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입시의 도구로 전락한 10대들의 글쓰기. 결국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도,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없는 글쓰기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10대들의 진짜 글쓰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명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10대들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라.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펴낸 오승주 작가가 지난해 제주도내 중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했던 사례들을 접목시킨 귀 기울일만한 10대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싣는다.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연재다. 매주 1회, 총 30회 집필을 예정하고 있는 이 코너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의 글쓰기] (26) 《강철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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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고등학생 1학년이 ‘각성’에 도달하기까지

아무도 말 걸지 않았으면
모든 책임이 나에게 오지 않았으면
도서관에서 누가 떠들지 않았으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내가 몰랐으면
길가다 사람들이랑 눈 마주치지 않았으면
사회현상이나 사람들의 행위에 의문을
갖지 않았으면
모든 걸 때려 치고 침대에 누워 있었으면
집에 날아서 갈 수 있었으면
나의 소망이 이루어지면 편하고 가벼워질 수 있을까?
- 한 남자 고등학생의 시 <편한/가벼운 감정>
저도 고등학교 남학생 신분을 통과했지만 한 동안 남자 고등학생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입 논술을 가르치며 첨삭할 때 가장 힘들었던 건 남학생의 글이었습니다. 마치 자동기계처럼 낱말의 순서만 빼놓고 거의 같은 내용이었던 수백 수천 장의 논술문에 저 역시 자동기계처럼 빨간 색 펜을 휘둘렀습니다. 100장의 논술문 첨삭이 너무 빨리 끝나서 저는 첨삭료와 시간을 두둑이 챙겼지만 그건 독이 든 잔이었습니다. 

여자 고등학생까지는 어렵잖게 만났지만 남자 고등학생은 수업이 만들어져도 번번이 깨지면서 대화가 단절되었습니다. 제가 뜻 밖에 고등학교 남학생을 만난 것은 우연히 서귀포의 도서관에서 열린 청소년 인문학 수업 안내문을 한 고등학생이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서귀포의 고등학생 한 명이 친구들과 후배들을 한가득 끌고 와서 간만에 남학생들이 북적대는 수업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비현실적이었던 첫 수업을 잊을 수 없습니다. 감정카드 한 장을 아무거나 뽑아서 그 감정에 대해서 짧게 글을 남기게 했습니다. 이 활동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것은 저의 실수였습니다. 함께 수업을 듣던 초등학교 여학생과 중학교 남학생은 감정을 느꼈던 경험에 대해서 썼지만, 까맣게 자리를 채워 앉았던 고등학교 남학생들은 하나같이 해당 감정의 사전적 의미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 감정을 설명하라는 요구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감정이 담긴 경험을 써달라고 다시 요청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 설명을 듣고도 남학생들은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감정 쓰기는 짧은 시 쓰기에 비할 것이 못 되었습니다. 마치 시를 생전 처음 써본 표정들이었습니다. 정확히 답을 선택할 수 있는 시에만 익숙하다가 자기 가슴으로부터 시를 내려니 힘겨웠던 모양입니다. 마치 ‘이런 시’와 ‘저런 시’가 남북한처럼 분단돼 버렸다는 생각에 애처로웠습니다. 다음 수업에 다시 만났을 때 1학년 남학생들은 거의 전멸했습니다. 한 사람만 빼고. 

