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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항쟁 70주년 전국문학인 제주대회의 일환으로 28일 4.3 문학 세미나 ‘역사의 상처, 문학의 치유’가 열렸다. 사진은 세미나 기조 강연자 한림화 작가. ⓒ제주의소리

[4.3 70주년 전국문학인 대회] 4.3문학세미나 기조 강연 한림화 “여성 인권 복원해야”

“괴로웠다. 
너무나 싫고 괴로웠다. 
그러나 이제라도 널리 알려야 한다.”

세미나 시작을 알리는 기조강연자 한림화 작가는 괴롭다고 말했다. 생지옥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한 4.3 당시 제주여성들의 현실을 다시 떠올리는 과정이 너무나 싫고 괴로웠다고 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몰랐거나 혹은 외면했던 제주여성사회의 존재감을 이제라도 널리 알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주최하고,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가 주관하는 ‘제주4.3항쟁 70주년 전국문학인 제주대회’가 27일~28일 한화리조트 제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다.

28일은 4.3 문학 세미나 ‘역사의 상처, 문학의 치유’가 열렸다. 기조 강연은 장편소설 《한라산의 노을》(1991), 《아름다운 기억》(1998~1999) 등의 주인공 한림화 작가가 맡았다. 

강연 제목(제주4.3사건 진행 시 제주여성사회의 수난과 극복 사례-졸저 『한라산의 노을』 집필 전 자료수집 노트를 펼쳐보니-)에서도 알 수 있듯 작가는 1980년대 초반 150개 제주 마을을 직접 돌아다니며 모은 4.3 사례, 그 중에서도 여성들의 피해를 소개했다.

현 작가는 “4.3사건 진행 과정에서 공비로 의심되는 이들의 은신처 혹은 행방을 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가족구성원, 특히 여성들은 무차별 성고문 당한 후 학살됐다. 그러한 학살을 두고 민관군경(民官軍警)으로 구성된 토벌대는 ‘대리사살=대살’이라는 명칭을 서슴없이 사용하면서 당연시 했음을 확인했다”며 “대신 죽이는 방법은 성고문 후 나무에 목 매달아 서서히 죽이기,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고 죽이기 등 다양했다”고 참혹한 순간을 여과없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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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항쟁 70주년 전국문학인 제주대회의 일환으로 28일 4.3 문학 세미나 ‘역사의 상처, 문학의 치유’ 현장 사진. ⓒ제주의소리

특히 “제주여성 인권말살 현장 중에 직접적인 강간을 포함한 성폭력, 즉 성고문에 대한 사례는 들어도 또 들어도 끝이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았다. 심지어 가해자들이 제주여성을 성노예로 삼은 예도 몇 건 있었다”면서 자신이 모은 사례 중에서 ‘성산포 특별중대’가 자행한 몇 가지를 들려 주었다.

# 약혼자를 살리기 위해 토벌대원의 성노예가 된 여성

홍모씨는 4.3 당시 성산포의 모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사였다. 어느날 홍모씨는 학교 교무실에 있던 등사판을 분실했다.

성산포 마을에는 특별중대, 특수부대, 특별수사대라고도 하는 토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숙직당번이었던 홍모씨는 ‘최난수 소위’(계급이 경찰에서 통용되던 경감이었지만 성산지역에서는 그를 가리켜 ‘특별중대 최소위’로 불렸다고 한다)가 지휘하는 특별수사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다 당했다. 끝내 즉결처분 선고를 받아 터진목(성산포 입구 바닷가 지명)에서 형 집행이 될 시간만 기다렸다.

그의 약혼녀 정선생은 약혼자가 사형선고를 받고 곧 즉결처분된다는 소문에 특별중대 주둔지인 성산초등학교 임시 교사(校舍)로 쓰던 마을 창고로 달려갔다. 평소 안면이 있는 서북청년단 출신 특별중대의 일원인 차모씨에게 마지막으로 약혼자와의 면회를 부탁했다. 

차모씨는 정선생에게 약혼자를 잘하면 살릴 수 있다는 언질을 주고, 정선생의 몸을 요구했다. 그녀는 약혼자의 목숨을 구해내려는 일념에 자신의 몸을 요구하는 차모씨한테 반강제로 겁탈당했다. (약혼자를 살려준다는 걸 빌미로 그 여선생을 겁탈했다고 증언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정작 홍모씨의 목숨을 구해 준 이는 특수부대 요원이면서 양심적이었던 군인 문남수 상사였다. 문 상사는 정선생을 설득해 전후 사정을 듣고는 홍모씨가 즉결처분 당하기 15분 전에 그를 구출하고 즉시 석방했다. 정선생은 이후 성산포에 주둔한 특별수사대 서북청년단의 성노리개가 되다시피 했다. 그녀는 자신을 가엾이 여기는 한 서북청년단원을 따라 제주를 떠나 대구에 정착했다.

홍모씨는 나와 인터뷰 했던 1984년 당시 약국을 운영하면서 지역 의사로도 활동하는 등 경제적으로 부를 누리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지역의 인사로 대우 받았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데 스스로 희생한 전 약혼녀 정선생의 근황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녀에 대해 혹시 소식을 아는지 물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불행하게 산다고 하더라’고 남의 말 하듯 심드렁하게 언급했다.
# 장난질하듯 자행된 성고문

성산포 특수부대 수용소에서는 여성을 상대로 온갖 성고문이 자행됐다. 나이 불문하고 무슨 놀이를 하듯 여성들을 홀딱 벗겨 양손은 뒤로 묶고 두 다리는 쫙 벌어지게 각각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성기에 온갖 장난질을 했다. 

어느 부대원들은 심심하다면서 여성 성기에 고구마를 쑤셔 넣거나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빼는 등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짓거리를 저질렀다. 그 대상은 처녀든 기혼자든 노인이든 심지어 임산부든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수용된 여성들은 성고문으로 입은 성기의 상처가 썩어 냄새가 수용소에 진동했다고 한다.

# 시아버지와 며느리에게 가해진 불륜조장 성교 고문

특수부대의 고문 수법은 가지가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통비분자라며 산폭도와 내통한 정보를 캔다면서 친족관계에 있는 남녀를 불러내는 것도 그 수법 중의 하나였다. 

수용소에는 입산한 아들 때문에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이 잡혀 수용돼 있었다. 부대원들이 그 두 사람을 불러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에게 성교를 하라고 강요했다. 옷을 다 벗기고 마주 포개어져 눕되 며느리를 위로 올라오게 하고는 시아버지의 성기를 애무하게 하는 등 별 오만짓을 다 시켰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그만 넋이 빠지고 말았다. 

도저히 성교를 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인간이면 차마 시킬 수 없는 온갖 성적 행위를 강요했고, 결국 그 며느리의 국부를 담뱃불로 지졌다.  
 
# 해산 직전의 임신부를 윤간한 후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며 자행된 대살

성산면 혼인지가 있는 마을에서 남편이 일본으로 도망쳐버린 죄로 해산 직전의 여성 '정씨의 부인'이 잡혀 왔다.

그녀는 금방 출산할 듯 진통 중에 있었는데 부대원들은 히히덕거리면서 그녀를 공개적으로 윤간했고 배를 단검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다른 처형당한 이들과 함께 그녀와 배에서 쏟아진 태아를 성산포의 터진목에다 버렸다. 버릴 때까지도 그녀는 아직 목숨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성산포 학살터인 터진목에 버려진 살해 시신들을 토벌대는 즉시 수습하지 못하게 했다. 때문에 여름철에는 모래벌에 버려진 수많은 시신 사이로 보라색 ‘순비기 꽃’이 피어나 썩어가는 시신 냄새를 더러 감췄다고 한다. 

특수부대가 주둔한 성산포의 창고 수용소에서 있었던 성고문에 대해 지역 유지였던 고모씨를 비롯해 대동청년단의 간부열혈단원이었던 서귀포의 강모씨 등 많은 이들이 목격한 것을 증언했다.

# 성고문 기술자 일명 ‘정주임’ 정용철의 만행 

4.3 이후 제주시 삼양동 입구에 있는 경찰지서가 무장대의 습격을 당했다. 그러자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들이 부임하고 경찰인력이 보강됐다. 그 지서에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간부 정주임(정용철)이 부임했다. 그는 제주출신 경찰도 군인도 믿지 않았다. 다 빨갱이 족속들이라고 했다. 

삼양지서 습격 사건의 여파로 삼양동은 물론 주변 마을에서 남성이 사라진 집의 여성을 다 지서로 잡아들였다. 정주임은 주로 젊은 여성들을 발가벗기고 고문도구 '쇠좆매'로 매질했다. 누가 보건 말건 어린 여성들을 공개적으로 강간하고는 옷을 다 벗긴 후 지서 망루에 올라가게 했다. 지서가 있는 곳은 소문난 바람코지(곶)였다. 한 겨울에 벗은 몸으로 망루에 앉혀놓으니 몸이 새파랗게 얼어 픽픽 쓰러졌다. 기절을 해도 날이 밝기 전에는 절대로 망루 아래로 그 여성들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

하루는 산폭도 아내라는 곱고 젊은 여성이 잡혀 왔는데 자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 여성을 상대로 온갖 추잡한 짓을 다하다가 그 여성의 질에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안전핀 고리에 실을 묶어두고 "이제 가도 좋다. 뛰어 가라"고 했다. 그녀가 지서 밖을 나서서 막 한길에 닿을 즈음 정주임이 쥐고 있던 실타래의 실이 다 풀렸다. 뛰어가던 그 여성의 몸이 굉음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이가 돼 길바닥에 흩어졌다.

