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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우리에겐 4.3의 정수를 길어 올릴 더 많은 이야기와 시간이 남아 있다. 사진은 올해 4.3미술제에서 등장한 아카이브 자료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박경훈 칼럼] 돌아보는 4.3미술, 보롬코지에서 싹튼 4.3미술제...여정은 끝나지 않아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유신독재의 정점이던 1978년 발표한,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 작가의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3년간 50편의 ‘4.3연작’을 완성했던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중략) 때로는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던 예술인들의 노력은 4.3이 단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4.3의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일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민과 함께 오래도록 4.3의 아픔을 기억하고 알려준 분들이 있었기에 4.3은 깨어났습니다. 
- 4.3 70주년 문재인 대통령 4.3 희생자 추념일 추념사 中
지난 4월 3일 4.3 70주년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여타의 국가추념식에서와는 사뭇 달리 역사적 상흔을 알리고 달래려 했던 예술, 즉 4.3 예술에 대해 언급했다. 물론 4.3 작가들을 다 언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작가들을 호명함으로써 빨갱이 환쟁이, 빨갱이 작가들로 불리면서도 아픈 역사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했던 시간, 지난한 역할들을 수행했던 4.3 예술가들의 가치를 셈해준 셈이다.

필자는 오래전에 발표한 어느 글에서 4.3미술을 역사 미술로 규정한 적이 있다. 또한 그 역사 미술로서의 4.3 미술은 ‘후대들이 선대가 겪어낸 역사적 사건 내에서 해결 또는 종결되지 못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에너지로 활용하고자 당대적 인식에 의한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러한 역사 미술로서 4.3미술에 대한 규정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덧붙일 것은 기억투쟁의 ‘장기지속적 과정’이라는 부가적인 개념규정이다. 매년 행해지는 집안의 제사처럼 4.3추념식이나 해원상생굿이 그렇듯 망각을 거부하고 기억하기 위한 제주 현대사의 기억 투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4.3이 단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려 주었습니다”라고 말한 바로 그 지점까지 4.3을 전승하고 전달하고자 했던 지난날 기억 투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4.3미술도 그 기원은 5.18에 있다. 아니 최현대사 치고 5.18의 자식이 아닌 것이 있을까? 5.18의 각성, 5.18의 진실을 마주한 세대 앞에서 그토록 견고했던 한국의 군사독재체제는 더 이상의 통제력을 상실한다. 소위 한국사회를 “진공청소”(한홍구 표현)한 무균실 같은 군부국가체제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당도했던 것이다. 그 모순의 결절점이 바로 광주였다. 1980년 5.18의 광주에서 7년 후 6.10의 서울로 가는 사이 5.18의 진실은 대한한국을 민주주의의 용광로로 만드는 진정한 원동력이었다. 1987년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으로 폭발한 대한민국은 결국 서울시청 앞을 가득 메운 100만 인파, 청년학생과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를 망라한 서울 시청 앞 광장의 6월 항쟁으로 또한 각 지역별로 분출했으며, 이 국민항쟁은 제한적인 군부독재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항쟁의 불완전성은 그로부터 다시 30년이 지난 2017년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촛불혁명으로 귀결된다. 

4.3미술의 자각은 바로 이 5.18이 가져온 민주주의에 대한 피와 열망에 젖줄을 대고 있다. 6.10항쟁의 결과 가장 활발하게 분출한 것은 문화예술계의 사회참여 인식의 개화와 창작 활동으로서의 참여였다. 그것이 민중미술, 민족예술 그 무엇으로 불리건 정치적 유화국면에서 폭발적으로 확장된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의 빅뱅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4.19와 함께 분출했던 4.3진상규명에 대한 요구는 5.16을 맞으면서 다시 재갈이 물리고 제주 바다의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다시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1989년 41주기 4.3추모제에서 1987년 6월항쟁의 에너지를 한껏 받은 최초의 4.3대중집회가 제주시민회관에서 열렸다. 제주에서 4.3의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는 시간이 문제였을 뿐 유예된 진실은 결국 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에 분출하는 민주화의 지각을 뚫고 올라온 것은 오랫동안 억압당해 온 4.3의 진실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미술에서 이러한 열기를 이어받은 것은 ‘그림패 보롬코지’라는 지역 미술운동 소그룹(문행섭, 박경훈, 김동수, 김수범, 부양식, 강태봉, 양은주, 허순보, 고혁진)이었다. 1987년 8월 창립 예행 겸 전국민중미술작품들을 한곳에 모은 전시가 제주시 투자신탁회관 전시실에서 열렸으나, 중앙을 벗어난 변방에서 탄압이 노골화되듯이 광주 작가 전정호·이상호 작가가 잡혀간다. 전시는 풍비박산 났다. 보롬코지 대표였던 문행섭은 경찰에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된다. 이후 보롬코지는 거의 와해되었으나, 그해 말 군복무를 끝낸 박경훈이 복귀·합류하면서 창립을 준비한다. 보롬코지는 이듬해 1989년 4월 3일 최초로 가톨릭회관 전시실에서 <4월 미술제>를 개최하는데 4.3미술 작품들은 이 때 비로소 선보이게 된다. 이 전시는 그림패 보롬코지가 중심이 되고 당시 제주대의 판화동아리였던 ‘칼그림패 거욱대’ 등이 참여하여 이루어진 전시였다. 이 전시가 끝나고 그림패 보롬코지는 당시의 작품들을 모아 서울 인사동의 ‘그림마당 민’에서 <4.3 넋살림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 전시는 당시 도외 지역에서 최초로 이뤄진 4.3미술 전시였다. 보롬코지는 지역 미술운동단체로서 각종 지역 운동과 결합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간다.