남은 학생에게 친구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PC방으로 갔다고 솔직히 대답하더군요. ‘너는 왜 PC방으로 가지 않고 이 수업을 듣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게 더 재미있다고 합니다. 간만에 같은 ‘종족’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가방에서 논어 책을 꺼내서 보여주었습니다. 할아버지께 논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대화를 나누다 ‘미투 운동’이 화제로 떠오르자 학생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2차 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굉장히 복잡해 보였습니다. 피해자가 처신을 잘 못해서 성범죄가 난다는 말을 꺼냈지만 그건 그 학생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어디서 들은 것을 옮긴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여러 개의 질문으로 학생의 고정관념에 구멍을 냈습니다. 수업을 거듭할수록 학생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은 수업이 끝날 즈음 상담을 해줄 수 있느냐고 쑥스럽게 묻더군요.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감정이 이성을 압도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거꾸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생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에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대학생 때 했던 고민을 이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하고 있으니 은근히 질투도 났습니다. 저는 기꺼이 감정의 우위를 증명했습니다. 감정을 상징하는 심장이 죽으면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르지만, 이성을 상징하는 ‘뇌’가 죽으면 ‘뇌사’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성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성에게 감정을 내몰 정도의 권력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학생의 얼굴에서 태풍이 하나 지나갔습니다. 이 학생은 철학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 온 시간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고 전쟁 같은 자기 투쟁을 뚫고 나온다면 《강철군화》의 영웅 어니스트 에버하드가 될 것입니다. 

삼성전자와 도쿄전력, 이스라엘의 ‘강철군화’를 제어할 수 있을까?

《강철군화》는 앞서 소개한 《1984》, 《멋진 신세계》, 《우리들》과 함께 ‘미래 시리즈 4부작’으로 묶을 수 있는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대개는 앞선 세 작품을 ‘디스토피아 3부작’이라고 부르지만 《강철군화》를 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강철군화》는 네 작품 중에서 시기가 가장 이릅니다. 1908년에 출간되었죠. 저자인 ‘잭 런던’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습니다. 사회노동당에 입당하고 뒤늦게 대학 공부를 하고 나서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생활》은 잭 런던의 《밑바닥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죠. 잭 런던은 출판사로부터 수백 번 퇴짜를 맞으면서도 에세이와 시, 소설을 계속 써 나가다가 《야성이 부르는 소리》(1903)가 큰 인기를 끌면서 작가로서 자리를 잡습니다. 허스트 신문 신디케이트 소속 러일전쟁 특파원으로 일본과 조선을 방문해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를 남긴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해서 잭 런던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세심히 관찰했다는 기대는 접기 바랍니다. 철저히 서구인의 시각으로 당시의 ‘미개한 민족’을 스케치하듯 훑어냈을 뿐이니까요. 조선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습니다. 

《강철군화》의 소설 형식은 독특합니다. 서기 27세기 통일된 사회민주주의의 문헌학자 앤서니 메러디스가 에이비스 원고를 공개하는 형식의 서문이 흥미롭습니다. 서문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서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뜻이 짐작이 가죠. 서문의 작성 시기인 B.O.M 419년은 인류형제애 시대(the Brotherhood of Man)의 서력기원을 뜻하며 강철군화, 즉 과두제(寡頭制)가 멸망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권력 쟁취에 성공한 시점을 서력 기원으로 삼은 것이니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B.C.나 A.D.를 대신하는 용어인 셈입니다. 역사적으로 평가가 다 끝났지만 강철군화 세력과 힘겹게 투쟁을 하던 당대의 한가운데를 살았던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아내이자 혁명 동지인 에이비스 에버하드가 1인칭 화자이자 기록자입니다. 서문의 작성자인 문헌학자 앤서니 메러디스는 원고의 주인인 에이비스가 ‘사건’에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조망하지 못한 점과, 남편인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업적과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서술한다는 점에 대해서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며 주의해서 읽을 것을 요청하기까지 합니다. 소설이 끝나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그 과업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다음을 고려해야”로 끝나며 문장이 매듭 되지 않고 있습니다. 작가는 각주를 통해 용병들이 기습 침투하는 급박한 상황이 있었을 거라고 추론합니다. 어쨌든 에이비스는 원고를 참나무 안에 감췄고 700년이 지나고 나서야 발굴이 되었다는 후문을 전하였습니다. 

