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24) 《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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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내가 왜 해야 돼?

벽화 속에서 나비가
가만히 나뭇잎에 앉아 있다
다른 나비들도 제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 
모든 나비들이 제자리에서 
날아다닌다. 
- 한 중학생이 쓴 시 <벽화 속 나비>
지난주에 보여드린 중학생의 글 <벽화 속 나비>의 새로운 버전인 시(詩) 역시 매우 인상적입니다. 지난 번 <벽화 속 나비>는 벽화에 갇힌 슬픔이 느껴졌지만, 오늘의 <벽화 속 나비>는 어떤 감정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뭔가 편안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더욱 슬퍼졌습니다.

전체주의에 끌리는 대중들의 경향에 대해서 날카롭게 파헤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주권과 자유에 대해서 무척 불편해하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 때가 적지 않습니다. 공공도서관에서 인문학 수업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할 기회가 생기는데, 깜짝 놀랐던 반응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아이가 ‘자기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는지, ‘빌린 언어’에 편승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지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제 예상과 달리 빌린 언어를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응답이 그렇지 않은 바람보다 두 배는 더 많았습니다. 물론 이 리서치는 공식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표본도 많지 않기에 내세울 만한 근거는 될 수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째 충격적인 경험은 부모 강의에서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독서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개설된 ‘책 놀이 특강’에 참여한 어머니는 뭔가 불편한 듯한 표정을 하고 계시다가 결국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별 부담 없이 편안하게 강의를 듣다가 가고 싶었는데 이렇게 품이 많이 들면 부담스러운데요.”
그 어머니를 다음 수업 때부터 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공짜 점심은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믿기에 귀한 시간을 들이고 수업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항상 인문학 강의 프로그램을 설계해 왔습니다. ‘문학 강의’를 할 때는 선정 도서를 읽고 독후감이든 독서일기든 흔적을 남기길 권하고 수강생들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지며 머릿속을 헤집어 놓기 위해 집중합니다. 남의 돈을 받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남의 시간’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강생의 입장은 또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서귀포중앙도서관에서 개설된 ‘책 쓰기 프로그램’은 공고가 나간 당일 마감되었고, 탐라도서관에서 종료된 ‘문학 고전 산책’도 강의 첫날 2~30명 정도가 강의실에 가득 들어찼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수업이 진행되면서 반 이상이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시험 든 기분에 빠집니다. 수업을 열심히 준비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냥 수업에 앉아서 편안하게 두 시간 강의 듣고 가는 ‘설렁설렁한’ 프로그램을 설계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렇게 ‘간편한 길’은 저 스스로를 배신하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고집스럽게 ‘품이 많이 드는 강의’를 만듭니다. 

대중에게 경고를 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말했고, 맹자는 “사람은 스스로를 모욕한 뒤에야 남의 모욕을 받으며 가문은 스스로를 훼손한 뒤에야 남에 의해 훼손되며 국가는 스스로 무너진 뒤에야 남에게 멸망당한다”고 말했습니다. 《1984》를 보면 ‘빅 브라더(big brother)’라는 거대한 권력이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숨 막히는 사회를 만든다는 느낌을 주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대중의 동의’가 있지 않고서는 그런 정치가 실현될 수 없습니다. 왜 파스칼 같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권태를 그렇게 경계하고 두려워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혼신을 기울여야 할 상대는 눈에 보이는 거악(巨惡)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게으른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멋진 신세계》 시계가 째깍째깍

“벌써 일세기반 전에 실험이 행해졌었지. 아일랜드 전역에 걸쳐 네 시간 노동제를 실시했던 거야. 결과가 어땠는지 알겠나? 다만 불안과 소마(환각제) 소비량의 증가라는 결과가 따라왔었네. 단지 그것뿐이었지. 세 시간 반이나 늘어난 여가는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그 여가로부터 어떻게 하면 도피할 수 있을까 하는 강박관념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말았단 말일세.” 
- 《멋진 신세계》, 무스타파 총통
1932년에 발표된 《멋진 신세계》는 20세기에 쓰인 공상과학소설 중에서 가장 현실에 가깝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글쓴이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의 할아버지는 진화론으로 명성이 높은 토마스 헨리 헉슬리이며, 그의 형은 생물학자 출신 과학 작가 줄리언 헉슬리입니다. 글쓴이 헉슬리가 그려낸 미래의 사회가 과학기술적으로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습니다. 