1991년 들어 성장기 이후 대학 진학과 함께 제주를 떠나 20여 년간 서울에서 활동했던 강요배는 일찍부터 1980년대 미술운동의 이론가로, 빼어난 작가로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1990년 4.3의 전 과정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50점으로 이루어진 대작 전시, <동백꽃 지다-제주민중항쟁사>전을 개최한다. 이는 4.3 사건 전개에 따른 사실적 재현을 통한 형상화 작업으로 4.3의 실체를 그 어떤 이론적 설명보다 압축하여 한 번에 보여주며 회화의 힘을 각인시킨 획기적인 작품들이었다. 3년에 걸쳐 이루어진 이 작업은 소묘와 회화가 어우러진 4.3 역사 미술 작품으로 그동안 말로만 전해 듣던 4.3의 구체적 형상들을 활동사진처럼 생생하게 전달해준 그의 그림들은, 당시까지 4.3에 대해 단편적으로 전해 듣던 유족이나 도민 또는 타 지역의 국민들에게 역사의 망치 같은 역할을 한다. 유려한 그의 붓질과 섬세한 시선으로 읽어낸 그의 화면들은 한 작가의 예술적 성공만이 아니라 4.3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구체적인 충격과 감동으로 몰아넣어 4.3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강요배의 귀향은 4.3미술의 개화에 큰 동력으로 작용한다. 1993년 9월 소집단으로 활동하던 그림패 보롬코지 멤버들과 강요배 화백, 그동안 보롬코지의 활동에 우호적이었던 오석훈, 고원종, 고길천 등 선배그룹과 창립에 공감하는 후배들이 참여하여 ‘탐라미술인협의회(탐미협)’을 창립한다. 탐미협은 또한 이듬해 2월에 창립하는 제주민예총의 중추적인 장르분과 역할을 한다. 탐미협은 창립과 동시에 이듬해 4월 제1회 4.3미술제를 개최한다. ‘닫힌 마음을 열며’라는 타이틀을 건 전시였다. 이는 그동안 금기시 되어온 4.3에 대한 형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멤버들의 각오를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며, 지난한 4.3미술제의 문을 열어젖힌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탐미협 작가뿐 아니라 지역작가들까지 포함한 모두 42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이 전시는 개막식날 전시공간을 대관해준 문예회관 측에서 특정작가의 작품을 철거하라고 요구하여 항의하는 소동이 있었지만 많은 시민의 관심 속에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이제 4.3은 더 이상 금기의 무엇이 아님을 확인하고 선언한 전시였다. 

창립 초기 3회전까지는 탐미협뿐만 아니라 비회원들도 함께 참여했으나, 점차 탐미협회원들만의 전시로 참여범위가 좁아지고 매년 현장답사와 토론을 통해 그해의 상황에 맞는 테마전으로 기획되어졌다. 그리고 20회 전시를 마치면서 전문 기획자를 내세우고 또한 탐미협을 넘어 비회원 및 타 지역, 타 국가의 작가들까지 참여하는 전시로 그 범위를 확대했다. 4.3에서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으로까지 시야를 넓히기로 한 것이다. 21회 전시에서 올해 70주년을 맞는 24회전까지 누군가의 표현처럼 “마치 때가 되면 올리는 제사”처럼, 4.3미술제는 치러지고 있다. 어느 평론가는 이러한 탐미협의 행로를 ‘기이한 풍경’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된 제의적 미술행위가 이토록 오래 이어지는 그 장기지속성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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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훈 화가·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하지만 4.3미술제는 여전히 여정 위에 있다.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4.3미술을 넘어, 다가올 망각의 시간을 관통하면서도 4.3의 기억을 새기고 그리는 지난한 노동은 여전히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에겐 4.3의 정수를 길어 올릴 더 많은 이야기와 시간이 남아 있다. 현기영 선생이 즐겨 인용하는 “아우슈비츠보다 더욱 무서운 일은 그것을 잊는다는 것이다”라는 경구는 4.3미술의 남은 시간과 할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 박경훈 화가·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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