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그 느낌을 산문으로 쓴다.> 시인 현택훈의 글 <영화적 인간>은 스포일러 없는 영화 리뷰를 추구한다. 영화 리뷰를 읽으면 영화를 보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은 점이 그는 안타까웠다. 영화에 대해 시시콜콜 다 말하는 글 대신 영화의 분위기만으로 제2의 창작을 하는 글을 쓰겠다고 그는 말했다. 영화에 대한 정보보다는 그 영화의 아우라로 쓰는 글이다. 당연히 영화 스토리와는 전혀 다른 글도 있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글 중 가장 좋은 글은 그 글을 읽고 그 영화가 보고 싶어지는 글이다.’ 이 코너의 지향점이 여기에 있다. [편집자 주]

[영화적 인간] ④ 인랑(ILLANG : THE WOLF BRIGADE), 김지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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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랑>의 한 장면. 제공=현택훈. ⓒ제주의소리

심야 영화를 보고 우리는 도남동 한 횟집에 갔다. 영화를 함께 본 한 명이 산낙지를 먹고 싶다고 해서 들어간 횟집에 산낙지는 없었다. 24시간 횟집이라고 간판에 표시되어 있지만 새벽 2시까지 문을 연다고 했다. 우리는 영화에 대해 얘기했다. 감독을 믿었는데 실망했다, 캐릭터가 잘 살지 못했다, 대결에는 개연성이 충분해야 한다, SF인 줄 알았는데 멜로였다, 도대체 인랑이 무엇이냐 등.

한라산을 주문했는데 참이슬이 나왔다. 잘못 나온 술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뭘 마시든 취하면 되는 밤이다. 서비스로 멍게가 나왔다. 멍게가 젓가락에 잘 잡히지 않았다. 오랜만에 청각을 먹으니 옛날 바다 생각이 났다.

네 명이 영화를 함께 봤다. 올리브, 아내, 나, 민승 형. 우리는 영화관 맨 앞 1열에서 봤다. 민승 형이 그런 자리로 돈을 받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며 투덜댔다. 요즘 실의에 빠져 있는 올리브는 영화가 자신의 기분을 치유해 주지 못해 실망한 듯했다. 아내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훨씬 재미있다고 말했다. 나는 청각을 먹으며 화북 바다를 생각했다.

오랜 여행으로 마음을 요가하는 민승 형이 이 영화에 인랑은 기의가 아니라 기표라고 말했다. 시뮬라시옹이 어쩌구저쩌구 말하는데 점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민승 형은 술에 취하면 나타나는 단계별 행동이 있는데 국물을 마구 들이켜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3단계에 이르렀다.

내가 청각이 맛있다고 말하자 민승 형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인랑은 우리 마음 속에 있다고. 시나리오를 생각하면 인랑이 사라진다고. 인랑은 어느 곳에나 있는데 그 근원을 알려고 하는 순간 인랑은 사라진다고.

횟집에서 나와 담배를 피우는 민승 형의 두 눈동자가 인랑처럼 붉게 반짝였다. 민승 형이 4단계에 이르기 전에 우리는 서둘러 인랑을 택시에 태웠다. 산낙지 같은 택시가 아스팔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현택훈 
고등학생 때 비디오를 빌려보며 결석을 자주 했다.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처음 쓴 소설 제목이 ‘중경삼림의 밤’이었다. 조조나 심야로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영화를 소재로 한 시를 몇 편 썼으나 영화 보는 것보다 흥미롭지 않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때 좀비 영화에 빠져 지내다 지금은 새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낸 시집으로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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