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임의 오름기행] 아파트 주민들과 함께 떠난 '물찻오름' 기행

 
▲ 장맛비로 만수 된 물찻오름 산정호수 입니다. 지난 7월 16일에 찍은 사진입니다.
ⓒ 김강임
 
닫힌 아파트 문화 열린 오름동우회

안타깝게도 이번 7월의 황금연휴는 전국에서 들려오는 장맛비 재난 소식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물난리를 맞은 수재민들의 안타까운 소식은 한 달 전부터 황금연휴 떠날 채비를 해 왔었던 내 마음까지 강타했던 것이다. 이때 움츠린 마음을 환하게 하는 희소식이 있었으니,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는 공지사항이었다.

사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겨우 1년 정도 되었다. 아파트 문화라는 게 한 지붕 밑에서 살면서도 주민들끼리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산다. 그렇다보니 주위에 누가 사는지조차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주민들과 끈이 되어준 것은 '아파트 오름 동우회'였다. 시간이 허락지 않아 동우회 회원들과 자주 오름기행을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동우회는 닫혀진 아파트 문을 열게 하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지난 7월 16일 오전 8시 30분, 아파트 정문에는 낯익은 20여명의 동우회 회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말문을 트는 사람은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눈인사만 나누는 7층의 아줌마, 아저씨이시다. 그리고 늘 말없이 오르미의 대장역할을 하시는 옆 동에 사시는 선생님이셨다.

"어머! 안녕하세요? 5층 아줌마! 오랜만이네요."
"아, 예! 안녕하세요?"
인사라는 것은 서로간 서먹서먹한 기분을 홀가분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나보다.

 
▲ 우중에 아파트 주민들과 함께 숲속을 5km이상 걸어서 다녀왔습니다. 숲속은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 김강임
 
장맛비 맞으며 떠나는 숲속기행

장맛비로 떠나지 못한 황금연휴의 기분을 확 풀어줄 수 있는 여행이 어디 있을까? 이때 선택한 곳이 산정호수로 유명한 물찻오름이다. 제주시에서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5·16도로는 안개가 자욱했다. 남쪽으로 남하하던 장맛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 물찻오름 기행은 10 km 이상을 걸어야 합니다."

늘 자동차만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걷는다는 것은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닐 테지만 10km 이상을 걷는다는 오름대장의 말에 누구도 태클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제주시 5·16도로에서 교래리로 접어들자 삼나무 길이 펼쳐졌다. 그곳에서부터 다시 오른쪽으로 접어들자 숲을 이룬 비포장도로가 끝없이 펼쳐졌다. 우리보다 숲속에 먼저 초대된 안개가 앞을 가린다. 후두둑후두둑 떨어지는 장맛비 소리는 끝없는 숲길처럼 끝이 없었다.

 
▲ 오름 표지석까지는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지만, 숲속을 걸어서 가는것도 의미있습니다.
ⓒ 김강임
 
20여 명의 아파트 주민들은 장맛비가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우비를 걸치지 않았다. 아니 숲이 있으니 우산이 필요치 않았다. 단풍나무와 꽝꽝나무, 참나무가 어우러진 숲속에서는 무성한 나뭇잎이 우산이 되어준다.

안개 속을 헤치며 걸어가는 사람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빼곡한 숲속을 지날 때면 숲 이야기를, 계곡을 건널 때면 계곡 이야기를, 그리고 세상 사는 이야기와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 삶은 고구마 같은 화산탄으로 돌탑을 쌓아 봅니다.
ⓒ 김강임
 
화산탄 밟으며 '산 수국'길 걷다

등산화는 빗물의 무게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때 마시는 커피의 쓴맛은 달콤하다 못해 꿀맛 같다. 2시간쯤 걸었을까? 4.7km 숲 끝에 세워진 물찻오름 표지석도 장맛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제일 먼저 앞서 가던 10층 아줌마는 삶은 고구마 같은 화산탄을 주워들더니 돌탑을 쌓는다. 아저씨도 화산탄을 주워들더니 돌탑의 빈틈을 채운다. 화산탄으로 쌓아올린 돌탑은 뜨거운 열기가 흐르는 것 같다.