헉슬리는 과학과 기술 외에도 신비주의와 종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번역된 종교·명상서 《영원의 철학》도 소개되었을 정도로 문학과 과학, 종교에 있어서 방대하고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줍니다. 글쓰기 자체도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무척 불친절한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헉슬리의 다른 작품들은 한국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멋진 신세계》는 서기 2540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모든 인간은 공장에서 계급에 따라 ‘대량생산’됩니다. 알파, 베타, 감마, 엡실론 계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알파 계급 내에서도 알파 플러스 계급, 알파 더블 플러스 계급 등 무서울 정도로 세분화됩니다. 대량생산되기에 ‘가족’의 의미는 사라지고, ‘어머니’나 ‘아버지’는 욕설처럼 모욕적인 ‘고어(古語)’로 취급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늙기 싫고, 비참해지기 싫고, 불편한 일 하기 싫은 인간의 말초적인 욕망이 모두 반영된 세계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슬픔에 빠져도 ‘소마’라는 알약을 삼키면 의식이 초기화되고,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괴로움을 느낄 필요도 없는 아주 간편한 사회죠. 하지만 ‘균열’처럼 돌연변이의 존재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생산 과정에서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최고 계급이지만 하위 계급의 신체구조를 가지게 된 ‘열등의 화신’ 버나드 마르크스와 너무나 지적이기 때문에 위험인물로 지정된 헤름홀츠 왓슨, 야만인 구역에서 어머니의 임신에 의해서 태어난 예외적인 ‘야만인’ 존. 야만인도 문명인도 아닌 존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법을 배울 리가 없기에 존에게 ‘창녀’ 취급을 받으며 버림받은 아름다운 제니나가 ‘멋진 신세계’를 소개합니다. 

《1984》가 정치적 전체주의를 그려냈다면, 《멋진 신세계》는 사회문화적 전체주의를 그려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소름이 돋았던 점은 ‘그들이 선택한 미래’였기 때문입니다. 문명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어머니의 임신’에 의해 태어난 야만인 존과 무스타파 총통의 대화에서는 ‘재투입’이라고 불리는 사이프러스 섬의 실험 이야기가 나옵니다. 2만2000명의 알파 집단을 선정해 사이프러스 섬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하고 모든 설비를 제공하였지만 반란과 내전이 일어나 1만9000명이 살해되었고 생존자들이 섬의 통치를 맡아달라고 세계 총통들에게 애원함으로써 ‘천부인권(天賦人權)’은 틀렸다는 사실이 작품 속에서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야만인 존이 소마를 공급받는 델카 계급 노동자들 앞에서 “그 무서운 것을 먹지 마십시오. 그것은 독입니다”라고 외쳤지만 델타 계급의 반발만 불러일으키고 말았죠. 

《멋진 신세계》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암울한 미래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것이 ‘자발적 선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미래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쥐어주는 뜻밖의 선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선택하고 있나요?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는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라는 시처럼, 거대한 뿌리에 기생하는 벌레처럼 미래야 어떻게 되건 말건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고 있진 않나요? 

마치 시한폭탄처럼 《멋진 신세계》의 시계가 째깍대고 우리는 폭발 시점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인 몇 가지 개선이 이루어진 것 빼고는 우리 사회에 활력이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너무 순종적이고 자포자기하며 자살률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헉슬리가 옳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싶지 않지만 지금으로선 도리가 없습니다. 헉슬리 자신도 《멋진 신세계》보다는 조금 더 희망적인 ‘제3의 사회’를 암시한 작품 《원숭이와 본질》을 1949년에 발표했지만 《멋진 신세계》만큼 감동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멋진 신세계》의 이야기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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