남편이 입산자로 몰린 임신 중인 여성도 끌려왔다. 정주임은 옆에 세워놓았던 총부리를 난로에 넣어 벌겋게 달궜다. 그리고는 그 여성을 발로 차 넘어뜨리고는 "이 빨갱이 간나 새끼들이 붙어먹었구만 이?"라고 외치며 가랑이를 벌리더니 달군 총부리를 그 여성 성기에 찔러 넣었다. 정주임은 대동청년단을 시켜 성고문으로 거의 죽은 그 여성을 지서 옆의 밭으로 끌고 가게 한 다음,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였다. 

정주임은 삼양지서뿐 아니라 성산포를 비롯해 남쪽 남원 어디 지서에서도 입산자 아내를 상대로 성고문을 즐겨했다고 했다. 정주임에게 당했다고 증언한 부산에 사는 어느 제주 출신 해녀 할머니는 “죽어도 제주 섬 쪽으로 머리를 두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긋지긋하다”고 내게 말했다. 

한 작가는 “물론 4.3 사건으로 남성 사회 역시 인명피해가 막심했다. 어떤 마을에는 성인 남성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표선면 신흥리 같은 마을에서는 이웃마을에서 마을 이장을 맡아줄 남성을 빌어야겠다고 여성들이 회의를 했다고 한다”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도민이 4.3으로 물적·심적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 작가는 처참하게 망가진 제주도를 재건하는 역할은 살아남은 자들, 그 중에서도 상당수가 여성들의 몫이었다고 강조했다.  

불타버린 옛 마을터로 돌아와 밭을 일구고 물질을 시작했다. 당국은 해제 구역에 임시 집단 거주지를 건설하도록 일정한 터를 지정하였는데 그것도 여성들의 몫이었다. 대표적인 장소가 지금 대기고등학교가 들어선 제주시 용강동의 함명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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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조 강연자 한림화 작가. ⓒ제주의소리

초등학교를 보수하기 위한 마을운영 기금, 학교재건 기금을 마련했다. 남성사회가 중심이 돼 일했던 ‘마을공동목장’을 복원하는 한편, 고구마 같은 농작물을 공동사업으로 설정해 판매했다. 띠로 초석(돗자리)을 짜 팔아서 기금을 마련했다. 성을 쌓고 보초를 서는 일도 해야 했다.

온평리 등에서 진행된 학교바당(해산물을 공동 채취해 학교육성회로 기부하는 것), 반장통(이장·반장의 업무를 돕는 공동 물질) 역시 이에 해당한다.

한 작가는 “제주여성의 4.3사건 진행 시 당한 인권 유린과 인권 말살을 비롯해 복구과정에서 한 역할과 사회 구축, 복원 등에 대한 문헌·기록은 찾기가 힘들었다”며 “죽음의 피바다 한가운데에 나뒹구는 신세였으면서도 제주사회를 건져 올리려 혼신을 다한 당시 여성사회의 역할에 대한 조명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사례가 현재까지는 없다. 이즈음 4․3사건이 국가적으로 규명되고 역사의 실체로 자리 매김 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러하다”고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한 작가는 “이제는 그 때 국가권력과 공권력으로 무장하고 제주여성사회에 가했던 인권말살을 복원해 줘야 하지 않을까. 그 몫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일 수도 있다”고 당부했다.

‘제주4.3사건’ 진행 시 제주여성사회의 수난과 극복 사례 
- 졸저 『한라산의 노을』 집필 전 자료수집 노트를 펼쳐보니 -
 
한림화

1. 제주여성도 ‘제주4.3사건’ 당시 잃어버린 인권을 말할 입이 있다 

지금까지도 인류사회에서 벌어지는 인권 문제 등을 다룰 때 여성의 인권유린․말살 당한 사례는 별개로 취급하는 경향이 짙다. 즉 남성의 인권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저 그 여성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고 전제하고 접근한다. 해결 양상도 보면, 남성의 인권은 그가 속한 사회와 민족과 국가라는 차원에서 전 지구적으로 명분 있게 다뤄지는 경우가 통례이다. 반면에 여성의 인권은 개인차원에서 ‘특별히 다뤄야 할 대상’으로 치부하고 처리하려는 경향이 엿보이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이분화(二分化)된 현상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여성에게도 인권을 말할 입이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명쾌하게 제시되는 역사를,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이 사회에서 당대에 이룩할 가능성은 있을까.  

일제강점기의 ‘일 노예’ 랄 수 있는 ‘정신대(挺身隊); 조선여자근로정신대)’며 ‘성 노예’나 다름없는 소위 ‘위안부(慰安婦)’에 대한 현 시점의 해결과정을 다른 성 관련 여성인권 회복 해결 사례로 제시되어도 무방한가.

그 답을 이제는 찾아야만 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한반도를 휩쓸던 ‘민주화’시기 전후였다고 기억한다. ‘이제는 여성이 말하게 하라!’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성인권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여러 회의 등 공개된 모임에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연대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도 몇 명 여성학자와 사회운동가들이 이에 동참, 목소리를 내었다. 당연히 한국의 수많은 여성인권 문제들이 상정되었다.

그 결실이 ‘위안부’와 관련한 일연의 국가차원에서 활동이 이뤄지고 있을 뿐, ‘제주4.3사건’ 진행 과정의 여성인권에 관한 것은 전혀 다뤄지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제 와 겨우 ‘#Me Too’ 운동이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하나 국가기관인 ‘여성가족부’의 활동행태는 2018년 3월 현재 미미할 뿐이다.  

1930년 초기 제주 섬에서 제주해녀사회가 주도했던 ‘제주해녀항일항쟁운동’을 시작으로 ‘제주4.3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제주여성사회에 가해진 수난사(受難史)와 인권유린․말살 사례는 언제쯤 제대로 여성인권 차원에서 다뤄질 지 노심초사한지 오래다.

총체적 진실 규명과 명예회복을 넘어 그 오랜 시간 동안 공권력에 의해, 남성사회에 의해, 그에 동조하는 여성들인 ‘대리남성’들에 의해, 겹겹이 자행된 제주여성사회의 인권을 복원할 가능성이 있는지 몹시도 궁금한 상태로 시간은 흐른다. 

현재 ‘제주4.3사건’ 당시에 ‘당한 여성 이야기’는 오로지 그 추념기간에 개인이 어쩌다 ‘이야기 마당’ 등의 프로그램에 등장하여 불행했던 ‘옛일을 회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 때 고난을 어떻게 누구로부터 당했는지를 증언함으로써 이제 와 인권이 회복되는 ‘기억재생의 기회’가 아닌 ‘제주4.3사건’을 구성하는 시간 경과를 재생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에 불과하다.

유린당하고 갈갈이 찢긴 그 당시 제주여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당당한 권리가 주장되고 인권을 회복하는 기회’를 제주여성사회가 가져야 할 당위성이 간과되고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언제나 끝이 날까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2. ‘제주4.3사건’과 제주섬사람과 ‘빨갱이’를 

하나로 묶은 끈은 누가 제공하였나

제주 섬에서 70여 년 전에 일어났던 '제주4․3사건'은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다만 그 현상만을 놓고 봤을 때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한반도에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반공규율체제(反共規律體制)의 확립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당시 ‘빨갱이 소탕’, ‘공비토벌’이란 이름 아래 제주의 마을을 불태우고 섬사람을 북한의 공산당과 남로당의 사주로 빨갛게 물든 공비 또는 ‘통비분자(通匪分子. 공비(共匪)와 내통한 자)’로 몰아 대량 학살한 가혹행위자의 명분은 “빨갱이를 뿌리 뽑고, 그 종자를 말려야 한다” 는 것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뿌리를 뽑고 씨를 말리는’ 폭력적 행위의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러한 행위의 대상물로서 ‘빨갱이’는 제주섬사람이라는 등식으로 완성해 놓았다.

국가가, 공권력이 그토록 제주섬사람을 한 묶음으로 묶어놓고 소탕작전을 실행한 이면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제주섬것들은 불량한 생물’로 설정한 데서 기인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그 존재만으로도 미국으로 대별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그리고 ‘대한민국’ 입장에서 보기에 같은 국민을 구성하는 인간인 자연물(自然物)로 공생하기에 결코 이롭지 않은 존재라고 대상화(對象化, objectification)했기 때문일 것이다.

빨갱이라고 규정된 제주섬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빨갱이라는 잡초이며 국가의 일원에서 배제해도 문제될 게 없는 열등한 인종임으로 제거해버리지 않으면 아니 될 존재로 설정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당시 국가권력[좁게는 공권력]을 앞세워 소탕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데에는 이미 인류사회에 그러한 예가 있었던 데서도 당위성을 찾았을 성 싶다.

그러니까 ‘세계제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의 계획적인 유태인 생물학적 말살(生物學的 抹殺 biological termination)을 보고 동일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누가, 어느 그룹이, 어느 국가가 제주섬사람을 그러한 대상으로 취급했는지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다 안다.

3. 문인이 ‘제주4.3사건’을 안다는 것은 형벌이다

문학이 담당하는 몫은 그 사전적 의미를 나열하지 않더라도 예술과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데다 매우 비범하면서도 그 반대개념인 보편타당한 가치를 동시에 지닌다라는 논리가 교과서적인 설명이다. 그럼으로 인류사회의 과거의 거울이자 현실의 반영이며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 또한 그 임무로써 책임지고 있다고들 한다.

이런 문학의 역할과 의무를 우리 문인은 모르는 이 없을 터이다.

이는 문학의 당위성이며 사회적 기능이며 과거로부터 미래까지를 포함하여 인류의 사고와 행위에 따른 대변(代辯)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 궁극적인 목적을 인류의 삶을 계도하고, 나아갈 바 방향 즉 삶이 지향할 좌표를 설정하여 선도하는 데 두고 있다고 역설해 온 바이다.

