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jpg
오재선씨, 1986년 모진 고문에 간첩 내몰려 옥살이...청력 잃은 만신창이 몸으로 무죄 호소

동생의 진단서를 든 오재선(78) 할아버지가 법정 앞에서 변호인을 기다렸다. 재판을 앞둔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귀를 먼저 내밀었다.

경찰의 고문으로 오른쪽 청력을 잃은지 벌써 33년째다. 왼쪽 귀마저 청력이 약화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울 정도다.

1986년 재판후 32년만에 다시 법정에 섰다. 동생을 증인으로 내세웠지만 지속적인 공황발작 증세를 보여 결국 이날 함께하지 못했다.

“난 간첩 아냐. 그냥 끌려가서 두들겨 맞았지. 얼마나 맞았는지 몰라. 볼펜으로 찌르고 잠도 재우지 않고, 송곳으로 손톱을 찌르겠다고 협박까지 했어. 아. 끔찍했지”

오씨는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전에 부모와 제주로 향했다. 1948년 4.3이 일어나고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오씨는 어머니, 동생들과 제주에 남았다.

3.jpg
16살이던 1956년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했다. 당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지만 학비가 없어 스스로 학교를 나왔다.

먹고 살기 위해 가방공장 재단사와 식당 종업원 등으로 일했다. 일본 여성을 만나 새로운 가정까지 꾸리고 1970년대에는 식당 주방장으로 일하며 자리를 잡았다.

오씨는 이 과정에서 일본 야쿠자와 인연을 맺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야쿠자들의 제주 관광을 도왔지만 실제 목적은 마약 판매였다. 결국 이 일에 연루돼 형사 처벌을 받았다.

결국 오씨는 1983년 3월 제주로 강제소환 됐다. 목장 일을 하며 생업을 이어갔지만 느닷없이 경찰이 들이닥쳤다. 1985년 4월 오씨는 제주경찰서 대공과 수사관들에게 끌려갔다.

한 달을 넘는 불법감금으로 고문을 당했다. 경찰관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결국 허위 자백으로 이어졌고 1986년 6월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1986년 12월4일 제주지방법원은 국가보안법(간첩) 위반 혐의를 적용해 오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장은 이명박 정부에서 대법원장에 오른 양승태 판사였다.

2.jpg
당시 오씨가 뒤집어쓴 혐의는 제주지역 비료가격 인상 기밀 수집, 깡패를 동원해 만든 5.16도로 기밀 수집, 애월읍 시외버스정류소에서 판매한 전국 교통시간표 기밀 수집 등이었다.

법원은 오씨가 수집한 내용을 국가기밀과 관련된 정보 수집으로 판단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적용해 1986년 12월4일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오씨는 5년2개월을 복역하고 특사로 풀려난 후 후유증에 시달렸다. 채소가게를 운영하고 농장관리를 하며 홀로 생활했다. 나이가 들면서 후유증은 질병으로 악화됐다.

자신의 몸을 추스를 기운조차 없어 2005년 스스로 요양원으로 향했다. 벌써 14년째다. 오씨는 생을 다하기 전에 억울함을 푸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목표가 됐다.

법원은 오는 6월7일 공판을 열어 검찰측 증인에 대한 심문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후 결심공판을 열어 오씨의 최종진술을 듣는다. 7월이면 32년만에 재심결정이 이뤄진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