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99) 지그문트 바우만, 권태우·조형준 역, 《리퀴드 러브》, 새물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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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그문트 바우만, 권태우·조형준 역, 《리퀴드 러브》, 새물결, 2013. 출처=알라딘.

이즈음, 며칠 간 뉴스를 통해 들려온 시위와 집회 소식은 우리 사회의 달라진 의제들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두 항공사 경영진의 갑질을 따져 묻는 시위가 있었고, 여성에 억압적인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페미니스트들의 시위가 있었고, 성소수자들의 축제인 퀴어페스티벌이 열렸다. 한편에서는 내년도 최저임금을 두고 논란이 많다. 저마다 우리 사회의 병폐나 취약한 부분이 광장에 드러난 일들이었다. 주장과 반박들이 서로 부딪치며 또 다른 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많은 주장들의 세목들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참으로 다양한 목소리들이 광장에 동시에 울려 퍼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지난 두 정권 시기에 우리가 무엇을 고민했던가를 떠올려 보자. 새삼 지금 한국 사회의 역동성과 다양성에 안도 아닌 안도를 하게 된다. 게다가 지금 광장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들은 지난 시절에는 묻혔거나 그럴듯한 사회적 의제조차 되지도 못했던, 소수자와 약자의 것들이 많다.

물론 이 상황을 그저 우리 사회의 진보로 보는 관점은 아마도 지나치게 안일하고 섣부른 것이겠다. 복잡한 문제들이 얽히고설킨 현대 사회를 바라볼 눈이 그래서 필요한 걸까. 만약 여전히 살아 있다면 물어보고 싶은 이가 있다. 그는 바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2017년에 타계한 바우만은, 이렇게 세상물정에 어두운 문학도에게도 약간의 빛을 던져주곤 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마법사 간달프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의 노학자였던 그가 살아있다면 현자처럼 친절하게 답해줄 것만 같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성(modernity)의 끈질긴 탐구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시기(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혹은 소비자본주의 시기)를 일러 ‘리퀴드 모던(liquid modern)’ 즉, 액체 근대 또는 유동적 현대라고 불렀다. 거칠게 말하자면, 예측 가능했던 고체적·안정적 현대 시기가 지나가고 예측 불가능하며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현대가 도래했다는 것. ‘리퀴드’란 수식어는 말 그대로 번역어를 고정하기가 어려운데,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현대 사회의 위험과 불안을, 혹자들에게는 유연성과 변화와 같은 기회를 설명해줄 수 있는, 흥미로운 비유의 용어이다. 

수년 간, 국내에도 바우만의 저서들은 그의 인기를 입증하듯이 경쟁적으로 우후죽순 번역되었다. 그 책들에는 《액체 근대》, 《유동하는 공포》, 《리퀴드 러브》처럼 그의 이른바 ‘액체 근대’ 연작들도 포함된다. 액체 근대론의 이론적 타당성과 무관하게 상당히 많은 한국 독자들이 유동적 현대에 대한 분석 내용이나 불안에 크게 공감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 가운데 《리퀴드 러브》는 2003년에 출간되고 2013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다. 최초 출간으로 따져 봐도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사회적 상황을, 게다가 주로 유럽이라는 구체적인 지역을 관찰하고 분석한 내용이 담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년의 한국 사회에도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책이다.

‘리퀴드 러브’(Liquid Love)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 책은 현대 사회의 사랑과 인간관계를 다룬다. 우리와 동시대의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사랑, 우정, 가족, 이웃, 공동체의 문제가 이 책이 주로 다루는 내용이다. 바우만은 이미 다른 액체 근대론에서 주장한 것과 다르지 않게, 지금 현대인, 더 정확하게는 동시대인의 사랑과 인간관계 역시 마치 형체를 고정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액체처럼 유동적이고 일시적이며 불안정하다고 말한다. 이 책의 부제는 ‘인간관계의 허약함에 대하여’이고, 서문은 “이 책의 주인공은 유대 없는 인간이다”(17쪽)라고 분명히 밝힌다.  