위 해설은 소위 문예물 분류의 한 항목인 ‘참여문학(參與文學 participating literature)’만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게 아니라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행위자체를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생각해 왔다. 

제주작가가 아니더라도 ‘제주4.3사건’을 작품에 차입해본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국가와 국민의 존재에 대한 정의를 새삼스럽게 가늠해 보지 않았을까 싶다.  

2000년대 초반에, ‘제주4.3사건’을 주제 혹은 소재로 한 작품을 쓰는 작가들을 오랜 기간에 걸쳐 심도 있게 취재한바 있는 한 지방 신문의 문학담당 기자는, “문학이라는 그릇에 섣불리 담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눈을 감고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작가는) 그래서 끊임없이 쓰면서도 항상 미진하고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린다”고 지적하였다.

그렇다. 사실이었다. 그렇더라도 처음 시작점부터 ‘제주출신 작가’로서의 나는, 자신의 배경을 배재(排除)하고 보다 객관적으로 ‘제주4.3사건’을 보려고 하였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어떻게 흘러가는가. 역사의 격랑에 얹어진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규명해야 하는가.  

이토록 진부한 역사의 정의와 그 방향성과 이를 완성하는 사람에 대한 인식․회의․불확신․배신감 사이를 끊임없이 넘나들면서 그 사건을 작품으로 낳으려고 죽을힘을 다하였다. 오로지 ‘제주4.3사건’에 대한 실체를 밝히는 대 일조할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초기에, 완전 독립을 꿈꾸며 ‘입산’(入山 ‘제주4.3사건’ 당시 오름이나 동굴 또는 한라산의 밀림지대에 숨은 무장대(武裝隊)와 민간인의 행위를 이렇게 통칭했다.) 하여 무장대에 합류했던 사냥꾼을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나중에 토벌대의 지로인(指路人)으로 차출되어 한라산 일대에서 길라잡이로 활동하였노라고 했다.  

제주섬사람인 그가 무장대원으로, 토벌대의 지로인으로서 한라산을 누빈 소감은 “제주사람은 역류하는 역사 앞에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한 마디는 억장을 무너지게 하고도 남았다. 차츰 그 역사인식이 당시 제주섬사람의 보편적인 역사와 맞닥뜨리는 정서였음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들의 저항만으로 완전 독립된 나라를 세울 수 있으리라 믿은 건 아니었다. 다만, ‘남한만 분할해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제2독립운동에 의의를 두고 있었음을 자료수집 과정에서 확신하였다.

아무리 봐도 전모가 드러나면 그럴수록 ‘제주4.3사건’은 제주섬사람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민족분열과 국토분할은 없다는 역사적 사명감으로 충만해 있었음을 확인하는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반도에 분단된 나라를 세울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민중운동이든 ‘민란’이든 순수하고 원대한 뜻으로 뭉친 대가로 제주 섬 자체가 도륙(屠戮) 당하였다.

오랜 일제강점으로부터 겨우 벗어난 해방공간에서 제주섬사람은 한반도에 세워지는 나라가 이미 두 쪽 나 세계사의 일부로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하나의 땅덩이에 하나의 민족으로 이뤄진 하나의 나라가 최선이라는 극단의 애국주의가 제주 섬을 에워쌓는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제주 섬 사회는 무의식적 방어기제를 앞세워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해리(解離, Dissociation)성 장애’ 상태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공권력은 단정했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직 하나의 나라를 세우는 ‘독립운동’으로만 알고 '제주4.3사건'에 참여한 혹은 수수방관한 대다수의 선량한 제주섬사람들을 말살하려고 투입된 '토벌대'가 대량 학살을 정해진 순서처럼 진행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당시 제주섬을 도륙낸 ‘토벌대’가 우발적으로 살상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음에 주목하면 얼마나 치밀한 계획을 수행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토벌대 소탕작전은 아예 숱한 마을들을 송두리째 없애버리기도 하였고, 남자들만을 골라 죽여 여자들만 남겨놓아 '무남촌(無男村)'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여성들은 대살(代殺)을 당하였다. 

또한 토벌대와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나중에 한국청년단이란 이름으로 통합, 관변단체로 활동)이 요구하는 대로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를 마련하는 일노예로, 남성의 성욕구를 채우는 노리개인 동시에 성노예로 부려졌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도 제주섬사람의 고난한 삶은 역경의 행로인 진창길을 걸어야만 했다.

왜 고향에 돌아와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역사’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가. 도망치고 싶었다. 가버리려고 몇 번이고 짐을 쌌다.  

4. 그래도 해야만 했다.

제대로 ‘제주4.3사건’을 알아야만 했다. 공공기관에서 발행한 연보 등에 서술된 내용은 아주 간단하게도 ‘1948년 4월 3일을 기해 제주 섬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관련 자료를 모으기로 했다. 그래서 자료를 1980년 대 초부터 1990년 대 초까지 무려 10년에 걸쳐 수집을 하면서 동분서주했다. 

1차적으로 당대를 체험했던 이들과의 직접 대면조사(interview)와 2차는 관련 문건, 외국의 문건 등을 수집하였다. 그 과정에서 공권력의 무분별한 사용 면모와 당시 상황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미군정 자료인 ‘G-2 보고서’(G-2 Periodic Report. Hq. USAFIK ; 출판사 ‘일월서각’ 김승균 사장의 조건 없는 제공) 등 원본 영인본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한길사의 김언호 사장과 황광수 편집장의 응원이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 

자료를 수집하던 당시 한국의 시대적 상황은 오랜 독재와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추구하는 국민이 격렬하게 저항하며 변화를 도모하는 격변기였다. 그럼에도 공권력은 여전히 안보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국민을 통제할 때였다. 

우선 당시를 체험했던 제주섬사람들부터 만나기 시작하였다.

그 상황에서 '누구나 다 알지만 공개적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제주4.3사건'에 대하여 '그 누구라도 함부로 발설하면 죄가 되는 대한민국 건국사의 최대비극'이면서도 ①왜 ②누구에 의해서 ③어디서부터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④마무리 되었는지, ⑤제주도민을 대상으로, 그것도 당대에 직간접으로 체험한 당사자를 통하여 면담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1차 작업은 무척 힘들었다. 

본격적인 현장 조사에 앞서 무작위로 한 마을을 정하여 파일럿-인터뷰(pilot interview)를 실시하였다. 결과 뜻밖의 난제를 만났다. 대면한 주민 대다수가 그 '제주4.3사건'을 알고 있다고 했으며,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그런데 피해를 입힌 주체에 대하여서는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매우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 인터뷰할 당시 제주의 행정마을 단위마다 '지도자'라는 리더가 몇 명씩 있었다. 이들은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새마을운동본부'가 지명한 이들이라고 했다. 그 지도자들은 주로 장년남성으로 옷차림에 특색이 있었는데, 새마을 모자에다 녹색 야전점퍼, 군복 바지 등 전투복을 입고 군화를 착용하고 야외활동 시에는 색안경(sunglasses)을 쓰며 지휘봉을 휴대하여 외견상으로는 군 지휘관과 흡사하였다. 

이들과 그 가족들은 "'제주4.3사건'은 빨갱이들이 남로당의 사주를 받아서 일으킨 폭동이다"라면서, 확신에 차서 주장하였다. 아울러 "왜 그 폭동을 들추고 다니느냐? 수상하다. 당국에 말하여 조사받게 하겠다." 고 으름장을 놨으며 실제로 신고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다른 이들은 소위 중산층으로 분류될 만한 이들로 '지도자'그룹처럼 앞에 나서지는 않지만 마을 안에서는 소위 '말 발이 서는' 부류였다. 이들은 사회의 이슈가 되는 여론을 확실하게 형성하는 주류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의 세력을 형성하는 기본은 그 마을 안에 일가친족이 많아 일찍이 토호(土豪)로서 기반이 든든하다는 것이었다. 

이 그룹은 너나 할 것 없이 ‘제주4.3사건’을 매우 모호한 태도로, 그 사건자체를 들추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슬쩍 정보를 흘렸다.

예를 들면, "우리 마을에도 그 때 여러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 패가망신 당한 집안이 한두 집이 아니다. 그 아는 바를 다 말했다가는 큰 화(禍)가 닥칠 텐데 다 책임지겠다면 알고 있는 걸 말해 줄 수도 있다. 책임지지 못할 거면서 깊이 알려고 하지 말라. 우리 마을 사람들 또 한 번 죽는 꼴 보기 싫다." 라고 ‘이야기’하기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달(月) 아무 날(日)이면 이 마을에 제사가 많으니 그 때 와보면 뭔가 알 도리가 있을 것이다."라면서 간접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 외 일반주민들, 특히 여성들은 아예 "우린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거론조차 못하게 방어하였다. 

그러한 상황을 파악한 후 별다른 자료수집 방법(Research methods)을 세우지 않았다. 매우 단순하게 접근하는 단 하나의 방법만을 선택하였다. 즉 무조건 많이 만나 '제주4.3사건'이야기를 수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제주4.3사건'이 1930년 ‘제주해녀항일항쟁’ 때부터 서서히 움터서 1948년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점을 감안, 인터뷰를 할 대상자의 연령대를 40세 이상으로 잡았다.

왜냐하면 1980년 초 시점에서 볼 때, 그 연령대면 사건이 진행되던 시기에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10세 전후여서 직접 체험한 것에 대하여, 혹은 들은 것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조사기간인 10년 내에 제주섬 마을을 다 방문하기로 계획하였다. 

현장조사 시점인 1980년대 초반, 제주섬 자연마을(natural village)은 대략 556개, 법정마을(political village)단위로는 195개, 행정마을(administrative village)단위 별로는 203개였다.

