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난민신청자 예멘인 2박3일 동행취재…M씨 “한국법을 따르고 존중할겁니다” 

풍경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 탓일까. 같은 공간엔 역설적이게도 전혀 다른 삶이 있었다. 이곳에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머무르는 사람과 평화로운 휴가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

지난 22일 저녁 그의 집(?)을 찾았다. 난민 신청자인 예멘인 M씨(38)가 임시 거주하고 있는 텐트에 도착한 건 저녁 8시. 제주시 인근 어느 해수욕장 야영장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텐트가 M씨의 현재 거주지다. 

그는 자신의 텐트를 ‘홈(home)’이라 부른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그다. 씻는 것부터 용변을 해결하는 것까지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텐트에서라도 잠을 청할 수 있다는 건 다행이다.  

제주를 찾아온 예멘 난민 신청자들을 취재하면서 낯이 익게 된 M씨. 그에게 사전 동의를 구해 M씨가 머무는 텐트에서 2박3일을 함께 지내보기로 했다. 고향 땅을 도망쳐 나와야 하는 예멘인들의 사연과 그들의 일상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앗살라무 알라이쿰(안녕하세요)”
M씨가 텐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반갑게 인사한다.  

집은 습한 날씨 탓에 눅눅했다. 그래도 제법 튼튼했다. 텐트는 저녁부터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지만 멀쩡했다. 텐트를 비롯해 취사기구, 이불, 인스턴트식품 등 각종 생활용품은 페이스북에 있는 난민 구호 페이지에서 활동 중인 내·외국인들이 기부한 것들이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M씨는 길거리에서 노숙을 했을지도 모른다. 

M씨가 처음부터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예멘에 있을 때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그는 내셔널지오그래피 같은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2014년 어느 날 새벽, 마을 인근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집 유리창이 깨졌다.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됐다. 전쟁은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그때까지 집에 숨어 있기로 했다. 하지만 4년 가까이나 강제 징집을 피해 숨어야 했다.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합니다. 후티군(반정부군)은 닥치는 대로 돈을 요구했어요. 적게는 1000달러, 많게는 1만 달러. 예멘에서는 매우 큰 돈이에요. 결국 돈 없는 마을 친구들은 후티군이 돼 민간인을 죽였어요. 그렇다고 가족에게 총구를 겨눌 수 없잖아요. 어쩔 수 없이 이곳을 벗어나기로 했어요”

“옆 마을에는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어요. 후티가 남자 형제가 있는 집에 들이닥쳤어요. 형은 후티가 되기로 했고, 동생은 끝까지 거부했어요. 후티가 보는 앞에서 형은 동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어요”

M씨는 지난달 5일 고국을 탈출했다. 육상으로 이동할 수 없기 때문에 비행기를 탔다. 결혼 예물을 전부 팔고 2000달러 가까이를 지불해 수단-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를 거쳐 지난달 29일 제주에 입국했다. 한국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돈이 부족했다. 잔고가 줄수록 고민은 깊어졌다. 난민 신청을 한다고 하더라도 돈이 없어 외국인등록증을 받을 수 없었다.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13만원(자격변경 허가 수수료 10만원, 발급 수수료 3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난민 신청’만 해서는 법적으로 ‘난민 신청자’ 지위를 보장받을 수 없다. 다행히도 페이스북의 난민 구호 페이지 회원 중 한 명이 비용을 후원했다. 덕분에 지난 18일 난민 신청, 외국인등록증 발급을 신청했다. 내달 9일이면 등록증이 발급돼 난민 신청자로서 취업, 생계비 신청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M씨는 등록증 발급이 늦어 지난 14일, 18일에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열린 직업설명회에 참여하지 못했다. 출입국청은 추가로 직업설명회를 개최할 계획이 없다. 그는 알아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일자리 문제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함께 넘어온 친구 중 한 명은 출입국청에서 교육을 받고 식당에 취직을 했어요. 그런데 그곳은 돼지고기를 파는 곳이거든요. 3일도 못 버텨 일을 그만두게 됐어요”

M씨의 친구 A씨는 알라신을 믿는 무슬림이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런데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해 일을 시도해봤지만 견딜 수 없었다. A씨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짧게 나눌 얘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일단 눈을 붙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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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널브러진 텐트를 정리하고 있다.
“잘 잤어요?”

