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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민의 4.3시민 아카데미가 31일 첫 강의로 시작했다. ⓒ제주의소리

[김종민의 4.3시민아카데미] (1) 제주4.3의 배경과 전개 과정

제주4.3의 역사를 최고의 전문가로부터 배우는 ‘4.3 시민 아카데미’가 3월 31일 첫 시작을 알렸다.  

‘김종민의 4.3 시민 아카데미’는 <제주의소리>가 4.3 70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자리다. 3월 31일부터 4월 28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4.3의 전 과정과 향후 과제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흔치 않은 4.3 전문 강좌다. 

강사는 제주신문, 제민일보 기자를 거쳐 국무총리 소속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제주4.3평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한 김종민 현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상임대표가 나섰다. 김 대표는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 보고서>와 <제주4.3사건 자료집>, 《4.3을 말한다》 등을 편찬·집필했다. 또 취재 과정에서 7000명에 달하는 4.3 희생자 유족을 만나면서 30년간 4.3 하나만을 파고든 현장·이론을 겸비한 전문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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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민의 4.3시민 아카데미가 31일 첫 강의로 시작했다. ⓒ제주의소리

시민 아카데미는 ▲제주4.3의 배경과 전개 과정(3.31) ▲초토화 작전과 군법회의(4.7) ▲4.3이후 70년-제주4.3진상규명운동사(4.14) ▲제주4.3의 현황과 과제(4.21) ▲현장답사(4.28) 순으로 진행한다.

3월 31일 오전 10시, 주말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강의 장소인 제주벤처마루 10층 세미나실은 수강생으로 가득 찼다. 나이 지긋한 중년 이상의 나이부터 20~30대 청년들까지 다양했다. 첫 강의는 4.3이 벌어지기 까지 국내외·제주 상황을 짚으면서 초토화작전까지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살폈다.

# 해방부터 미소공동위원회까지

김 대표는 4.3의 시작과 끝을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이라고 규정했다.

특징이라면 4.19혁명, 5.16쿠데타, 12.12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처럼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하루 안에 끝나고 길어야 5.18처럼 열흘 이상 넘기지 않지만 4.3은 다르다고 봤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벌어졌기에 어떤 식으로 바라보든 그 역사에 대한 성격 규정이 어렵지 않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피아식별도 명확하다. 그러나 4.3은 장기간에 걸쳐 벌어졌기에 여러 국면이 펼쳐졌다”고 기본 배경을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이 종국으로 치달으면서 일본군은 제주도를 요새화하는데 집착한다. 정방폭포, 송악산, 성산일출봉 등에서 발견되는 동굴이 이를 증명한다. 김 대표는 “일본군은 자신들이 점령하던 필리핀에서까지 패하면서 그 무렵부터 전쟁 패배를 상정하고 작전을 폈다. 작전의 핵심은 ‘일본 본토 공습만은 막자’였다”고 설명한다.

이런 판단 아래 제주도, 오키나와 등은 본토 방어의 전진기지가 된다. 제주는 ‘결7호’ 작전지로 불린다. 다른 작전지였던 오키나와는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서 현지 주민 2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래서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 맨(Fat man)’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져 항복하지 않았다면, 제주도 역시 오키나와처럼 불바다가 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제주에게 해방이 단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것 이상인 이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반도는 북으로는 소련, 남으로는 미국에 의해 분할 점령당한다. 전범국가 독일처럼 일본이 분할돼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불똥이 엄한 곳으로 튄 셈이다. 그 이유에 대해 김 대표는 “전적으로 한반도가 차지하는 지정학적·전략적·군사적 중요성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외무부장관이 모이는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린다. 3상회의 결론은 네 가지로 ▲한반도에 독립 국가를 재건설하기 위해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그 과정으로 미소(미국·소련)공동위원회를 연다 ▲최고 5년 기한으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되, 그 방안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다 ▲남북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2주 내로 미소 양군 회의를 연다고 정했다.