현장에서 공개 혹은 비공개로 인터뷰를 하되 명목상으로는 *마을공동체 자료조사(마을역사 중심으로) *전통의례 자료조사 *전통생활문화 자료조사 *전통문화예술 전래 자료조사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제주의 마을들 중 행정마을 단위로 약 150개를 직접 방문하였다. 나머지 마을들도 한두 번씩은 방문하였으나 통합적이고도 구체적인 데이터를 얻을만한 자료조사나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극소수의 주민으로부터 단편적인 이야기를 듣는 데 그쳤음으로 대상지역에서 제외하였다.

마을 현장조사 시 방문할 곳에 대하여 순번을 정하지 않았다. 맨 처음 인터뷰를 시작한 마을은 제주시 삼양3동이었다. 

제주섬사람에게 집단기억(集團記憶 collective memory; historical stigma) 으로 내재된 그 사건은 어떤 의미로 각인되었는지 알고자 하였던 의도에 충실하고 싶었다. 

물론 기억에 의한 사건 재생은 ‘인터뷰 당시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기도 한다’ 는 구술(口述)이론을 명심하였다. 따라서 인터뷰에 응하는 태도 및 구술할 때 단어 선택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인터뷰 매뉴얼을 아래와 같이 만들었다.

첫째, (1)현장조사 시점에서 인터뷰에 응하는 제주도민은 '제주4․3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어떻게 구술하는가. 
(2) 당시 일반 제주섬사람 사회 상황은 어떠하였다고 기억하고 있는가.
(3) 당시 제주섬사람이 국제정세 및 우리 한반도의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였다고 기억하는가.
(4) 당시 제주섬사람 사회에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비전 및 기대는 어떠하였다고 기억하는가.
(5) 당신은 '제주4․3사건'을 전후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가.

둘째, (1)언제 (2)어디서 ⑶무슨 일이 ⑷누구에 의해 ⑸어떻게 일어났으며 ⑹어떻게 마무리되었다고 기억하는가.

셋째, ⑴당시 위정자들이 제주섬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하려 했으며 결과적으로 어떻게 이용하였다고 기억하는가.
⑵당시 국제정세가 '제주4․3사건'의 간접원인인가 ,직접원인인가에 대한 식견을 갖춘 토론이 제주섬사람들 사이에 있었는가.
⑶미군정 및 주변 국가인 일본과 중국, 특히 북한당국이 조장하거나 개입했다는 소문을 들었는가.  

이외에도 *관련 당사자로 제주도민이면서도 도외거주자 및 사건의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던 외지인 약간 명은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하여 미리 접촉을 시도, 약속한 후 그들의 거주지인 서울, 부산 및 일본, 미국 등지에서, 기타 제주섬 방문 시를 활용, 인터뷰하였다.

인터뷰 방식에서 매우 심란한 난관에 봉착하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같이 인터뷰 대상자가 인터뷰 방식을 제시하였는데, 이름을 직접 묻지 않기, 녹음하지 않기, 자신을 사진 찍지 않기. 노트 등 필기하지 않기(특히 누가 어디서 인터뷰를 했는지 기록으로 남기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등을 약속하지 않으면 응하지 않겠다고 전제조건을 달았기에 이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미리 작성한 질문지 노트를 보면서 질문하는 것은 허용하였다. 그럼으로 인터뷰에 응한 이들의 사진이나 녹음, 메모 기록 등 현장기록물이 (극히 몇 건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또한 질 높은 통계 및 신빙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면담 시에 설문지를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예비단계에서 실험적으로 몇 명에게 설문지에 의한 면담을 시도하였으나 대상자들이 다 심한 기피현상을 보였기 때문에 결국은 배제하였음) 

따라서
(1) 대상자의 일방적인 구술을 전제로 한 면담형식이었다. 그러나 여러 번 대면할수록 친분이 쌓이면서 구체적인 질문에도 응해주었으며 특정사건의 진실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인 수차례의 면담에도 응해 주었다.
(2) 직접면담과 간접면담(전화, 당사자의 친족, 가족, 친구, 알고 있는  사람)을 병행하여 2차례에 걸친 예비 면담 후 본 면담할 당사자를 선정하였다. 

그래서 면담 대상자에게는 공히 아래의 질문을 하였다.

Ⓐ 광복 당시 제주섬에 거주 유무? 거주하고 있었다면 어디에? 
Ⓑ 그 당시 어떤 조직에 가입하고 있었는지 유무? 
Ⓒ '제주4․3사건' 때의 가족관계?  가족의 직접 피해 유무?
 Ⓓ '제주4․3사건' 때 공적인 조직에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지 유무? 

그리고는 본 면담 대상자로 선정된 이에 한하여 4회에서 10회 정도 심층 면담을 하였다. 이들 대상자는 극소수였다.

이들에게는
Ⓐ 개인 생애사(life history)를 우선 청취하였다.
Ⓑ Ⓐ를 통하여 드러난 '제주4․3사건' 관련 사항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하는 면담을 하였다. 또한 제3자를 통하여도 진위여부를 확인하였다.
Ⓒ 직접 '제주4.3사건'의 가담자에게는 세계사회주의 및 북한공산주의에 대해 알고 있는지 유무(有無)? 알고 있다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경로를 물었다.

이들의 증언에 의한 개인사와 '제주4.3사건'의 실체와의 관계, 이에 대하여 기록된 공적(G-2보고서, 신문 등), 사적(개인이 기록한 관련 문서 등) 집필 등에 나타난 것들과 대조하여 진위여부를 찾아내고 확인하는 방법으로 사례를 정리하는 절차를 밟았다.
 
5. ‘제주4.3사건’ 진행 시 제주여성에게 가해진 인권말살 사례

당시를 체험한 세대인 제주섬사람들과 ‘사건을 진압하러 섬에 들어왔던 토벌대, 국방경비대원(1948년 8월 15일 이후는 국군)’들을 직접 면담하는 과정에서 믿을 수 없는, 차마 그 말을 듣기조차 힘든 제주여성들에게 자행된 인권말살을 들을 수 밖에 없었고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건진행과정에서 ‘공비’로 의심되는 이들의 은신처 혹은 행방을 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가족구성원, 특히 여성들을 무차별 성고문한 후 학살하였다.

그러한 학살을 두고 민관군경(民官軍警)으로 구성된 토벌대는 ‘대리사살=대살’이라는 명칭을 서슴없이 사용하면서 당연 시 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당시 직접 목격한 이들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명칭이 공식적으로 쓰는 용어처럼 ‘대살 당했지’라며 이야기를 진행하곤 했다.

대신 죽이는 방법은 성고문 후 *나무에 목매달아 서서히 죽이기 *임신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고 죽이기 등 다양하였다.

제주여성 인권말살 현장 중에 직접적인 강간을 포함한 성폭력 즉 성고문에 대한 사례는 들어도 또 들어도 끝이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았다. 그 중에는 심지어 가해자들이 제주여성을 성노예로 삼은 예도 몇 건 있었다.

타살 또는 성고문을 직접 목격했거나 그 현장에 있었던 이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증언한 이들은 대부분이 남성이었다. 여성들은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사례를 제공한 이들 1세대는 대부분 그 현장을 억지로 보도록 동원되었거나 아니면 ‘빨갱이’나 ‘통비분자’로 몰려 일정장소에 다 같이 수용된 상황에서 목격했다고 하였다. 증언 중의 사건은 대부분 제3자가 당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많은 남성 증언자들 중에 여성이 당한 타살과 성고문과 직접 연관이 있는 남성이라고 스스로 고백한 이는 단 한 명이었다.

직접 그 지긋지긋한 성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한 여성 증언자도 단 한 명이 있었다. 이 여성은 직접적인 성폭력 실태에 대하여서는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그저 "차마 사람 말로는 다 못할 치욕적인 일도 경험하였다" 라는 말로 대신한 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여성은 ‘제주4.3사건’이 아닌 ‘제주전통여성문화’를 연구하던 중 ‘제주해녀’ 의 ‘출가물질’ 사례를 수집하는 일환으로 들른 연구지 부산 다대포에서 우연히 만났다.

'지긋지긋한 그 일을 당한 제주도에 살기 싫어 나왔다'고 했으며 홀로 늙어가고 있었는데 그 때 당한 후유증으로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병마와 싸우고 있노라고 했다. 그 여성에게, ‘제주도 당국’이 '제주4.3사건' 피해자들부터 신고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알고 있다면서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철저하게 외면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마을 정자 노릇을 하는 ‘상뒤동산 폭낭’(제주 섬에는 마을 마다 주민이 공동으로 할 일이 있을 때 모이는 장소인 ‘향도’ 동산에다 주로 팽나무를 마을 설촌 시초부터 심었다.) 아래 주민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임신한 여성을 나무에 목매달아 서서히 죽인 사례는 직접 목격한 이가 아닌 건너 들은 이를 통하여 들었기 때문에 직접 사례에서는 빼기로 했다. 

여기에 제시하는 사례는 ‘특별중대’, ‘특수부대’, ‘특별수사대’, ‘철도경찰’, ‘서북청년단’ 등으로 가해자를 지목하여 제주섬사람들이 증언했지만 동일한 ‘토벌대’에서 벌어진 일이었음 밝힌다. 그리고 이 부대 중의 핵심부대가 주둔했다는 ‘성산포 특별중대’에서 자행되었던 사례를 중심으로 열거하기로 했다.    

그 때 제주 섬 전역에서 있었던 인권유린과 말살 현장을 여기에서 다 열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만행의 유형이 거의 자행된 한 곳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외 한두 사례는 꼭 그 장소에서만 있었던 것이기에 지역을 불문하고 선별하여 수록하였다.

