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17) 《정본 백석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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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설움

저는 누나 두 명이 있는 외아들입니다. 아들이라는 이유로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온갖 특혜를 다 누렸습니다. 심지어 방청소나 설거지 같은 집안일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특혜를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특혜 속에서 쌓인 습관들은 저의 결혼생활을 무척 힘들게 했습니다. 제주도 유부남 가운데 아직도 집안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수도권에서는 일반적입니다. 육아와 가사에 소극적인 남자는 점점 천연기념물처럼 되고 있습니다. 명절 때나 휴일 날 가족들과 고향집에 가면 요즘도 방구석에 드러누워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지만, 곧 정신을 차립니다. 

한쪽에서 지나친 반사이익을 받는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한쪽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불이익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는 일이 없게 만드는 것은 어른이 반드시 챙겨야 할 일이지만, 이걸 놓치는 어른들이 꽤 많습니다. 한 중학생이 이런 사연을 이야기로 재구성했습니다. 

옛날에 어느 여자 아이가 엄마, 아빠, 남동생과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여자 아이와 남동생이 시장에 장을 보러 갔다. 엄마가 여자 아이에게 1만원을 주면서 쪽지에 적은 물건들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남매는 함께 시장에 갔다. 엄마가 사오라고 한 물건을 다 사니 4000원이 남았다. 누나는 남동생에게 사이좋게 2000원씩 나눠 쓰자고 제안했다. 남동생은 알았다고 대답했고, 각자 사고 싶은 물건을 골랐다. 누나는 1000원짜리 2개를 샀지만 남동생은 3000원짜리 물건을 들고 왔다. 누나는 1000원이 부족하니까 다른 걸로 사오라고 하자 남동생은 갑자기 화를 내며 뛰쳐나갔다. 여자 아이는 자기가 사고 싶어 했던 물건과 심부름한 물건을 들고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는 느닷없이 화를 냈다. 그 옆에서 남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다. 여자 아이는 재빠르게 상황 파악을 했다. 엄마는 누나가 그까짓 1000원을 양보 못하느냐며 구박했다. 한참 엄마에게 혼이 난 여자 아이는 남동생 옆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 어느 중학교 2학년 여학생 글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집안 분위기가 잘 그려지는 글입니다. 남자 아이는 가족 구성원의 성격, 특히 남존여비(男尊女卑)에 갇혀 있는 엄마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이용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는 남동생이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남동생이 차별의 공기를 악용할 수 있게 만든 분위기 그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청소년들과 글쓰기나 문학 수업을 하면서 자주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니 2018년에 일어나는 일이 맞아 싶을 정도로 의아할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제주도에서는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폭력과 차별, 특히 구조적인 폭력과 차별은 많은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고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묵은 때’와 같습니다. 이런 특혜와 반사이익을 아무런 의식 없이 누려오기만 했던 남자 아이들은 어쩌면 가장 큰 피해자인지 몰라요. 주변에 돌아다니는 남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세요. 절로 한숨이 나오지 않으세요?

‘백석 읽기 연습’을 제안합니다

촌에서 온 아이여 
촌에서 어젯밤에 승합자동차를 타고 온 아이여 
이렇게 추운데 웃동에 무슨 두룽이 같은 것을 하나 걸치고 아랫두리는 쪽 발가벗은 아이여  
뽈다구에는 징기징기 양광이를 그리고 머리칼이 놀한 아이여 
힘을 쓸랴고 벌써부터 두 다리가 푸둥푸둥하니 살이 찐 아이여 
너는 오늘 아츰 무엇에 놀라서 우는구나 
분명코 무슨 거즛되고 쓸데없는 것에 놀라서 
그것이 네 맑고 참된 마음에 분해서 우는구나
 - 《정본 백석 시집》, 「촌에서 온 아이」
백석 시인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서럽게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유심히 관찰해 보니 촌에서 온 아이 같았습니다. 맑고 참된 마음을 가진 아이가 거짓되고 쓸데없는 것에 놀라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본 백석 시인은 아이보다 더 분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확신에 찬 어조로 “너는 분명히 하눌[하늘]이 사랑하는 시인이나 농사꾼이 될 것이로다”(「촌에서 온 아이」 마지막 행)라고 예언합니다. 아니면 간절한 바람이거나 주문일지도 모르죠.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 시인은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년여 동안 문학 공부에 힘써 1930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나이 불과 19세. 최연소 당선이었습니다. 여기에 장학금까지 후원받은 백석 시인은 일본의 사립 명문 청산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동경외대와 쌍벽을 이루던 청산학원 영어영문학과엔 한국 학생이 들어가기 어렵다고 소문이 났었을 정도였죠.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역설적으로 조선 곳곳의 방언과 언어에 깊은 애정을 가졌고, 유년의 이야기를 놀랍게도 재창조했습니다. 백석 시인이 그려낸 유년의 지도에 거칠지만 여덟 개의 섬을 얹어 봅니다. 
 
