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의 숫자가 한해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에 매료돼 바다 건너 제주로 향한다. 여기에 제주사회는 자연, 사람, 문화의 가치를 키우자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례 없던 이런 변화 속에 제주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 역시 높다.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고민을 녹여내기 위해 제주출신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가 [제주의소리]를 통해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양은희의 예술문화이야기] 34. 광화문 퍼포먼스, 25주년 4.3미술제, 예술공간 양 추모행사

세종문화회관 도로변 계단에 잿빛 물감을 바른 천위로 붉은 동백꽃이 그려진 옷을 입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누워서 멍하게 하늘을 보기도 하고 서로 기대어 쉬고 있는 이들은 대략 수십 명. 4월 3일 광화문 광장에서 4시 3분을 기해 403명이 참가한 퍼포먼스 <4.3 대한민국을 외치다>가 있을 것이라던 뉴스를 듣고 간 현장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4.3 7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적 퍼포먼스라는 기대감과 달리 참여율이 저조한 것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오히려 온갖 카메라와 취재하려는 언론이 퍼포먼스 참가자들보다 더 많아 보일 정도였다. 

정확히 4시 3분, 한 여성이 조용히 종을 들고 계단 앞에 모여든 관객들 사이를 걸어가며 ‘땡’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땡...땡...땡.’ 세종문화회관 옆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많았지만 종소리는 차 소리를 뚫고 광장에 서있던 필자에게도 들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간 그 여성은 다시 방향을 바꿔 왼쪽으로 종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그리고 종소리가 그치자 계단의 잿빛 사람들은 하나둘 씩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고통의 무덤에서 나온 듯 그들은 흐느끼고 울며 느리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 광장으로 들어서자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걸어갔다. 그러자 저 멀리 왼쪽에서 걸어오는 또 다른 잿빛 사람들이 수십 명이 보였고, 그 맞은편에서 또 다시 수십 명이 느리게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계단을 내려가 지하철에서 나오는 거대한 통로에서 서로 만나 큰 무리를 이루었다. 마치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모인 사람들이 한날 한곳에 집결한 것처럼 모인 그들은 서서히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휠체어에 의지한 이도 있었고, 서로 부축하며 걷는 이도 있었으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두의 입에서 신음과, 슬픔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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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의 4.3추모 퍼포먼스.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예술로 추모하는 4.3은 이렇듯 조용하면서도 작은 울림으로 감동을 준다. 4.3 70주년범국민위원회가 주관‧기획하고 영화감독 양윤호, 연극 연출가 류성, 한예종 무용원 교수 김용걸 등 3인이 공동으로 연출한 이 대규모 퍼포먼스는 언론과 SNS를 타고 퍼졌고 감동적이며 힘찬 이 행사의 의도를 물어보는 이들이 많았다.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예술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시선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지, 단순한 행위와 감성적 표현으로 죽은 자의 억울함과 생존자의 고통을 분명하게 드러낸 시간이었다.  

70주년을 맞은 올해는 예년과 달리 4.3을 기리는 행사가 넘쳐나고 있다. 막대한 예산이 나왔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여기저기에 행사가 넘치고 예술가들이 모여 추모하는 행사들도 예년에 비해 늘었다. 문예회관에서 제주도립미술관까지, 성북예술창작터에서 아트스페이스 씨까지, 서울과 제주에서 4.3을 내건 크고 작은 전시와 행사들이 열렸거나 열리고 있는데 일부 작가는 여러 곳에 이름을 올리는 행운도 얻었다. 올해 25주년을 맞는 4.3미술제도 강연, 영화 상영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당당하게 원도심에서 열리고 있다. 풍성하다 못해 넘쳐나는 올해 행사들은 정치적으로 핍박받던 시절부터 예술가들에 의해 기억된 이 역사적 사건이 '00'주년마다 누리는 호사의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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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회 4.3미술제. 아트스페이스 씨와 예술공간 이아에서 열리고 있다.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이제 남은 질문은 올해가 지나서도 추모의 열기가 제주를 넘어 많은 예술가들에게 확산될 수 있을까이다. 

어쩌면 그 확산은 이미 시작되어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4월 7일 저녁, 화북 거로마을의 문화공간 양에서는 확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공연이 있었다. 유난히 추웠던 이날, 서울 성북동에서 활동하는 예술협동조합 ‘아트 플러그’가 주최한 퍼포먼스 <섬;섬>은 김시율, 김윤규, 정기엽, 포이 앤 쏭, 장수현, 최소리, 문지영, 서진욱이 거로마을의 오래된 집과 땅을 배경으로 처연한 영상과 슬픈 소리, 그리고 순박한 몸짓을 통해 땅과 삶을 지키려다 쓰러진 사람들을 애도했다. 저녁 7시에 시작해 7시 50분경에 끝난 이 공연은 문화공간 양이 장소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성북구에서 예산을 받아 ‘아트 플러그’가 오롯이 제주의 “검은 흙, 맹폭한 바람과 더불어 피에 절은 역사”를 기리기 위해 준비한 행사라는 점에서 눈길이 갔다. 김시율은 지난 몇 달 간 제주에 머무르며 <검은 모래, 푸른 풀>을 작곡했고, 이 음악이 공연에 처음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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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간 양의 아트 플러그 공연.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문화공간 양의 마당에서 피리와 바이올린 연주로 시작한 공연은 타악기로 이어지고, 공연자들은 전시장으로 변한 폐가를 지나서 아파트와 접한 담벼락으로 그리고 다시 뒤쪽 마늘밭으로 나아갔다. 모여든 관객들은 공연자들을 따라 움직이면서 과거의 시간과 현실의 공간을 넘나들며 다른 어떤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감동을 받았다. 부동산 광풍과 개발의 시대를 반영하듯 변모하는 거로마을의 한 가운데에 아직도 슬레이트 지붕을 유지하고 있는 문화공간 양의 고고한 자세처럼 이날 공연도 예술의 이름으로 제주의 역사를 추모할 때 자칫 일방적으로 거친 재현에 의존하게 될 수도 있는 위험을 피하고 정련되면서도 울림이 컸다. 공연의 마지막은 김윤규의 안무로 이어졌다. 밭에 심은 수백 개의 전등에 불이 들어오고 그 전등 밭을 배경으로 퍼포머들이 찬바람을 맞으며 돌고 뛰었는데, 마치 먼 우주에서 별과 노닐고 있을지 모를 영혼들을 위로하면서도 고통을 뒤로 하고 땅을 딛고 다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들이 제주와 아무 연고가 없는 예술가들이라는 걸 알게 되니 울림은 두 배로 다가왔다.      

 ▲필자 양은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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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희는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졸업한 후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을 공부했으며, 뉴욕시립대(CUNY)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조우: 제주도립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전>, <연접지점: 아시아가 만나다>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여러 미술잡지에 글을 써왔다.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살펴 본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공저, 2017)의 저자이자 『기호학과 시각예술』(공역, 1995),『아방가르드』(1997),『개념 미술』(2007)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전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 현재 스페이스 D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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