아래에 대살 및 성노예 그리고 성고문을 당한 사례 몇 가지를 나열하면,

* ‘산’으로 피신한 신랑을 기다리다 대살 당한 용강마을 강씨의 부인

지금은 제주시에 편입된 마을이지만 '제주4.3사건' 발발 당시는 ‘성안’(현재 제주시)의 근교로 한라산 중턱께에 자리 잡은 중산촌(中山村) 용강마을에 갓 혼인하여 신혼에 접어든 한 쌍의 젊은 부부가 있었다.

이 신혼부부에게 일어난 참사를 말하려면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제주4.3사건'을 진압할 목적으로 정부가 파견한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었다.(이 부대는 제2연대에 흡수되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제주도에 주둔하였다.)

그 부대의 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제주도민 저항세력인 '무장대'(일부에서는 '남로당 무장대 대장 김달삼(본명 이승진)'이라고도 명시하고 있다)사이에 소위 '평화협상'이 1948년 4월 28일에 있었다. 

그 협상이 원만하게 잘 이뤄졌다고 하자 '당국'은 이틀 후인 5월 1일, '오라리 사건(May-Day in Orari ; 항공촬영으로 현장을 찍는 등 폭도의 만행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연출하여 '무장대'가 협상을 깬 것처럼 연출하였다. 이 작전에 의해 협상당사자였던 김익렬은 본토로 전출 당하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제주전역에 민관군경을 총망라한 토벌대들을 투입, '삼진작전(三盡作戰)'이란 구호를 앞세워 대대적인 무력 진압에 들어갔다.

'삼진작전'이란 일명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고도 불렸는데, '빨갱이'들의 은거지를 아예 없애버린다는 기치 아래 불태워 없애고, 고립시켜 굶겨 없애고, 보이는 대로 죽여 없애는 것이었다.(이 작전은 군에서는 낯설지 않은 작전명이라고 했다. 전쟁이 일어나 점령지에서 흔히 이뤄지는 작전이라고 한다.) 이(리)승만이 "제주 온 섬에 휘발유를 뿌려 다 불태워 버릴 수 없느냐" 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토벌대의 이 삼진작전 수행으로 인하여 바닷가 마을 일부를 제외하고 중산간(촌), 산촌 전부를 고립시키고 주민은 바닷가 마을로 소개시켰다. 

경찰, 군인, 공무원, 대동청년단 등이 있는 가족이 소개 대상 일 순위였다.

고립지역 마을의 모든 주민을 소개한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바닷가 마을에 친족이라도 있어서 외양간이나마 빌릴 수 있어야만 '당국'의 소개령에 따를 수 있었는데, 그런 집은 많지 않았다. 그에다 환자와 노약자,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들은 바닷가 마을까지 걸을 수도 없었다. 그 뿐이 아니라 많은 주민이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데려갈 수 없어 선뜻 집을 비우고 길을 떠날 수 없었던 요인도 있었다. 

그럼에도 '당국'은 고립지역에 남은 주민은 무조건 '빨갱이'와 관련이 있는 자들로 분류하고 소탕할 대상으로 선정하였던 것이다.

그 지역의 집들은 불태워졌다. 소개령(疏開令 eviction order)에 의해 사람은 그 누구도 마을에 남아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만일 남은 자가 있다면 그 자는 당연히 '빨갱이' 거나 무장대와 내통하는 '통비분자'로 ‘찍었다’. 따라서 토벌대는 사람이 보이는 대로 죽이거나 잡아다 강제수용 하였으며 그럴 권리가 주어졌다.

이 작전이 수행되는 과정에 토벌작전 지역 마을사람 거의 다 산속으로 숨었다. 왜냐하면 토벌대는 작전지역 내에서 특히 남성과 젊은 여성을 보기만 하여도 무장대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남은 가족들은 토벌대가 몰아붙이는 대로 강제소개(强制疏開 forced evacuation)되었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아무 연고도 없는 바닷가 마을로 내려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마을에 남았다가 토벌대 눈에 띄면 온갖 고문을 당하고는 죽임을 당하였고 특히 여성들은 강간을 당하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끌려가 성노예가 되기 일쑤였다.

신랑 강씨는 조실부모하여 가난하였다. 신부는 개의치 않고 그에게 시집을 왔다.

강씨도 토벌대의 삼진작전에 의한 무차별 초토화 작전을 피해 입산할 도리 밖에는 없었다.

강씨는 산속으로 떠나면서 신부에게 친정에 가있으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토벌대가 활동을 멈추는 밤이 되면 혹시라도 신랑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며 혼자서 단칸방에 부엌과 고방이 고작인 신혼집을 지켰다. 마을 사람들이 같이 숨자고 해도 한사코 따라 나서지 않았다. 

마을을 초토화시키러 진입한 토벌대는 주민이 다 숨어버려 텅 빈 골목골목을 이 잡듯이 샅샅이 수색하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약탈한 끝에 불 질렀다. 

마을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강씨네 초가를 발견하였다. 그 때 강씨의 신부는 방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갓모자를 짜고 있었다.

토벌대에는 그 마을 출신 길라잡이가 있어서 그 집이 누구의 집이며 신부 혼자 머물고 있는 사정을 다 알고 있었다. 그 길라잡이가 마치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마을 사람들이 엿보듯이 마당으로 난 방문의 창호지를 침 묻힌 손가락으로 살그머니 뚫어 방안 사정을 살폈다.

그 신부는 마당 쪽으로 창문을 향하여 반듯하게 앉아 갓모자를 짜고 있었다.

토벌대는 지휘관의 신호에 따라 소리 없이 그 집 방을 향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포진하고 총구는 방을 겨냥하였다. 다음, 지휘관의 신호에 의해 일제히 집중사격을 하였다. 더 쏠 총알이 없을 때까지 그렇게 방을 향하여 쐈다. 

토벌대는 그 신부 말고도 거동이 불편하여 집에 남아있던 노인 등 몇 명을 더 사살하고 나서 그 마을에서 그 날 작전을 마치고 철수하였다.

어스름이 깃들 무렵 마을이 잠잠해지자 숨었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 왔다.  

쑥대밭이 된 마을을 정신없이 수습하던 이들이 문득 홀로 집에 남은 강씨의 신부를 떠올렸다. 누군가가 "가보자. 혼자 남았는데 어떻게 되었나......." 라고 하면서 앞장섰다. 마을 남정네 몇 사람이 그 집 올레로 들어서자마자 피비린내가 먼저 훅, 달려들었다.

방문은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부서져 한 눈에 방안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온 방안 가득 살점과 뼈 조각과 피가 범벅이 되어 아수라장이었다. 살점 몇 점이 피에 엉켜 천정에 까지 튀어 올라 달라붙어 있을 정도였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두 번은 차마 못 볼 지옥도(地獄圖)였다. 

그 집 방안에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아 갓모자를 짜던 강씨의 신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신랑 강씨도 마을 청년들과 마을 주변 냇가 동굴에 숨어 있다가 토벌대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 한 남성을 살리기 위하여 두 여성이 토벌대원의 성노예가 된 예.

약혼자이며 동료교사인 '홍아무개'를 살리기 위하여 타의반 자의반으로 토벌대 지휘관의 성노예가 될 수 밖에 없었던 (1)약혼녀 '정선생'과 (2) '홍아무개'조카딸에 관한 이야기이다. 

Ⓐ '홍아무개'는 그 당시 성산포의 모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사였다. 그 학교 교무실에 비치된 등사판을 어느 날 잃어버렸다. 

일찍이 신문물을 받아들여 섬의 동쪽 중심지였던 성산일출봉이 있는 마을 성산포에는 '특별중대', '특수부대’라고도 하고 또 말하는 이에 따라서는 '특별수사대'라고도 하는 ‘토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의 구성원은 '서북청년단'과 처음부터 제주섬을 토벌할 목적으로 모집되어 섬에 들어온 '철도경찰' 출신들과 이들의 길라잡이며 물자조달이며 지역정보를 수집하고 제공하는 제주출신으로 구성된 약간의 '대동청년단'이었다.

수사당국(성산포에 있었던 경찰지서를 일컫는지 아니면 특별중대를 지칭하는지 명확하게 구분하여 말하지 않고 그냥 '수사당국'이라고 구술자가 표현함)에서는 ‘빨갱이’들이 삐라를 제작하려고 그 등사판을 가져갔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 학교 교사 중에 ‘통비분자’ 가 있다고 하면서 교사들을 일일이 끌고 가 취조하였다.

그 학교 교사이며 그 날 숙직당번이었던 '홍아무개'는 '최난수 소위'(계급이 경찰에서 통용되던 경감이었지만 성산지역에서는 그를 가리켜 '특별중대 최소위'로 불렸다고 한다)가 지휘하는 특별수사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다 당하고 끝내 즉결처분 선고를 받아 터진목(성산포 입구 바닷가 지명)에서 형 집행이 될 시간만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의 약혼녀 '정선생'이 약혼자가 사형선고를 받고 곧 즉결처분된다는 소문에 특별중대 주둔지인 성산초등(국민)학교 임시 교사(校舍)로 쓰던 마을 창고로 달려갔다. 평소 안면이 있는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특별중대의 일원인 '차아무개'에게 마지막으로 약혼자와의 면회를 부탁하였다. 

'차아무개'는 '정선생'에게 약혼자를 잘하면 살릴 수도 있다는 언질을 주었다. '정선생'의 몸을 그는 요구하였다. 그녀는 약혼자의 목숨을 구해내려는 일념에 자신의 몸을 요구하는 '차아무개'한테 반강제로 당하였다. (약혼자를 살려준다는 걸 빌미로 그 여선생을 겁탈했다고 증언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홍아무개'의 목숨을 구해 준 이는 특수부대요원인 양심적인 군인 문남수 상사였다.