1. 유년의 공간(「모닥불」, 「하답(夏沓)」, 「물닭의 소리」) 
2. 유년의 동물(「나와 지렝이」, 「오리 망아지 토끼」, 「호박꽃 초롱 서시(序詩)」) 
3. 유년의 장난(「고방」, 「여우난골족」)
4. 유년의 환상(「고야(古夜)」, 「가즈랑집」, 「탕약(湯藥)」)
5. 유년의 공포(「오금덩이라는 곳」, 「삼방(三防)」, 「외가집」)
6. 유년의 설움(「쓸쓸한 길」, 「여승(女僧)」, 「절망(絶望)」)
7. 유년의 그리움(「오리」,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동뇨부(童尿賦)」)
8. 유년의 푸근함(「선우사(膳友辭)」, 「개」, 「귀농(歸農)」)
어린 시절은 지나가면 그뿐이 아니라 어른이 되고 나서도 힘과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영원한 심장과 같습니다. 저에게 백석 시는 유년 시절 망가지고 다친 곳을 치유하는 마음의 병원입니다. 백석이 창조한 유년의 세계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어린 시절에 얻은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는 듯합니다. 

억울하고 서러운 학생의 이야기로 되돌아오겠습니다. 백석이 그려낸 억울한 어린이, 서러운 청소년 이야기도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집 앞에 세웠던 주홍칠 바랜 정문(旌門)집 아이는 열다섯에 늙은 말몰이꾼에게 팔려갔습니다.(「정문촌(旌門村)」)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 맞은 손에는 어린 것의 손을 끌고 가파른 언덕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는 여인은 무슨 애달픈 사연이 있는 걸까요?(「절망(絶望)」) 

평안도 산 깊은 금광에서 어린 달아이를 때려가며 옥수수를 팔던 여인은 끝끝내 도라지꽃이 피는 돌무덤에 자식을 묻고 말았습니다. (「여승」) 

그나마 돌무덤도 없어 거적때기에 대충 말려서 산비탈에 버려지는 아이는 어떻습니까? (「쓸쓸한 길」) 어디 서러운 아이들이 이들뿐이겠습니까? 백석은 몸을 좀 더 당겨 앉아 아이들의 서럽고 끔찍한 사연을 울면서 노래했습니다. 

물론 청소년들이 백석 시집을 읽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서울말이 아니라 평안도와 전국 방방곡곡의 방언의 벽을 넘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래도 ‘우리의 시를 한번 가져봐야 하지 않겠는가’하며 호소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는 우리의 삶과 언어와 시를 사랑했습니다. 

백석은 한국의 셰익스피어입니다. 30~50대 어머니들과 백석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0대에 우울증을 겪었던 분, 30대에 산후 우울증을 겪었던 분들이 백석 시집으로 헤어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이 기억납니다. 저는 ‘백석 시집 읽기 연습’을 해볼 것을 제안합니다. 10대에 읽고 20대에 읽고 30대에 읽고 10년마다 읽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백석 시인의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고 세심히 읽다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10년 아니 5년마다 찾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그렇게 백석 시인에 빠진 사람을 제가 한두 사람 본 줄 아십니까?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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