처음으로 오름등반을 시도했다는 11층 아저씨는 숲의 정기를 받았는지 제일 걸음이 빠르다. 그렇다고 훌훌 먼저 앞장서지도 않는다. 언덕길에서 걸음이 더딘 사람은 손을 내밀어 이끌어 주기도 하고 배낭을 대신 짊어져주기도 한다. 삭막한 사람들이 아파트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는 훈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다.

 
▲ 7월의 물찻오름 등산로는 연보랏빛 산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더군요
ⓒ 김강임
 
화산탄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숲길에는 '산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연보랏빛 산 수국은 장맛비가 간지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한라산의 기생화산탄으로 벌겋게 달군 7월의 물찻오름은 지천이 산 수국으로 덮여 있었다. 우중에 그 꽃길을 걷는 재미, 연보랏빛 '산 수국' 물결이 가슴까지 물들였다.

 
▲ 한라산에서 자생한 조릿대가 물찻오름 등성이의 여백을 채워 줍니다.
ⓒ 김강임
 
산정호수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물찻오름 등성이에 서식하는 키 작은 조릿대는 자연림 속에서 여백을 채운다. 마치 누군가 구령을 붙인 것도 아닌데, 하나- 둘, 하나- 둘, 빗길에 발을 맞춰가는 사람들, 이때 만큼은 겸허해지는 순간이다.

 
▲ 자생하는 식물과 기생하는 식물이 함께 공존합니다.
ⓒ 김강임
 
자연은 사람의 마음을 겸허하게 움직이는 마법사일까? 사치를 한껏 부리고 싶었던 마음도 산속에 들어오면 순수해지니 말이다. 온갖 습지 식물들이 서로 몸을 기대어 자생하고 있는 모습, 기생하며 사는 식물, 인간이 사는 동네가 그렇듯이 오름 속 세상도 각양각색이다.

 
▲ 산정호수에는 물안개가 자욱합니다. 붕어, 개구리, 습지식물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 김강임
 
4.7km의 우중 숲 속 기행과 연계한 표고 717m의 물찻오름 정상. 그 산정호수에서 우리는 숨을 죽였다. 벌건 황토 빛 화산탄 끄트머리에는 굼부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굼부리에는 장맛비가 가득 고인 산정호수가 비경이었다.

1000m의 분화구 둘레는 물안개가 살포시 끼어 있었으니, 산정호수에서 어찌 시 한수에 빠져들지 않으랴! 산정호수에서 어찌 노래 한 곡조 불러보지 않으랴!

그래서 물찻오름을 검은 오름 혹은 '신령들이 사는 산'으로 불러왔단 말인가? 배를 띄워보기도 하고, 비단 옷자락을 태워보기도 하고, 피리를 불어주기도 한 물찻오름 산정호수. 아파트 사람들은 그 누구도 5km 정도의 하산을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 산정호수에서 '내 마음은 호수요' 시를 읊어 보세요.
ⓒ 김강임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 김동명의 '내 마음은 호수요' 중에서.

 
▲ 숲속 계곡에는 피서를 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합니다.
ⓒ 김강임
 
다시 걷는 2시간의 하산길. 우리들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물론 물찻오름은 자동차를 타고 표지석까지 가면 20분이면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걸어서 가는 오름기행은 물장구를 치는 계곡 속 소녀들의 모습과 장맛비에 소리 없이 이파리를 키워가는 숲 속 식물들, 나무가 어우러져 숲을 이루는 자연의 소리를 배낭 가득히 담아 올 수 있다. 또한 그 길은 도저히 혼자서는 걷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중에 아파트 주민들과 함께 떠난 오름기행은 한여름의 더위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