문남수 상사는 겁탈 당하여 정신이 반쯤 나간 '정선생' 모습을 보고는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하였다. '정선생'을 설득하여 전후 사정을 듣고는 '홍아무개'가 즉결처분 당하기 15분 전에 그를 구출하고 즉시 석방하였다.

'정선생'은 이후 성산포에 주둔한 특별수사대 서북청년단의 성노리개가 되다시피 했다. 그녀는 자신을 가엾이 여기는 한 서북청년단원을 따라 제주 섬을 떠나 대구에 정착하였다. 

이 이야기의 당사자인 '홍아무개'는 인터뷰에 세 번 쯤 응했는데, 3차 인터뷰를 그의 직영 약국에서 했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지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1984년 당시에 약국을 운영하면서 지역 의사로도 활동하는 등 경제적으로 부를 누리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지역의 인사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데 스스로 희생한 전 약혼녀 '정선생'의 근황을 알고 있는 듯, 그녀에 대하여 혹시 소식을 아는지 물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불행하게 산다고 하더라”고 남의 말 하듯 심드렁하게 언급하였다.

Ⓑ '홍아무개'의 형도 '폭도'에게 동조했다는 죄목으로 특별수사대에 끌려가 즉결처분을 당해 성산포 터진목 모래밭에서 목숨을 잃었다.

'홍아무개' 형은 기혼자였으며 그의 딸이 열일곱인가 열여덟 살로 매우 미모가 빼어나고 조신하여 동네에서 '고운 비바리(처녀)'로 이름을 떨쳤다.

성산포 지서의 소장으로 와 있던 서북청년단원이 '홍아무개'의 조카딸을 탐내었다.

그 서청단원 소장은 '홍아무개'가 자신의 약혼녀를 성노리개의 제물로 바친 대가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풀려 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를 약점으로 잡고 다시 '홍아무개'를 잡아들였다. 그리고는 그에게 조카딸을 주면 목숨을 보장하겠다고 살려준다는 조건을 노골적으로 제시하였다. 

'홍아무개'는 자신이 죽으면 집안의 대가 끊어지니 제발 서청단원인 그 소장과 조카딸을 결혼 시켜 자신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문중에 호소하였다.

결국 '홍아무개'는 조카딸을 그 서청지서장과 정략결혼을 성사시켜 이후 비교적 토벌대와 특별중대나 특수대는 물론 경찰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카딸의 혼인 생활은 몹시 불행했다고 한다. 이는 다 바람이 전한 소문일 뿐, 두 여성의 생활을 직접 목격한 이는 없다고 했다. 

'홍아무개'는 그렇게 약혼녀와 조카딸을 서북청년단원들에게 성노예로 제공한 그 대가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약혼녀 ‘정선생’을 버리고 다른 여성과 혼인하였으며 슬하에 자녀를 두었다. 아울러 교직은 그만 두고 약학과 의술을 공부, 약사로서 의사로서 지역유지로서 부와 명예를 쌓으며 풍족한 삶을 살았다.

위 ‘이야기’를 제공한 이들은 많았다. 그들 중에는 토벌대로 왔다가 제주 섬에 눌러 앉아 제주도민이 된 이로 그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이도 있었다. 그들 그 누구도, 이야기의 당사자인 '홍아무개'조차도 두 여성의 이름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 공개된 성교 고문

성산포 창고 수용소에서 '특수부대'에 의해 행해진 또 다른 유형의 성고문도 알려야만 한다.

Ⓒ-1. ‘임무를 소홀히 한 죄’값으로 자행된 성고문 

'제주4.3사건' 당시 자진하여 무장대에 들어갔거나 혹은 토벌대가 두려워 '산'(어디에 숨었든 당시 체험자들은 이렇게 표현하였다)에 숨었거나 구분하지 않고 당국과 토벌대,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은 이들을 통칭하여 '빨갱이'로써 '산폭도(山暴徒)'라고 했으며 더러 점잖게 '입산자(入山子)'라고도 했다.

입산자의 아내에 대한 성폭력이 토벌대에 의해 비일비재 행해졌다.

성산면 관내 아무 마을 출신으로 경찰이었던 남편이 입산을 해버렸다. 당시에는 친구와 친족이 '빨갱이'로 지목되면 그 사람 또한 온전히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살아남을 길이 없게 되어 '죄도 없으면서' 입산한 경우가 많았다.

그 입산자 남편 친구인 경찰이 혹시라도 그 아내와 입산자 경찰이 내통할지도 몰라서 그 집을 감시하도록 배치되었다.

평소에 그 입산자 경찰의 아내를 좋아하던 그 감시자 경찰은 그녀를 몹시도 탐냈다. 그리고는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그 집을 드나들면서 물심양면으로 입산자 경찰 아내를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감시자 경찰과 입산자인 경찰의 아내가 그만 정을 통하고 말았다. 그 후 그 두 남녀는 남의 눈을 피해 성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졌다.

어느 깊은 밤이었다. 그들이 성관계를 맺으려던 순간 이미 그러한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해 있던 '서청'(서북청년단)들이 들이닥쳤다.

그 감시자 경찰에게는 맡은 바 임무를 소홀히 한 죄로, 그 입산자 경찰의 아내에게는 남편의 친구와 간통한 죄로 '서청'들은 그들을 벌거벗긴 채 끌어내어 성산포 특수부대(혹은 특수수사대)가 창고를 급히 개조한 수용소에 가뒀다. 그리고는 심심하면 그 수용소에 감금된 이들은 물론이고 모든 특별수사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강제 성교를 시켰다. 

만일 '서청'의 성교명령을 즉시 따르지 않을 경우 심한 채찍질을 하였다.

특수부대원들은 '쇠좆매'라는 특수 제작한 채찍으로 두 남녀의 맨몸뚱이 아무데나 후려 갈겼다. 그 채찍은 단 한 번 휘둘러도 매 자국에서 살점이 튈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였다. 

그 두 남녀는 '쇠좆매'를 견디지 못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들은 '쇠좆매'채찍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죽여주는 그런 자비를 베풀어 달라니,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반드시 자신들이 요구할 때마다 성교를 하지 않으면 그 채찍질을 언제든지 하겠다고 했고 그대로 실행하였다.

죽지 못할 바에는 그 채찍질을 피해 보자고 그 감시자 경찰이 성관계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서청'들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서 온갖 추잡한 전희를 하게 했으며 성교가 끝나면 또 후희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그 '쇠좆매' 고문을 당해본 제주사람들이거나 그 고문기구를 알고 있는 경찰들 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매질 고문일거라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하였다.

Ⓒ-2. 장난질하듯 자행된 성고문

그 '특수부대' 수용소에서는 여성을 상대로 온갖 성고문을 다 해대었다.  나이 불문하고 무슨 놀이를 하듯 여성들을 홀딱 벗겨 양손은 뒤로 묶고 두 다리는 쫙 벌어지게 각각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성기에 온갖 장난질을 다 해대었다. 

그 여성이 괴로움에 신음을 하거나 몸을 비틀면 흥분해서 그런다면서 즉석에서 성교할 사람 나와서 '하라'고 했다. '서청'들은 정말로 바지를 내리고 성교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할 수 있는 온갖 성고문을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잡혀온 남성 중에 아무나 지목하여 그 여성과 성교를 하도록 명령하고 이에 따르지 않을 시 고문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구나 젊은 여성들에게는 저들이 지시한 대로 따르지 않을 시에 공개적으로 강간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그 부대원들은 심심하다면서 여성을 불러내어 옷을 벗기고는 성기에 고구마를 쑤셔 넣거나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뺏다하는가 하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짓거리를 했다. 그 대상은 처녀든 기혼자든 노인이든 심지어 임신부든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 수용된 여성들은 성고문으로 입은 성기의 상처가 썩어 냄새가 수용소에 진동하였다.

Ⓒ-3. 시아버지와 며느리에게 가해진 공개된 불륜조장 성교 고문

성산포에 주둔한 '특수부대' 수용소로 사용하는 건물은 본디 창고였다. 그 창고가 학교로도 사용할 만큼 참으로 넓었다. 그러나 칸이 질러지지 않은 그 곳이 미어질 정도로 여러 마을에서 사람들이 잡혀와 가득 갇혀 있어 남녀가 한데 뒤엉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불문곡직 잡혀온 사람들을 우선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봤다. 

잡혀온 주민들은 고문을 당한 후 쓰러져 누울 자리도 없었다. 이미 쓰러진 사람 위로 겹쳐 눕기 일쑤였다. 그러면 부대원들은 "저 빨갱이 새끼들이 잡혀 와서도 그 짓을 한다" 고 매도하며 때리고 짓밟았다.

그들의 고문 수법은 가지가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통비분자라며 '산폭도'와 내통한 정보를 캔다면서 친족관계에 있는 남녀를 불러내는 것도 그 수법 중의 하나였다. 불러낸 남녀들을 우선 구타를 한 다음에는 그들의 사회적 관계가 어떤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공개된 불륜을 강요하며 성교를 하라고 윽박질렀다. 

입산한 아들 때문에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이 잡혀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대원들이 그 두 사람을 불러내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에게 성교를 하라고 강요하였다. 옷을 다 벗기고 마주 포개어져 눕되 며느리를 위로 올라오게 하고는 시아버지의 성기를 애무하게 하는 등 별 오만 짓을 다 시켰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그만 넋이 빠지고 말았다. 

도저히 성교를 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인간이면 차마 시킬 수 없는 성적인 온갖 행위를 다하게 하면서 그 며느리의 국부를 담뱃불로 지져대었다. 
 