김 대표는 “이후 미소공동위원회까지 개최되는 소식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건 1945년 12월 말이다. 동시에 남한 일대에는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가 생긴다”며 “특히 신탁통치는 조선인들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일제 35년 지배에서 다시 5년 받는 건 반발을 불러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의 언론사 최대의 오보를 소개했다. 당시 미국은 20년 정도 한반도를 신탁해야 한다는 강도 높은 입장이었고, 소련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반대로 ‘미국은 한반도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을 강조하는 바람에 신탁이 불가피 하다’는 식으로 보도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가짜뉴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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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민의 4.3시민 아카데미가 31일 첫 강의로 시작했다. ⓒ제주의소리

이해할 수 없는 오보에 대해 김 대표는 친일파 세력의 의도가 섞여있다고 봤다.

그는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친일파 세력들은 신탁통치 반대(반탁) 운동을 주도했다. 소련의 영향을 받은 남한 내 좌파 세력은 비록 신탁통치로 5년간 독립이 늦춰져도 결국 분단을 막는 방법이라는 판단에 신탁통치 찬성 운동에 나선다. 그에 반해 친일파들은 반탁 운동을 하면서 마치 애국자로 변신하는 모양새였다. 동아일보사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 집안은 대표적인 친일파”라며 “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들에 대해 친일파 반공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친일파 반공주의자는 이때를 계기로 자신의 친일행적을 지워버린다”고 강조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예상대로 제대로 된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에 우호적인 정부를 한반도에 세우기 위해 각종 급조 단체를 만들어 여론전에 나섰다. 

# 인민위원회와 3.1 발포사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9월 8일 미군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남한은 미군정 지배 체제로 들어선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은 포고령 1~3호를 발표하는데, 1호의 핵심은 ‘북위 38선 이하는 미군이 점령(occupy)한다’, 2호는 ‘미군에 저항하면 사형 혹은 그 밖의 형벌을 처벌한다’이다. 포고령 2호는 미군정이 해방 직후 각종 시위를 처벌하는데 기준이 된다.

일제는 전쟁이 끝나면서 두 손을 놓고, 그 역할을 대신할 미군 ‘59군정중대’는 11월 9일에야 들어온다. 해방 후 86일이 지나서야 미군정의 본격적인 통치가 시작된 셈이다. 결국 지배세력이 없는 일종의 공백기가 발생하는데,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는 이런 이유에서 탄생했다.

김 대표는 “조선총독부는 일본왕의 항복 소식을 미리 접하고, 한반도 내 일본인들이 어떻게 하면 피해를 입지 않을지 고심했다. 그래서 중재해줄 인물을 물색했는데, 김구 같은 독립운동을 제대로 했던 인물은 대다수 중국에 있었다. 남한의 유력자 중에서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를 저지른 인물을 제외하면 그나마 유일한 사람이 여운형 선생 정도였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향후 인민위원회로 이름을 고치고 제주를 포함해 전국에 생겨났다.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 김 대표는 “역사를 바라볼 때 결과론으로 판단하기 쉽다. 해방 후 86일 간의 공백기가 있어도 미군정이 실세였기에 조선인들끼리 모인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는 의미 없다는 시각도 있다”며 “그렇다면 해방이 됐는데 우리 스스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시도조차 없었다는 비루한 역사가 될 것이냐. 건국준비위원회는 당연한 움직임이었다”고 분석했다.

전국 방방곳곳 인민위원회는 주로 교육이나 기본적인 치안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행정을 접수하고 적극적인 치안까지 시도하려다 일본군에게 숨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1946년 초가 되면 인민위원회, 특히 중앙조직은 미군의 탄압으로 사실상 와해가 된다. 하지만 제주도는 아주 오랫동안 인민위원회가 지속됐다. 

김 대표는 1947년 3월 ‘한림면 인민위원회’가 신문에 냈던 광고를 예로 들었다. 중앙 조직과 달리, 제주에서는 공개 광고까지 낼 수 있을 만큼 조직이 운영됐다는 의미다.

특히 1947년 1월 1일 제주신보에 나온 기사를 보면 제주 사정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제주도 미군정청 공보관 케리 대위의 신년사 기사인데 도민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내용이다.

‘육지에서는 여러분 가운데 있는 선동자에 의하여 각 지방에 소요사건이 발발해서 여러분의 동포 가운데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내에 한하여서는 여러분이 시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함으로써 여사(如斯)한 불행한 소요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힌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제주신보> 1947. 1. 1.
육지 소요사태는 대표적으로 1946년 10월 벌어진 대구항쟁 사건을 의미한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때와 동일한 공출제를 실시하면서 농민들의 큰 불만을 샀다. 시민과 군정의 충돌은 대구, 경남, 경북, 전라까지 퍼지면서 1946년 한 해를 휩쓴다. 그런데 제주도는 그런 충돌이 없었다는 게 신년사를 통해 증명된다. 

