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93) 게르트 레온하르트, 《신이 되려는 기술: 위기의 휴머니티》 전병근 역, 틔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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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되려는 기술》의 영문판의 표지 그림은 기술이 인간의 번영(행복)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게르트 레온하르트, 《신이 되려는 기술: 위기의 휴머니티》 전병근 역, 틔움, 2018.

‘GNR(Genetics, Nano technology, Robotics) 혁명’, 또는 ‘4차 산업혁명’. 이 외에도 ‘NRG’, ‘NBIC’, ‘GRIN’ 혁명 등 신기술이 일으킬 혁명적 변화를 부르는 용어는 다양하다. 과학과 기술 발전의 속도가 너무도 빨라서 이제는 이 변화에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너무 흔한 일이 되어 이상해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이머징 테크놀로지(emerging technology)라 부르는 이 신기술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지 저마다 의견은 다르지만, 적어도 과거의 변화 속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지난 몇 백 년의 변화보다도 앞으로의 몇 십 년의 변화가 더 클지도 모른다는 말도 허풍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기술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그 변화에 장밋빛 환상을 품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산업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의 일자리가 줄어들지 않겠냐는 우려도 많아진다. 신기술에 따른 우리 사회의 우려는 주로 산업과 경제적인 측면에 집중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기술은 경제만 바꾸어놓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기술은 사회의 전 영역을 바꾸어놓을 것이고 또 문화와 일상까지 바꾸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우리의 삶과 인간성에까지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이하게 될 기술의 변화는 공학자나 경제학자, 정책가, 기업가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래학자 게르트 레온하르트는 기술 혁명 시대에 인간적인 가치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한다. 《신이 되려는 기술》의 원제는 ‘기술 대 인간성(Technology vs. Humanity)’이다. 나는 미래학자들이 주로 신기술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마치 SF 소설과 구분되지 않는 방식으로 기술한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물론, 저자 역시 다른 미래학자들처럼 최신 기술의 동향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술이 집어삼킬 인간성의 문제에 더 집중한다.

저자 레온하르트는 인터넷 기업을 운영하기도 했던 경력이 있고 그토록 최신 기술에도 밝은데, 어떻게 그런 고민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기업가들이나 기술 애호가들은 대체로 상업적인 의도이든 그렇지 않든 기술의 미래에 낙관적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개인적 체험을 많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신학을 공부하던 때 알게 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또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힌트를 얻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는 인문학자가 아니라서 깊이 있게 철학을 개진하지는 않지만 인문학적 지식이 아닌 ‘인문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술공학의 시대에는 이른바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matics)이 강조된다. 막대한 돈이 학생들의 과학, 기술, 공학, 수학적 역량을 키우고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서 투자된다. 하지만 저자는 STEM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가 STEM에 대응하는 용어로 제시하는 것이 ‘CORE’라는 단어이다. CORE는 “창의성·연민(creativity ․ compassion), 독창성(originality), 상호성·책임성(reciprocity·responsibility), 공감(empathy)이라는 단어의 머릿글자를 딴 약어다.”(64쪽) 말하자면 CORE는 과학기술이 강조되는 시대에 위기에 놓인 인간적인 가치와 역량들을 표현하는 단어인 것이다. 저자는 STEM과 CORE 역량을 모두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또 다른 흥미로운 조어는 ‘안드로리즘(androrism)’이다. 이 단어에 대응하는 것은 ‘알고리즘(algorithm)’일 것이다. 알고리즘 대 안드로리즘은 저자가 기계와 인간, 또는 기술과 인간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계산하거나 측정하거나 알고리즘적으로 규정하거나 복제하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무엇이라는 뜻이다.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것은 수학적인 것이 아니다. 화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것도 아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말해지지 않는, 의식 아래의, 순식간의, 대상화할 수 없는 것들을 포함한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인데 나는 이런 특성을 안드로리즘(androrism)이라 부르고 싶다. 이것은 비생물적인 시스템이나 컴퓨터, 로봇에 비하면 서툴고 복잡하고 느리고 위험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리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들이다. 
- 《신이 되려는 기술》 62쪽
CORE라는 단어를 통해서 저자가 인간성의 고유한 본질과 특성을 어느 정도 규정하고 있지만, 이 대목에서는 인간성은 다분히 신비한 무엇으로 기술된다. 애초에 인간성이야말로 규정되거나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다. 우선, 그러한 인간관과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대 과학과 인문학은, 저자가 CORE라고 부른 인간의 고유한 특질과 역량 역시도 신비하거나 이해 불가능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의 동물적 차원에서 진화했거나 근거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또한 신비화된 인간관은 인간중심주의와 관련되어 또 다른 억압의 논리가 될 수도 있다. 

신기술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인간적 윤리와 책임이 감축되고 폐기되는 현상은 저자의 생각대로 우려할 만하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놀라운 사실은 기술 발전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분야에까지 침범할 것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은 바둑처럼 일정한 규칙에 근거한 두뇌 스포츠뿐만 아니라 회화나 작곡처럼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불렀던 창의적 예술까지 시도하고 있다. 지금은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언젠가는 평범한 인간이나 심지어는 예술가의 역량을 넘어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리고 감정 연구가 로봇공학에 결합되면 공감적인 로봇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새로운 과학기술의 편리성과 상업성에만 눈이 멀어서 윤리와 책임, 행복을 괄호 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기술 혁명을 앞둔 시대의 사유는 ‘기술 대 인간성’이라는 도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과학기술은 인간성과 대립하거나 인간성을 잠식시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과학기술은 인간과 인간성 자체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인간에 대한 관점과 철학을 처음부터 다시 사유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사유하는 학제간 담론을 일러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라고 부른다.)   

레온하르트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헬븐’이라 부르는 상황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헬븐(HellVen)은 지옥을 뜻하는 Hell과 천국을 뜻하는 Heaven의 조합어다.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우리 대신 일하면서 인간의 생계 노동을 없애주고 풍요로운 물질 경제를 약속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천국이거나 유토피아의 상상이다. 한편, 발전한 인공지능은 우리를 대신해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결정까지 도맡아 하면서 인간은 성가신 잉여적 존재로 밀려나고, 소수의 부자들만이 생명 연장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지옥이거나 디스토피아의 상상이다. 

기술 혁명이 도래할 이 시대, 지금, 우리는 저자의 말처럼 정말로 헬븐의 기로에 서 있다. 온갖 사물들이 인터넷에 연결되어 편리하게 사용할 수도 있지만, 데이터 감옥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사적 영역이 소멸될 수도 있다. SF 작가이자 미래학자인 아서 C. 클라크는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술과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의 마술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마술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쓰일 것인가 하는 질문 역시 근본적이다. 기술이 과연 인간 삶을 행복하게 해줄까? 이 책을 읽고서 결국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이다.

미래 사회의 행복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만약, 고도로 발전된 유전학, 로봇공학, 약리학, 나노기술이 행복 유전자를 조작하여 이른바 ‘무드 봇’이 등장해서 우리의 행복감을 즉각적으로 조절할 수도 있는 시대의 행복이라면? 그 행복은 가짜 행복, 쾌락의 추구에 불과할까? 저자는,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뒤따라오는 것이라는 빅터 프랭클의 말을 인용한다. 행복이 단지 쾌락의 추구나 경제적 풍요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수록 우리의 행복을 묻는 일은 더욱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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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대원 제주대 교수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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