* 해산 직전의 임신부를 윤간한 후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며 자행된 ‘대살’

‘대리사살’의 유형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해산직전의 여성을 상대로 자행된 ‘대살’에 관한 증언도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짐승을 상대로도 해서는 안 될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러나 있었다. 

성산면 관내의 혼인지가 있는 유서 깊은 마을에서 '남편이 일본으로 도망쳐버린 죄'로 해산직전의 여성 정씨의 부인이 잡혀 왔다.

그녀는 금방 출산할 듯 진통 중에 있었는데 그들은 히히덕거리면서,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면서 그녀를 공개적으로 윤간하고 나서 배를 단검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다른 처형당한 이들과 함께 그녀와 배에서 쏟아진 태아를 성산포의 터진목에다 버렸다. 버릴 때까지도 그녀는 아직 목숨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성산포 학살터인 터진목에 버려진 살해된 시신들을 ‘토벌대’는 즉시 수습하지 못하게 하였다. 때문에  여름철에는 모래벌에 버려진 수많은 시신 사이로 보라색 ‘순비기 꽃’들이 피어나 썩어가는 시신 냄새를 더러 감춰 주었다고 했다. 

특수부대가 주둔한 성산포의 창고 수용소에서 있었던 성 고문에 대하여 지역 유지였던 고아무개를 비롯하여 대동청년단의 간부열혈단원이었던 서귀포의 강아무개 등 많은 이들이 목격한 바를 증언하였다.

그 중에서도 등사판사건으로 두 번에 걸쳐 수용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던 홍 아무개의 증언은 직접 자신이 수용된 상황에서 목격한 것들을 증언한 것들이어서 너무도 생생하였다.

* 성고문 기술자 일명 ‘정주임’ 정용철의 만행 

가장 보편적으로 증언하는 성고문을 집행한 자로 첫손을 꼽는 이가 ‘정주임’이라고 부르는 정용철이다.

1948년은 겨울이 유독 빨리 시작되었다고 한다. 덩달아 토벌이 절정에 이를 때였다. 제주여자중학교 학생 등 어린 여성들도 '맑스, 레닌을 읽은 죄'로 산속으로 숨을 수 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토벌대는 제주도민이 숨은 곳을 찾아내어서는 중산간 지대 드넓은 벌판에서 '토끼몰이'를 하는가 하면 '당국'은 '선무공작대'를 제주출신 저명인사들로 꾸려서 숨어있는 도민이 자수하도록 선무를 하기 시작하였다.

무장대도 악이 받혔는지 야밤을 틈타 대담하게 지서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지곤 하였다. 

제주시 인근의 바닷가 마을이면서도 중산촌으로 연이어져 '산'으로도 연결이 용이한 지리적 여건에 놓인 ‘성안’ 동쪽의 삼양동은 큰 마을이었다.

'제주4.3사건'이 터지고 토벌대들이 들이닥치자 삼양동 포구에서는 밤이면 일본이며 육지로 밀항하는 밀항선이 뜨는가 하면 그것도 여의치 않은 젊은이들은 중산촌 마을을 거쳐 '산속' 깊은 밀림으로 숨었다.

그런데 삼양동 입구에 있는 지서가 무장대의 습격을 당한 것이다. 그러자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들이 부임하고 경찰인력이 보강되었다. 

그 지서에 정주임이 부임했다. 정주임(정용철)은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간부였다. 그는 제주출신 경찰도 군인도 믿지 않았다. 다 '빨갱이 족속'들이라고 했다. 고문 도구들 중 '쇠좆매'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삼양지서 습격 사건 여파로 삼양동은 물론 주변 마을에서 가족 중에 남성이 사라진 집의 여성들을 다 지서로 잡아들였다.

정주임은 고문의 명수였다. 그는 잡혀온 사람끼리 자신의 명령에 따라 서로 고문하고 죽이도록 했다.

'쇠좆매'로는 주로 젊은 여성들을 발가벗기고 매질하였다. 또한 누가 보건 말건 어린 여성들을 공개적으로 강간하고는 옷을 다 벗긴 후 지서 망루에 올라가게 했다. 지서가 있는 곳은 소문난 '바람코지(곶)'였다. 한겨울에 벗은 몸으로 망루에 앉혀놓으니 몸이 새파랗게 얼어 픽픽 쓰러졌다. 기절을 해도 날이 밝기 전에는 절대로 망루 아래로 그 여성들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

날이 밝으면 자신이 강간하고 망루에 앉혀둔 여성들과 잡혀온 남성들 중에 수십 명을 손수 골라 대동청년단들을 동원하여 지서 바로 옆의 밭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꼭 제주청년들인 대동청년단들에게 죽창으로 그들을 찔러 죽이게 하고는 그 살육의 현장을 구경하며 즐겼다. 

죽창은 단번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자신이 강간한 여성들을 가리키며 다리를 쩍 벌려 성기에 죽창을 찔러 넣으라고도 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하루는 '산폭도' 아내라는 곱고 젊은 여성이 잡혀 왔는데 자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 여성을 상대로 온갖 추잡한 짓을 다하다가 그 여성의 질에다 수류탄을 집어넣고 안전핀 고리에 실을 묶어두고, '이제 가도 좋다. 뛰어 가라'고 했다. 그녀가 지서 밖을 나서서 막 한길에 닿을 즈음 정주임이 쥐고 있던 실타래의 실이 다 풀렸다. 뛰어가던 그 여성의 몸이 굉음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이가 되어 길바닥에 흩어졌다.

또한 남편이 '입산자'로 몰려 한 젊은 여성이 끌려왔다. 참으로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정주임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포착한 듯 눈을 빛내면서 대동청년단원 한 사람을 지목하여 그녀의 옷을 다 벗겨 나체로 그 앞에 세우라고 했다.

나체가 된 그 여성은 임신 중이었다. 정주임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 빨갱이 간나 새끼들이 붙어먹었구만 이?" 

정주임은 옆에 세워놓았던 총부리를 난로에 넣어 벌겋게 달궜다. 그리고는 그 여성을 발로 차 넘어뜨리고는 가랑이를 벌리더니 달군 총부리를 그 여성 성기에 찔러 넣었다. 그녀의 단말마 비명과 함께 살이 타는 냄새가 지서 안에 진동했다.

정주임의 특징은 남을 시켜 고문을 하던 자신이 직접 하던 가리지 않고 제주출신 경찰과 대동청년단은 마지막까지 지켜보게 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그 고문을 목숨이 아까워 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정주임은 대동청년단을 시켜 성고문으로 거의 죽은 그 여성을 지서 옆의 밭으로 끌고 가게 한 다음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였다.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던 그녀가 잠잠해지자 흙을 덮어 시체를 가리라고 했다. 대동청년단들이 삽질한 흙을 그녀 위로 던지자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몸을 꿈틀거렸다.

정주임은 삼양지서 뿐 아니라 성산포를 비롯하여 제주 섬의 남쪽 남원 어디 지서에서도 입산자 아내를 상대로 성고문을 즐겨 했다고 했다. 그가 무용담처럼 자신이 성고문 했던 여성들에 관해서 말하기를 무척 즐겼다. 

그 여성 중의 한 명이 바로 사례 앞에서 잠시 언급한 자신의 이름으로 당시 ‘당했노라’고 증언했던 부산에 사는 제주해녀할머니이다.

그녀는 인터뷰 당시 온몸이 퉁퉁 부어 거동이 불편할 지경으로 깊이 병들어 있었다. '제주4.3사건' 때 남편이 행방불명되자 지서에 끌려가 정주임이란 '서청'한테서 온갖 고문을 당한 후유증이라고 했다. 정주임은 고문이 끝나면 그녀를 쇠사슬로 묶어 결박하고는 지서 안에 장못을 박아 거기 걸어놔 거동을 거의 못하게 했다.

제주출신 경찰이 한밤중에 지서에 아무도 없자 사슬을 풀어줘 그날 밤 아들을 데리고 밤새 걸어 한라산을 넘고는 제주 산지항에 도착하여 부산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그 후로 고향 제주 섬에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죽어도 제주 섬 쪽으로 머리를 두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긋지긋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 제주섬의 아름다운 바닷가, 폭포는 집단 학살터

천지연 폭포 위에서 집단 사살한 사례도 간과할 수 없다. ‘제주4.3사건’을 수습하던 ‘당국’과 폭포가 해낸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대살을 알게 되고 나서는 그 폭포, 천지연폭포가 마냥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인터뷰 당시 50대 후반의 여성이 자신이 직접 목격한 바를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저-, 사람들이 팔랑팔랑 떨어지는 것이 꼭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디다.”

토벌작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라고도 하고 6.25한국전쟁 발발 직후라고도 했다.

‘보도연맹’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아내 부모형제 등 닥치는 대로 검거한 후 그 폭포 상단의 바위에 일렬로 세워놓고 처형을 했다고 했다.

현장에 강제 동원된 사람들을 도망가지 못하게 폭포 밑의 둥그런 공터에 밀어 넣었는데 그들이 그 학살현장을 본 것이라고 했다.

천지연의 하얗게 부서지는 물살과 함께, 그러나 너무나 선명하게 마치 꽃 이파리처럼 그렇게들 떨어지더란다. 그 때 죽은 이들은 누구일까? 그들의 혼은 지금 어디서 세상을 보고 있을까?

이미 언급한 바 성산포 터진목은 공식적인 집단 학살터이며 시체를 버리는 ‘쓰레기 장’이었다. 그 못지않게 증언자의 지목에 의하면 해수욕장으로 이제도 이름이 드높은 ‘함덕해수욕장’과 ‘표선해비치해수욕장’ 등이 대표적인 집단 학살터였다.

 6.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Red-Complex'로 인해 철저히 국가권력에 순응하도록 '제주4.3사건' 이후 70여 년 동안 길들여진 제주 섬 사회이다. 