M씨가 웃으면서 아침인사를 했다. 그는 먼저 일어나 옷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간밤에 비가 세차게 내려 이불은 훨씬 눅눅해졌다. 모기, 맹꽁이 소리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우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전 8시 오름을 오르기로 했다. 야영장에는 수많은 텐트가 즐비했고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겼다.

M씨에겐 제주에 함께 입국한 5명의 친구가 있다. 처음엔 그들과 십시일반 돈을 모아 숙소를 잡았지만 돈이 다 떨어져 따로 텐트를 치게 됐다. 텐트에 머물게 된지 벌써 8일째. 언제까지고 이곳에만 살 수는 없었다. 그에게 야영은 여가가 아니라 생존이 달린 문제기 때문이다.

“텐트를 후원해주신 분께서 공짜로 머물 곳을 소개해줬어요. 지금 그곳에는 10명 정도가 살고 있다는데 오늘 오후에 방문해 집 주인과 만날 생각이에요. 너무 기뻐요”

오전부터 M씨는 싱글벙글이다. 이제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에서 씻을 수 있다. 또 눅진한 이불을 덮지 않아도 된다. 아침마다 옷에 묻은 모래를 털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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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씨가 제주시내 인근 오름 정상에서 마을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제주의소리
20분 쯤 오르니 벌써 오름 정상이다. 마을 풍경이 펼쳐졌다. M씨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감탄했다. 그리고 10분 동안 벤치에 앉아 넋을 놓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고향 땅에 남은 아내와 두 아이들이 눈에 선합니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이 풍경을 보고 있을 수 있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내전에 의한 강제 징집을 피해 혼자 도망 나온 게 마음에 걸렸는지 그는 숙인 고개를 저었다.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오려면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게다가 마을 경계마다 후티군이 지키고 있어 가족 단위로는 그곳을 몰래 통과할 수 없다. 노인, 여자, 아이는 징집 대상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총격전과 폭격에 노출돼 위험한 상황이다. M씨는 하루에 한 번 가족들과 통화를 하지만 죄책감에 항상 마음이 불편하다.

두 시간 쯤 걸었을까. 산책이 끝나고 M씨는 집에서 수건과 옷을 챙겼다. 씻을 곳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바닷물로 씻어요”라고 답했다. 그는 씻을 곳이 없어 바닷물로 샤워한다. “23일 여기 해수욕장이 조기개장 하면서 샤워실을 개방했어요. 더 이상 바닷물로 씻지 않아도 돼요”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알바생이 샤워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2000원을 내야 한다. 결국 발길을 돌려 바닷물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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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 탓일까. 같은 공간엔 역설적이게도 전혀 다른 삶이 있다. ⓒ제주의소리
산책도 했겠다, 수영도 했겠다, 슬슬 배가 고팠다.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스크램블 에그. 방울토마토도 간식으로 먹었다. M씨의 하루 식사는 오전 11시 스크램블, 오후 5시에도 스크램블, 간식으로 방울토마토 몇 개가 전부다. 저녁을 생략할 때도 있다. 식사 시간 마다 주변에서 풍겨오는 고기 냄새가 괴롭기만 하다. 

그렇지만 그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축에 속한다. 549명의 예멘인 중 당뇨에 걸려 인슐린에 의존하는 사람, 정신적 외상으로 죽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사람 등 지금 당장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마땅한 의료시설이 없어 말 그대로 ‘몸으로 때우고’ 있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도 갈 수 없다. 지난 4월 30일 법무당국이 예멘 난민 신청자에게 거주지 제한 조치를 취해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취업할 자격이 주어져도 취업을 할 수 없다. 