미군정의 견제로 와해 위기에 처한 중앙 인민위원회는 합법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조직으로 탈바꿈했는데 그것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이다. 김 대표는 당시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내세운 ‘건국 5칙’을 소개했다. 

▲기업가와 노동자가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는 세우자!
▲지주와 농민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여자의 권리가 남자와 같이 되는 나라를 세우자!
▲청년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를 세우자!
▲학생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김 대표는 “나라를 세우는 다섯 가지 원칙인 셈인데, 당시 민중들이 어떤 사회를 지향했는지 엿볼 수 있다. 볼 때 마다 명문이라고 느낀다. 기업가와 지주를 때려잡는 극좌파도 아니었다. 지금으로 보면 사회복지가 잘 돼 있는 북유럽 같은 복지국가를 떠올리게 한다”며 “해방된 나라에서 민중들의 가장 큰 불만은 바로 친일파 관리, 군인, 경찰이 그대로 다시 기용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스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치 독일에 부역했던 ‘비시 괴뢰정부’ 인사와 나치에 협력한 많은 사람들을 과감하게 죽이거나 강력히 처벌했다. 특히 지식인들은 더욱 엄격하게 처벌했다.

미국 통계 자료에 따르면 해방 이후 남한 경찰조직에서 경위 이상 간부 82%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군대 장교 임관자 110명 가운데 일본군 87명, 만주군 21명에 광복군 출신은 2명뿐이었다. 만주국은 일제가 세운 괴뢰국가였고, 만주군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를 척살하는 역할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 만주군 출신 인사다.

친일파의 재기용은 미군정의 판단이었다. 김 대표는 “예를 들어 전문기술직에 한해 극히 제한적으로 친일 인물을 기용했다면 이해가 됐을지도 모른다. 인력이 빠진 공장에 독립운동가 출신이 갔다고 해서 가동되진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관리, 경찰, 군대 인력은 단순히 일을 원활히 하기위한 수준이 아니”라며 “미군은 독립운동가 출신이 불편했던 거다. 자기 목소리를 주체적으로 낼 수 있는 사람은 관리하기 불편하니, 일제에 아부해서 입신양명했던 이들은 자신들(미군정)의 말을 잘 들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6년 전국이 극심한 혼란을 겪었지만 제주는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때문에 제주 경찰을 많이 뽑을 필요도 없고, 오히려 일부 병력을 육지로 보내는 게 상식적인 판단이다. 그런데 당시 미군정은 오히려 육지 응원경찰을 뽑아서 제주로 보낸다. 그리고 1947년 3.1발포사건에서 충청남도에서 온 경찰의 총에 도민 6명을 숨진다.

당시에는 3.1운동 28주년 기념대회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려 관덕정 앞까지 이어졌다. 현장에 있던 기마경찰이 실수로 어린 아이를 발굽으로 쳤고, 아이는 도랑에 처박힌다. 그런데 기마경찰은 아무런 조치 없이 가버리면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항의했고 급기야 돌맹이까지 던졌다. 그러자 경찰 병력은 군중을 향해 발포한다.

김 대표는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인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3.1발포사건 사망자에 대해 ‘경찰서를 습격해오는 사람을 향해 불가피하게 정당방위 수준에서 발포했다’는 취지로 설명한다”며 “그러나 사망자 신원을 보면 젖먹이를 안고 있던 21살 여성, 국민학교 5학년, 40대 농부 등이었다. 어떻게 국민학교 5학년이 습격을 할 수 있나. 더욱이 총격을 등에 맞았다. 이건 놀라서 도망가는 사람들을 조준 사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35년 동안에도 제주에서는 경찰이 도민을 총으로 쏴서 죽인 일이 단 한 건도 없었다. 1932년 해녀항쟁 당시 징역 7년이 최고형이었다”며 “3.1발포사건은 도민들을 엄청나게 분노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런데 신년사를 통해 제주도민에게 고맙다던 미군정이 왜 두 달 만에 경찰을 파견하고 발포까지 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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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민의 4.3시민 아카데미가 31일 첫 강의로 시작했다. ⓒ제주의소리

그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추측했는데 ▲복시환 사건에 따른 제주경찰감찰청장 해임 ▲미군정의 계획이다.