먼저, 오늘날 개인들의 사랑에서 ‘영원한 사랑’의 신화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사랑의 관계에서 기대하는 안전성은 오늘날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아무리 사랑과 사랑하기에 대해 많이 학습했더라도 그와 관련된 지혜는 카프카의 메시아처럼 사랑이 당도한 뒤에나 도착한다” (45쪽)고 적는다. 이 문장은 사랑의 무지에 관한 철학자의 시적인 경구처럼 들리지만, 오늘날 사랑의 확신은 불가능해졌다는 사회학자의 전언이다. 노학자는 시사 잡지에 등장한 “SDCsemi-detached couple, 즉 ‘반-동거 커플’” (98~99쪽)에 관한 기사에 주목한다. 출퇴근 시간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던 과거(고체 근대)와 달리 유연근무제, 임시직, 프리랜서제로 바뀐 오늘날의 근무 형태처럼 커플들 역시 원하는 경우만 특정 시간과 장소를 공유할 뿐이다. 

오늘날 사랑의 풍경이 곤혹스러울 정도로 달라진 것처럼, 가족 관계 역시 과거와 다르다. 특히 아이에 관한 바우만의 분석은 풍자적으로 보일 만큼 신랄하다. 

“우리 시대에 아이는 무엇보다 정서적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113쪽)

“아이는 보통의 소비자에게 평생 구입하는 것 중 최고가 구입품 중의 하나이다. 순전히 금전적으로만 말한다면 아이에게는 호사스런 최신식 자동차나 세계일주여행 경비, 심지어 번듯한 저택보다도 더 많은 비용이 든다. 더 고약하게는 총비용이 해가 갈수록 더 늘어나는 경향이 있으며, 규모를 어느 정도 확실하게 사전에 확정하거나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114쪽)
오늘날, 많은 아이는 축복과 다복이 아니라 위협이나 저주, 혹은 양자 모두로 느껴진다는 분석. 세계화 속 액체 근대의 내면풍경은 15년 전 유럽이나 지금의 한국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휴대폰은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준다. 휴대폰은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이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도록 해준다.…” (153쪽) 
고독은 접속을 부르고, 접속은 다시금 고독을 낳는 것이 우리 시대의, 도시적 인간관계의 현실일까? 

“연대와 공감과 나눔과 상부상조와 상호 연민” (172쪽)을 잊어버린 이들이 바로 현대인이다. 한국어판의 부제처럼 ‘사랑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인 셈이다.

책의 4부(함께함/연대의 해체: 인류의 운명인가?)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마지막으로 난민 문제를 다룬다. 최근 전까지만 해도 난민 문제나 환대의 사유는 유럽의 인문사회학자들의 담론으로만 여겨졌으나, 이제는 어느덧 현실의 시급한 사안이 되었다.

지금 하나의 유령이 지구를 떠돌고 있다. 외국인 혐오라는 유령이. 결코 절멸되지 않으며 매번 새로이 해동되어 가열되는 신구(新舊)의 종족적 의심과 적개심이 유동적 현대의 실존적 불확실성과 불안에서 스며 나온 안전에 관한 신품종 공포와 하나로 뒤섞이고 혼합되고 있다. (267쪽) 

바우만의 관점에 따르면, 난민은 전 지구적 문제이므로 우리의 문제로 느끼지 못했던 것이야말로 단지 시간 문제였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글로벌하게 파생된 문제들에 대한 지역적 해결책은 없다” (259쪽)는 그의 강한 주장을 난민 문제에도 적용해보자면, 우리가 문을 닫고 자물쇠를 달아둔다고 끝날 문제는 아니다.

액체 근대는 끊임없이 쓰레기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여기서 쓰레기는 산업의 부산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세계화는 ‘인간 쓰레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근대적 주권의 공장 역시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이에 관해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에서 다룬 바 있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제주의 쓰레기 문제도 새롭게 보일 것 같다.)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사회학자의 말처럼, 유동적 현대의 ‘영원히 임시적인’ 삶의 패턴이 예행 연습되는 실험실이 바로 그 난민 수용소라면, 거기서 우리는 거처 없이 부유하는(liquid) 우리 삶의 민낯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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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대원 제주대 교수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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