《강철군화》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던 1989년에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습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사회과학서적들이 홍수를 이루던 시기였습니다. ‘소설 자본론’이라든지 ‘소설로 배우는 정치경제학 교과서’의 애칭을 얻으며 큰 사랑을 받았고, 최근 ‘잭 런던 걸작선’이 소개되며 그의 작품세계를 깊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철군화》는 지금으로부터 6세기 후인 27세기를 다루고 있지만 미래에 어떤 정치가 인간에게 고통을 줄 것인지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든다면 ‘귀족노조’ 문제와 ‘삼성공화국’ 문제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조합들은 짓밟아 씨를 말릴 거예요, 모두 다요. 당신도 알다시피, 철도 노동자, 기계공과 기사, 강철 노동자가 우리의 기계문명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을 하고 있어요. 그들의 충성만 확보하면 나머지 노동자들에 대해선 강철군화가 무시해도 돼요. 강철, 철강, 석탄, 기계, 운송이 전체 산업의 등뼈를 이루니까요.” 
- 《강철군화》 본문
하지만 과두제와 민중의 힘을 과소평가한 점은 잭 런던의 한계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자이면서 대중소설로 성공한 이율배반적인 전력은 작품세계를 선명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강철군화》 출간을 기점으로 잭 런던의 열정은 급격히 퇴보하고 맙니다.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에는 잭 런던의 이런 한계가 뚜렷이 보입니다. 소설의 후반부인 ‘시카고 코뮌’에서는 분노하는 민중을 향해 ‘인간 폐물들이자, 날뛰고, 절규하고 악을 써대는 미치광이 무리’라고 묘사하죠.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이 오버랩됩니다. 어쨌든 소설 속에서 시카고 민중들은 모조리 학살당했고, 도시 재건을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새로 징집된 노예들로 채워집니다. 이에 반해 조지 오웰은 식민지 버마 민중들의 열정적인 저항운동에 작가적 양심으로 응답해 제국주의 경찰 노릇을 단호히 접었고, 민중들에 대해서 무한한 애정을 나타냈습니다. 주인공 어니스트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여러분은 현실의 단단한 땅을 떠나 비행선에 말[言]을 태우고 공중에 떠 있습니다”라고 비판했지만, 정작 땅을 밟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은 잭 런던 자신이었습니다. 

잭 런던은 사회발전과정에서 사회주의가 승리를 거두고 ‘강철군화’로 표현되는 ‘과두제’(oligarchy)를 역사의 과도기로 설정했습니다. 때문에 이 책은 과두제를 무너뜨리는 ‘사회민주주의 정치매뉴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과두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바람에 과두제가 생각보다 오랫동안 과도기를 누렸다는 인식은 비판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과두제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시의 세계 정치 형태를 분석하면서 도출한 개념으로서,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자유민이 최고 권력을 가지면 민주정체고, 부자들이 최고 권력을 가지면 과두정체라고 해야 할 것”(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이며, 만약 민주정체가 과두정체로부터 승리를 하려면 사회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산층이 매우 두텁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강철군화는 오늘날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정치, 경제, 언론의 리더들이 한 대기업 임원에게 듣기도 민망한 문자를 보냈던 내역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삼성 장충기 문자’ 사건을 보십시오. 일본에서 지진으로 인해 원전사고가 났을 때 사건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던 ‘도쿄전력’이 국민적 분노를 요리조리 피해갈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을 공식 인정했던 사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사건들은 전 세계를 강철군화가 접수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잭 런던의 소설처럼 300년이 지나면 기세등등한 강철군화 권력이 무너질 수 있을까요? 저는 오히려 더 공고해지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위에 소개한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의 시처럼 사회정의 따위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개인의 성공이나 각개약진만 강조할 뿐 ‘사회’에 대해서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진실을 모르거나, 그 위험성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죠. 99.9%의 어른들이 사실상 ‘자포자기’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자포자기 바이러스가 청소년들에게 옮겨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의 각성이 눈물 나도록 고맙습니다. 만약 10대들이 ‘사회’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면 《강철군화》의 이야기가 마냥 꿈처럼 허황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  필자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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