제주도는 1946년 8월 도(province)로 승격됐다. 치안을 책임지는 제주경찰서 역시 경찰청으로 승격됐는데, 인구가 부족하다보니 제주경찰감찰청으로 그쳤다. 복시환 사건은 1947년 1월 11일 서귀포 법환리 출신 재일 동포들이 고향 마을에 전기를 가설하기 위해 복시환이라는 선박에 기증한 자재를 싣고 오던 중 경찰 당국에 의해 밀수선으로 적발된 사건이다.

선박 자재를 착복하는 과정에서 경찰, 미군까지 개입돼 다른 지역까지 알려졌다. 타 지역 신문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제주도는 모리배 천하세상’이라고 보도했다.

김 대표는 “당시 제주경찰감찰청장은 복시환 사건으로 파면됐는데, 청장은 조사 과정에서 ‘제주도는 좌파, 빨갱이가 많은데 내가 그들을 제대로 단속했더니 모함했다’고 주장해 육지 경찰이 증원됐다는 설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제주 인민위원회는 점점 지역에서 위상이 커져갔는데 미군정도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제대로 통치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시 경찰이 근무지를 옮기면 해당 지역 인민위원장에게 잘 보여야 했다는 증언도 있다. 영향력이 있었기에 그만큼 성향은 온건했다”며 “그런데 이런 모양새는 미군정의 계획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이미 중앙에서 그러했듯) 인민위원회와 공존하지 않으려 했다. 언젠가는 탄압하는 시점이 있을텐데, 그에 맞춰 평온한 시점에 육지 경찰을 파견했고 사망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결국 3.1 발포사건은 우발적이면서도 조장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고 피력했다.

# 총파업과 무자비한 탄압

일제 지배에서도 없던 경찰에 의한 민간인 사망은 도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공무원, 교사, 일부 경찰(66명)까지 참여하는 세계적으로 드문 민관 총파업이 1947년 3월 10일 제주에서 벌어진 건 당연하게 보인다.

총파업 당시 요구 사항은 간단하다. 발포책임자 처벌, 피해자 보상, 재발방지 대책이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과 지도층은 도민 여론을 왜곡해서 받아들였다.

김 대표는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를 ‘붉은 섬’, ‘빨갱이 섬’으로 부르면서 응원경찰을 엄청나게 파견했다. 더욱이 제주도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서북청년회’도 함께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서북청년회에 대해 김 대표는 “북한이 싫어서 월남한 사람들로 무지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대표적으로 당시 서울 영등포 일대에 있던 공단에서 파업 노동자들을 때려잡아 먹고 살았다”며 “이승만을 비롯한 지배 세력은 ‘제주 출신은 경찰도 못 믿는다. 사상이 건전한 여러분(서북청년회)이 제주를 진압해야 한다’고 사주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제주에 온 서북청년회의 활동은 무자비했다. 1947년 6월 3일자 미군보고서는 서북청년회가 제주도민을 탄압하는 것에 대해 ‘Red Hunt’라고 표현했다. 즉 ‘빨갱이 사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북청년회의 행태가 얼마나 가혹했으면 사람에 대해 ‘사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겠는가. 다른 미군보고서에는 3.3평(10.9m²)에 35명이 수감됐다는 기록도 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으로 6명이 숨지고, 이에 대해 도민들이 항의한 3.10총파업 이후부터 미군정 경찰은 1년 동안 무려 2500명에 이르는 도민을 마구잡이로 붙잡아 구금·구타·고문했다. 결국에 1948년 3월 고문치사로 3명이 숨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바로 4.3 무장봉기가 벌어지기 한 달 전 상황이다.

김 대표는 “1987년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한 6월 항쟁도 그해 1월 발생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경찰 발포에 항의하며 총파업을 하니 응원경찰이 오고, 서북청년회까지 들어와 무자비하게 잡아들이며 고문한 끝에 3명이 숨지니 목소리에 힘이 실릴 수 밖에 없다”며 “인민위원회 역시 마찬가지다. 온건파는 무리하게 무장봉기하면 당한다고 이야기했을 테지만, 강경파는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순 없다. 봉기로 싸워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4월 3일 새벽 2시 경찰지서,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를 습격했다”고 설명했다.