식사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낮잠을 자고나서 오후 늦게 아침에 언급했던 숙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잠에서 깬 시각은 오후 5시. 그는 들뜬 마음으로 나설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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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씨는 아무런 소득 없이 숙소를 빤히 바라봤다. 망연자실한 그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임시 숙소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다. 제주시 A동 근처 정류장에 내려 서쪽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었다. M씨는 일러준 주소 앞에 도착했다. 벨을 누르자 예멘인 1명이 그를 맞았다. 멀리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기대를 품고 숙소 안을 들어갔다. 그러나 M씨의 표정은 금세 굳었다. 놀랍게도 그곳엔 10명이 아니라 23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 주인은 난색을 표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10명 정도가 거주했는데 취업교육이 끝나고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친구들이 이곳을 다시 찾아왔어요. 원래 우리가 정한 인원은 20명인데 소문을 듣고 3명이 찾아오는 바람에 23명이 됐어요. 죄송해요. 더는 이곳에 머물 공간이...”

숙소 주소를 일러준 사람은 이렇게 사람이 많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집 주인이 그에게 1명 정도는 더 받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M씨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했다. 애써 태연한 척 숙소 밖을 나왔지만 애가 탔는지 골목에서 여남은 담배를 연거푸 태웠다. 계속 숙소 쪽을 쳐다봤다.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도착했을 땐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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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 순간 M씨에게 해지는 풍경이 아름답게만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지는 해 만큼 그의 어깨도 내려 앉아 있다. ⓒ제주의소리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해 질 녘 바다를 보면서 수심에 잠겼다. 한참을 M씨와 걸었다. 집에 도착하고 밤 9시가 돼서야 스크램블을 먹을 수 있었다. 평소엔 계란 3개를 넣지만 손님이라며 내겐 계란 4개를 풀었다. 함께 해줘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그는 내게 혹시나 머물 곳이 생기면 꼭 좀 말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M씨는 내일도 아침 일찍 한국인 친구를 만나 숙소를 알아본다. 눈을 붙이려던 찰나, 그는 뜬금없이 물었다.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무서워한다는데 정말인가요?”
“음 그러니까 그게...”

어려운 질문이었다. 난민 수용에 대한 갑론을박부터 외국인 범죄에 대한 우려까지 여러 쟁점을 기사를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제주지방경찰청이 집계한 2017년 제주도 외국인범죄 국적별 피의자 검거인원과 내국인 피의자 검거인원을 종합하면 제주도 내 범죄자 중 98.1%(3만2374명)이 한국인이다. 다음은 중국인 1.3%(436명), 베트남인 0.07%(26명), 미국인 0.05%(18명), 러시아 0.03%(12명) 순이다. 같은 방식으로 올들어 5월까지 집계한 제주도내 피의자 검거인원을 살펴보면 98.1%(1만2016명)이 한국인이고 다음 중국인 1.3%(167명) 베트남 0.1%(13명) 대만 0.08%(11명) 필리핀 0.04%(5명) 순이다. 현재까지 예멘인 범죄자는 없다.

“예멘인들이 그런 범죄를 저지른다면 여기에 거주하는 모든 예멘인이 욕을 먹어요. 전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의 법을 따르고 존중할 거에요”

M씨는 말을 하다말고 코를 골았다. 그렇게 두 번째 밤도 지났다. 

오전 7시, 그는 아침 일찍부터 나갈 채비를 했다. 나도 떠나야 했다. 서로 손을 꼭 잡고 고맙다며 악수했다. “‘너’와 ‘나’는 같은 말이다. 말이 오가는 방향만이 다른 것이다” 김훈의 문장이 떠올랐다. M씨는 과연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을까. 그는 섬 안에서 다시 표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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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씨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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