정신적으로 극심한 trauma에 시달리고 육체는 병들었으면서도 침묵을 강요당해온 제주섬사람 사회가 인식하는 그 사건은 매우 단편적이고 모호하기 짝 없다.

위 사례 대부분을 증언한 남성들은 사건의 전말에 관해서는 '남의 말 하듯' 대충 하는 경향이 농후했지만 제주여성에게 가해진 ‘성 노예’ 다루듯 한 성고문과 같은 단편적이면서도 '충격적인 목격담'은 매우 선명하게 증언하였다. 

반면에 여성들이 증언한 대부분의 사례는, 잠수회(潛嫂會; 海女會) 및 부녀회(婦女會)에서 마을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는 화소가 주종을 이뤘다. 

*살아남으려 토벌대의 의식주를 책임져야 했던 마을사람들

예를 들면, 김녕리는 마을주민들이 결의하여 그 마을 및 인근에 주둔하는 군대와 토벌대에게 음식을 제공할 식당(식당이름까지 지었는데 '단영식당'이라고 했다)을 경영하기로 하였다.

마을주민이 마치 주민세를 내듯이 집집마다 쌀과 의복과 돈과 부식으로 쓸 소와 돼지 등 가축을 제공하였다. 그 외에도 부식을 조달하고자 제주도의 바닷가 마을에서는 잠수(제주해녀)의 조업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군대와 토벌대의 묵인 아래 잠수들은 순번제로 소라전복 등 해산물을 채취,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는데 철수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그물(그 당시는 그물을 짠 실이 목화 등 식물성 섬유였다)을 풀어 실을 만들어서 토벌대의 양말과 장갑도 짜 제공해야 했다. 

그들이 주둔하는 동안 민가를 수용하여 숙소로 쓰도록 제공하는 건 비일비재했다.

덕분에 이 마을은 인명 피해 등이 다른 마을에 비해 소수였다고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당시 제주 섬에서 여관 등 숙박시설을 경영하던 여성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경찰과 토벌대 간부 등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여 선무(宣撫)하는 것으로 마을의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애를 썼다. 또한 지혜롭게도 마을의 공공시설인 ‘공회당’(마을회관을 지역에 따라 이렇게 일컫기도 했다한다.) 등 공공시설을 ‘토벌대’의 주둔 사무처 등으로 사용하도록 하여 파괴 등의 피해를 줄이는데 한몫을 했다고 했다. 
 
* 사람은 짠 것을 섭취해야 ; 오줌허벅에 간장을 길어 산으로 나른 ‘어멍’들

가족 중에 누가 산으로 피신하였거나 항쟁에 가담하여 집을 떠난 이가 있는 이들이건 홀홀단신 ‘홀어멍’이건 가리지 않고 오줌허벅을 지고 들로 나서는 ‘어멍들’이 있었다.

허벅에 간장 등을 길어 등짐지고 밭에 밑거름을 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산'으로 날랐다. 은신한 이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의복과 소금, 간장 등 생존에 필요한 '짠 것' 즉 염분이었다.

오줌허벅(오줌을 항아리에 받아 발효시켜 만든 밑거름을 담아 나르는 허벅(jar))처럼 위장하여 간장을 져 나르다가 발각되어 토벌대에게 사살된 사례는 마을마다 몇 건씩은 다 있다. 

그렇게 죽은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증언자들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밤이면 '산'에 숨은 이들과 무장대가 식량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오므로 식량이 될만한 호박과 고구마 등을 담은 자루를 올레 어귀에 놔두어 간접적으로 먹을거리를 제공하였다. '산'에서 내려온 이에게 식량을 직접 제공하였다가는 당장 끌러가 문초를 당하고 학살당하기 일쑤였는데도 '그들을 굶게 놔둘 수 없어' 위험을 감수하였다고 했다.

당시 제주읍 지역 등 민관군경 토벌대와 항쟁세력으로부터 격리되어 비교적 평온한 지역의 여성들은 소개되어 오는 중산간과 산간 지역 주민을 위하여 잠자리를 제공하고 식량을 나누는 등 선의의 실천을 하였다고 했다. 

7. ‘제주4․3사건’ 후 제주여성사회는 섬 공동체 복구에 나서다. 

‘제주4․3사건’기간에 제주도민의 인명손실이 엄청났다는 것은 최근 들어 많이 밝혀졌다. 목숨을 잃은 이가 신고한 이만 3만 여명이다. 그러나 신고하지 않은 경우와 제주 섬을 떠나 미국, 일본, 중국, 육지부(한반도를 제주 섬에서 일컫는 명칭)로 밀항하거나 합법적으로 이민한 수는 아예 집계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다.

남성사회의 인명피해는 막심하였다. 어떤 마을에는 성인 남성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표선면 신흥리 같은 마을에서는 이웃마을에서 마을 이장을 맡아줄 남성을 빌어야겠다고 여성들이 회의를 하여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막심한 피해를 입은 제주사회는 피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할 수 있는 것부터 복구를 당장 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할 만치 파괴된 때문이었다.

여성들은 이 기간에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힘을 모아 난관을 이겨나갔다.

① 마을재건에 앞장섰다.

가족 중에 살아남은 가족구성원이 전혀 없이 몰살당한 경우도 많았다. 

살아남은 주민 대다수는 중산촌마을에서 바닷가마을로 소개되어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로 대개가 부녀자와 어린이들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통제가 해제된 옛 마을터로 돌아와 불타버린 집터에 집을 다시 짓고, 폐허로 나뒹구는 밭을 다시 일구고, 바다에 나가 다시 물질을 하였다. 해제구역에 임시집단거주지를 건설하도록 ‘당국’이 일정한 터를 지정하였는데 그 몫도 여성들이 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건설했던 곳이 지금 대기고등학교가 들어선 제주시 용강동의 ‘함명리’였다. 그 수용소나 다름없는 집단거주지 이름은 당시 주둔군 사령관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했다.  

② 기반시설 등 인프라구축을 먼저 서둘렀다.

폐쇄 되었던 도로가 해제되었지만 토벌대가 폭도들이 ‘산’에서 쉽게 내려오지 못하도록 일정구간을 파헤치거나 구덩이를 만들어 놨기 때문에 마을 안팎을 연결하는 길을 보수하는데 우선 노동력을 모았다.

‘당국’이 지시하는 대로 성을 쌓고 보초를 서는 일은 꼭 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역의 초등교육기관인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건물 등을 보수하고 모자란 교실을 신축하는 데 자금을 쾌척((快擲))하는 등 지역인프라 구축에 앞장섰다. 바닷가 마을은 공동미역물질을 하여 마을운영 기금과 학교재건 기금을 마련하였다.

중산촌 등 공동으로 운용할 자원이 없는 마을 여성들은 예전 마을 남성사회가 중심이 되어 일했던 ‘마을공동목장’을 복원하는 한편, 고구마 등 농작물을 공동사업으로 설정하여 판매하고, 띠로 ‘초석’(돗자리)를 짜 팔아서 기금을 마련하였다.  

③ 생활경제 및 노동력 공유로 삶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물론 사건이 있기 전에도 제주 섬 지역사회는 여성들에 의해 꾸려지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한 인적 기반이 피폐해진 섬을 복구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현실에 좌절하지 않도록 살아남은 여성들은 기존의 여성공동체를 적극적으로 복원하였다.

그 때 제주사회에 나타난 명언이 “살암시라. 살암시민 살아진다.(살아라. 살다보면 살아질 것이다.)” 였다.

1945년부터 특히 1948년 ‘제주4.3사건’을 치르면서 제주여성사회가 마을공동체를 위해 공공재산 개념으로 바다 등을 설정, 공동의 노동력을 투입, 고난을 극복한 사례로는

학교바당 (마을 잠수회가 주축이 되고 마을 청년회가 주관하여 마을바다 중에서 미역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구역을 설정, 공동채취한 후 학교육성회를 통하여 기부하는 형식으로 기금을 장기적이고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온평리 등 여러 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과 

반장통 (명예직이었던 이장이나 반장을 맡은 이는 업무수행에 드는 경비를 사재를 털어 부담하였으므로 이러한 직에 봉사한 이들은 밭이나 집 등 재산을 처분하는 일도 드물잖게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봉사직을 수행하려는 이가 드물었다. 이에 바다를 설정하고 공동물질을 통하여 기금을 조성, 업무수행을 원만히 하도록 배려하였다. 그 기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구획된 지역바다 이름을 ‘반장통’이라고 하였다.) 이다. 

이외에도 마을회관, 어촌계회관, 수산업협동조합건물 등을 지어 기부하였고 마을안길을 닦는 데도 앞장서 기금과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8. 덧붙여

제주여성의 ‘제주4.3사건’ 진행 시 당한 인권유린과 인권말살을 비롯하여 복구과정에서 한 역할과 사회구축, 복원 등에 대한 문헌기록은 찾기가 힘들었다. 

죽음의 피바다 한가운데에 나뒹구는 신세였으면서도 제주도 사회를 건져 올리려 혼신을 다한 당시 제주여성사회의 역할에 대한 조명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사례가 현재까지는 없다.

이는 이즈음 ‘제주4․3사건’이 국가적으로 규명되고 역사의 실체로 자리 매김 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러나 자신이 당한 모든 고난을 뒤로 한 체 제주섬공동체를 재구축하고 공공시설 건설 등을 위하여 제공한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하여 선연하게 기억될 만한 인적 물적증거(物的證據)가 많이 있었으며 아주 드물지만 그에 대하여 기억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는 그 때 국가권력과 공권력으로 무장하고 제주여성사회에 가했던 인권말살을 복원해 줘야 하지 않을까. 그 몫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일 수도 있음으로.<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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