제주에 주둔해 있던 김익렬 9연대장은 무장봉기 세력에 대한 진압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김 연대장은 무장봉기 원인이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과도한 탄압이라고 판단했기에, 경찰을 제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1948년 4월 28일 군과 무장 세력 간 평화협상이 체결된다. 72시간 동안 전투행위를 멈추고 서로 무장 해제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5월 1일 오라리 연미마을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협상을 결렬된다. 당시 사고는 경찰의 사주를 받은 우익 청년단원이 저질렀다. 경찰 측은 방화를 무장대가 저질렀다고 허위 발표했다. 김 연대장은 방화 사건에 분개했지만, 진상 조사 결과 사실을 확인하고 불 지른 단원까지 붙잡아 감금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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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민의 4.3시민 아카데미가 31일 첫 강의로 시작했다. ⓒ제주의소리

5월 5일, 미군정 수뇌부는 제주에서 비밀회의를 연다. 당시 치안·국방 책임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참석자는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맨스필드 군정중대장, 유해진 제주도지사, 김익렬 연대장, 최천 경찰감찰청장, 통역관이다. 

조병옥은 ‘공산폭동을 강경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김익렬 연대장은 ‘사건은 경찰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니 강경진압이 아니라 선무공작이 우선’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미군정은 회의 다음 날인 6일 김 연대장을 해임시키고 박진경 연대장을 임명한다. 오라리 방화 사건의 우익단원은 곧 풀려나 나중에 경찰로도 채용된다.

김 대표는 “김 연대장은 회고록에서 ‘미 24군단 정보요원들이 내게 와서 제주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지시했지만 거부했다. 그들은 동족 살해 때문에 이 나라에서 살기 어렵다면 미국 이민을 시켜주고 수만 달러까지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했고 결국 해임 당했다’고 남긴다”며 “생전 김 연대장은 당시 미군정·경찰의 자료를 왜곡하고 경찰·서북청년회의 참상을 은폐하는걸 참을 수 없어 책을 썼다고 말했다. 보통 회고록은 자신에게 유리한 이야기로 쓰기 마련인데, 나중에 4.3에 대한 미국 자료를 보면 볼수록 김 연대장의 회고록이 얼마나 정확하게 썼는지 입증된다”고 전했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김구 선생 등 많은 지도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돼 제헌의회가 구성됐다. 그리고 국회의원만의 간접선거를 통해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됐다. 제주에서는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주민들이 산에 올라갔다. 그래서 제주도 선거구 3곳 가운데 북제주군 갑·을구는 투표율이 미달돼 무효 처리됐다.

김 대표는 “당시 주민들은 3~4일 자리를 피한다고 생각했다. 솥단지 같은 걸 챙겨서 야영 가듯이 올라갔고 선거날이 끝나서 내려왔다. 일각에서는 제주만 유별나게 단독선거를 반대했다고 말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단독선거 반대는 전국에서 보편화된 이슈였다”며 “미군 정보참모부(G-2) 주간 보고서에 따르면 무장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인 4월 2일 기준으로 전국에서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은 239건으로 그로 인해 경찰 53명이 숨졌다. 제주도는 4.3 전까지 경찰 습격이 한 차례도 없었다. 제주도가 별나서 무장봉기, 단독선거 반대가 일어난게 아니다. 탄압의 국면이 꾸준히 누적됐다가 정치적 이슈까지 겹치면서 무장 봉기가 일어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에서 두 곳 선거가 무산되자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은 본격적으로 강경진압에 나선다. 경비대가 아닌 브라운 미군 20연대장이 직접 나서서 작전을 진두지휘 한다. 당시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미군보고서 상에도 ‘빗자루도 쓸 듯이 (제주도를) 휩쓸면 다 끝난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김익렬 후임인 박진경 연대장은 미군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며 6주 동안 4000명을 체포했다.

# 섬을 초토화시키다...말로 다 못하는 학살

김 대표는 1947년 3.1발포 사건부터 1948년 4.3 무장봉기까지를 ‘탄압의 시기’, 1948년 4월 3일부터 포고령을 앞둔 1948년 10월까지를 ‘항쟁의 국면’,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를 ‘대수난’으로 규정했다.

