낡은 발상이라고 말했다. 서로 간에 안면이 있는 작은 규모의 공동체에서는 서로를 돕고 아끼는 게 잘 사는 길이었을지 모르나, 이미 세상은 너무나 커지고 복잡해졌다. 따라서 이타성은 상업질서, 자본주의 사회라는 ‘확장된 질서’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생각하고 거기에 대응해야 했기에 이타성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생전 모르는 사람과 만나 거래를 튼다. 이제 사람들은 뭔가를 생산할 때 누구누구가 필요할 것 같고 그래서 그의 필요를 충족시켜줘야겠다는 식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뭔가를 생산할 때 뭘 해야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결정을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이기심들이 모여 만들어진 시장경제는 이전보다 훨씬 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고, 또 더욱더 풍요로운 사회가 된다는 것이 주류 경제학자의 생각이었다. 

이들의 말에 근거하면 이제 이타주의는 더 이상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울러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도, 이타주의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의문스러운 일이다. 이기적인 인간이 생존과 이득에 있어 항상 더 유리하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만 살아남아서 번식한다면 결국 사회에는 이기적인 인간만이 남게 될 텐데, 왜 아직도 이타주의가 남아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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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규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 <이타적 인간의 출현>

 이타성이 발휘되는 이유

이에 대한 논의는 1960년대 진화생물학자인 윌리엄 해밀턴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타성을 해명하는 네 가지 주요 가설이 있다. 첫째는 혈연선택가설이다. 유전적인 근친도가 충분히 가까우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상대방을 도움으로써 유전적 관점(번식)에서 더 유리해진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직접상호성 가설은 상대방과 오래도록 거래를 해야 하는 경우, 상대를 계속 봐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향후의 보상을 기대하는 차원에서 이타성이 발휘된다는 가설이다. 혹은 특정 상대방과 직접 거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거래에 있어 평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감안해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간접상호성 가설이 있다. 마지막으로 집단선택가설은, 소속 집단의 평균적인 이익이 소속 개인의 이익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 이렇게 해서 부유해진 집단이 생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들어 이타적 행위를 설명하는 가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가족 및 혈연, 또는 교류가 잦은 상대방이나 집단 내부 구성원에 대한 신뢰나 이타성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우리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고통에 처해 있는 것에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이러한 낯선 사람으로까지의 공감의 확대는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인 것일 수 있다. 롤스 식으로 설명하자면, 저 사람이 저 처지에 있는 것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 정말 우연적인 것일 수 있겠다, 저 사람이 겪는 일은 어쩌면 내가 겪을 수도 있던 처지다, 하고 생각하게 되어서 그를 보면 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식의 일반화된 신뢰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면 다음의 질문이 도출된다. 그래, 이타적인 거, 좋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말인가? 고전파 경제학을 거쳐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사회 곳곳에 스며 있는 지금, 이타성과 시장질서는 서로 합치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좋은 제도? 아니면 좋은 시민?

사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인간 본성이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들이 보기에 이타성을 근거로 사회를 구성했을 때, 이기심을 가진 사람이 조금이라도 끼어 있게 되면 그 체제는 무너지고 만다. 다시 말해 이타성에 기초한 사회적 질서는 견고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사회제도가 견고하려면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라고 가정한 채 일종의 극단 상황을 설정해놓음으로써 거기에서도 잘 굴러가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은 핵심 메커니즘이 ‘시장’이었다. 

근대 이후로 생겨난 ‘소유권’ 개념은 내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때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울타리를 잘 쳐주고 그 울타리 안에서 각 개인이 자기 이익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게 보장하며, 그러한 각각 행위를 경쟁에 기초해 적절하게 조정해주는 시장이 있다면, 더 이상 도덕심이나 좋은 시민은 필요가 없게 된다. 시장은 우리의 감정을 극소화시켜준다. 형제도, 친구도 필요 없이 울타리 안에서 내가 살고 싶은 대로만 하면 그만이다. 제도만으로도 잘 굴러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근대적 사고이다. 근대 경제학에서 좋은 시민 등의 논의가 사라진 이유다. 

그런 생각이 오산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1998년 그니지와 러스티치니라는 두 명의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한 놀이방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제때 데리러 오지 않고 자꾸 늦자 10분 늦을 때마다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그러자 지각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대놓고 더 늦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이는 이타성이 필요 없이 제도만 잘 짜면 된다는 것의 반례가 된다. 벌금이 이들의 도덕심을 대체해버려 오히려 사회가 잘 굴러가지 못하는 것이다. 

대규모 사회에선 이타성이 필요 없다고 하이에크는 말했다. 하이에크의 논리대로라면 근대 자유질서가 잘 갖춰진 사회일수록 이타적인 사람이 적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새뮤엘 보울스 교수의 <도덕 경제>라는 책에서 사례를 하나 가져와보자. 2002년까지 5년 동안 뉴욕시에서 교통법규 위반에 대한 외교관 면책특권 사례를 보면, 이집트(140건), 불가리아(117건), 알바니아(84건), 파키스탄(69건) 등이 월등히 높은 반면, 영국과 스웨덴, 노르웨이, 일본(각 0건), 독일(1건), 한국(0.4건) 등은 그 수가 현저히 적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근대 자유질서가 잘 갖춰진 사회일수록 시민적 덕성은 더 뚜렷하게 발휘된다. 시장 발전에 있어 사회적 신뢰는 오히려 더 중요하게 작용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인간, 그 사이

다른 예를 들어보자. 자본시장에서 가장 독특한 점 하나는 노동시장과 노동계약의 문제다. 노동계약은 자본의 소유자와 노동력의 소유자 간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시장거래인데, 이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시장거래와 달리 돈을 주고 물건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노동력을 발휘하는 동안 노동자는 그 자리에 직접 가 있어야 하는 등 거래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적 거래임에도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의 문제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아울러 계약과정에서 노동시간은 계약할 수 있지만, 주어진 노동시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와 같은 노동 강도는 계약을 할 수가 없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가는 노동자와 고용주 간 관계에 의해서 결정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고용주가 임금은 적게 주면서 기계를 더 빨리 돌리거나 CCTV 등의 모니터링으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짜내는 방법을 쓰면 둘 간의 관계는 적대적이 될 것이며, 그만큼 노동자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일한 만큼의 임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얹어준다면 어떻게 될까? 고용주에 대한 신뢰와 협조적 태도가 발휘되어 노동자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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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규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 <이타적 인간의 출현>, <게임이론과 진화 다이내믹스> 등의 책을 냈다. 이타성과 상호성의 진화를 연구해왔고, 사람들의 행동 동기를 찾아내고 제도의 영향을 살펴보기 위한 행동실험도 진행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을 이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하게 된다고,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 애컬로프는 말했다.

시장이라는 제도가 이타성을 대체하리라고 보았던 주류 경제학자들의 생각은 틀렸다. 제도가 기계처럼 완벽하다면 이타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겠지만, 사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완전하지가 않다. 모든 것을 계약으로서 환원시킬 수가 없으며, 인간 삶의 영역은 시장에 의해 포괄되지 않는 또는 포괄될 수 없는 영역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우리가, 여전히 이타성을 유효하게 입에 올려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 강연=최정규 경북대 교수, 정리=김소영 불기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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