특히 “해방 3년 만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수립된다.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에 의해 일어난 항쟁이란 4.3 무장봉기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데 외부 환경은 엄청나게 변화했다”며 “지배의 주체가 미군정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뀌면서 4.3은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더욱 가혹한 탄압에 직면한다”고 덧붙였다.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은 포고령을 발표하는데, ‘제주도 해변에서 5km 바깥 구역은 적성지역이니 그곳에 있는 인원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는 내용이다. 5km는 그때도 주민들이 살던 중산간 마을이었다. 그리고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김 대표는 “당시 계엄사령관인 송요찬 제9연대장조차 계엄령이 무엇인지 몰랐다. 계엄법이 아직 제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불법적으로 선포된 계엄령이기 때문이다. 계엄법은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때보다 1년이나 지난 후인 1949년 11월에야 제정됐다. 11월 17일 계엄령은 법도 없이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제정한 불법 계엄령”이라며 “내가 기자 신분이었을 당시 이 사실을 보도하자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씨가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 판결로 결정났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초토화 작전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고 말한다.

그는 “초토화 작전 이전에는 군·경 토벌대도 아무나 잡아 고문하거나 살해하지 않았다. 비록 자의적 판단이긴 하지만 그들의 눈에 무장대로 활동할만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젊고 건장한 남자를 대상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초토화 작전 때에는 70~80대 노인부터 젖먹이까지 가리지 않고 죽였다”고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모든 중산간 마을을 동시에 불을 지르고, 이에 놀라 뛰어나오는 주민들은 마구잡이로 총을 쏘고, 걸핏하면 운동장에 모이게 해 ‘문서가 나왔다’며 쏴죽였다. 청년이 사라진 가족은 도피자 가족이라고 해서 전 가족을 몰살시켰다. 

1948년 12월 말 대전에 있던 2연대가 제주 9연대와 근무지를 교대하는데, 미군 보고서는 그 이유를 ‘전투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2연대도 (살상) 경험을 해야 하니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지 말고 한 발씩만 쏴서 죽이라’는 증언도 있다.  

김 대표는 초토화 작전을 잘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했다. 기자로 4.3을 취재했을 당시 어느 노인회관에 갔을 때 어떤 할머니가 “4.3으로 시집 가족도 죽고 친정 식구도 죽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다른 할머니가 “당신네는 총에 맞아 죽지 않았냐. 그건 고통이 순간으로 짧아 다행”이라고 답했다. 

김 대표는 “초토화 작전의 가장 큰 책임은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여전이 군과 경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던 미군에게 있다”면서 “그런데 무장대에 의한 주민 희생이 있음도 알아야 한다. 무장대는 처음엔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지목해 공격했는데 이때 일부 지역에서는 그 가족까지 죽이는 과오가 있었다. 이는 정당방위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마을을 지키려는 보초 주민과 무장대 간의 충돌로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무장대는 토벌대 쪽에 기울었다고 판단한 몇몇 마을에 대해서는 무차별 학살하기도 했다. 보통 군인·경찰에 의한 피해와 무장대에 의한 피해가 9대 1 비율이다. 그러나 몇몇 마을은 8대 2에서 6대 4 정도까지 된다. 20~40%는 무장대에 의한 피해다. 그 숫자는 4.3 전체 희생자에 비해 적지만 이를 없는 사실인양 할 수 없다. 그래서 4.3에 대해 각자의 역사관과 철학에 따라 논문을 쓰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4.3을 ‘공산폭동’이라거나 ‘항쟁’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은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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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민의 4.3시민 아카데미가 31일 첫 강의로 시작했다. ⓒ제주의소리

한편 김 대표는 ”김익렬 연대장과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성산포 지역 예비검속을 막은 문형순 제주경찰서장 같은 의로운 사람들은 4.3평화공원에 흉상이라도 세워 더욱 많이 알려져야 한다”며 “4.3은 아프지만 역설적으로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 당시 10살 미만이었던 꼬마들이 살아남아 맨손으로 마을을 일으켜 지금의 제주를 만들었다. 이분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4월 7일 열리는 강의에서는 초토화 작전과 군법회의에 대해 보다 자세히 배워본다.

수강 신청 문의: 064-711-7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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