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84) 눈썹에 구경거리가 주렁주렁

* 도랑도랑 : 주렁주렁. 많이 매달려 있는 모습, 의태어

제주 속담에는 농촌의 바쁜 생활상을 담아 낸 것들이 적지 않다. 

그중 묘사가 출중한 것 셋을 내놓는다. 우리 제주 선인들은 농촌의 삶이 바쁜 것을 그냥 바쁘다고 직설하지 않았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을 다른 사물에 빗대거나 행동 양식을 통해 그럴싸하게 묘사했다. 곱씹을수록 묘한 맛이 우러나온다. 말을 맛깔나게 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오죽 했으면 ‘눈썹에 구경이 도랑도랑’이라 했겠는가.

당장에 먹고 살아갈 생계가 갈급했던 옛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한가로이 구경이나 할 시간이 어디 있었을까. 또 실제 가능하지도 않았다. 입었던 옷 그냥 입은 채 다리 옴치고 잤다가 동 새벽 밭으로 한달음에 내닫던 삶이었다. ‘삼천리 강산 유람할 제’ 하는 건 타령에나 나오는 것일 뿐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니 산천경개를 구경한다는 건 뒷전이었다. 구경이란 걸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제때에 일도 못해 버둥대는 판국에 구경 판이라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 눈에 달린 눈썹마다 구경거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얘기다. 썩 기분 좋게 내뱉는 말은 아닐 성싶다. 속이 상하지만 어쩌겠는가, 발목 잡는 현실을 어쩌랴. 그냥저냥 넘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눈썹에 달려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좋지 않아도 좋다 하고 있으니 속 다르고 겉 다른 표현으로 들린다. 푸념을 역설(逆說)로 털어낸 것이다.

한가한 시간이 없으니 속정을 이렇게라도 실토한 게 아닐까.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유사한 속담이 있다. 

‘눈썹에 불부터도 끌 저를 엇나.’
(눈썹에 불이 붙어도 끌 겨를 없다.) 
놀라운 표현이다. 아무리 바쁘다고 한들 눈썹에 옮아 붙은 불을 끌 겨를이 없으랴. 당장에 상처를 입을 일인데…. 얼른 보면 곧이들을 말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일손이 달려 바쁘다 보니 화급히 서둘러야 할 눈썹에 달라붙은 불마저도 못 끈다는 얘기 아닌가. 그럴 만큼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농민의 삶을 실감 나게 표현했다. 농촌의 바쁜 생활을 이렇게 감각적으로 부각시키다니, 실로 놀라운 언어 구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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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썹에 구경이 도랑도랑. 당장에 먹고 살아갈 생계가 갈급했던 옛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한가로이 구경이나 할 시간이 어디 있었을까. 사진은 1960년대 제주 농촌에서 고구마를 말리는 모습. 출처=제주학아카이브 홈페이지.

바로 앞집에 사는 아주머니의 삶을 지켜봐 온다. 60대 중반의 나이인 이 아주머니는 가까운 이웃인데도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7000평(약 2만3140m²) 감귤 밭을 여자 몸으로 혼자 해내고 있다. 가지 치고 약 치고, 비매 관리에 이르기까지. 아들 넷이 있어 감귤을 딸 때만 손을 빌리지 거의 자력으로 하고 있다. 저녁 어스름에 집에 와 이른 아침 이슬 차고 밭으로 가 종일 과수원에 매달린다. 그러니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본인이 들으면 어떨지 모르나 밭에만 눌러 붙어 사는 ‘들고양이’가 따로 없다.

간혹 비 오는 날이면 길 건너 우리 집을 찾는다. 마당을 가로지르며 ‘언니!’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반갑다. 가슴에는 과수원에서 사이재배 한다는 푸성귀가 잔뜩 들려 있다. 귤 철이면 연년이 한 컨테이너 가득 귤을 담아다 주는 인정 어린 분. 그냥 얻은 것인가. 그 귤이야말로 뼈 빠지게 땀 흘려 얻은 것이다. 그렇게 정 많은 분이다. 

정말 이 아주머니에게서 ‘눈썹에 불부터도 끌 저를 엇나’는 말을 실감한다. 비단 우리 이웃집 아주머니만이 아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거니와 이런 부지런이 오늘의 풍성한 제주를 일궈 냈지 않은가.

또 있다. ‘오줌 눵 털 저를 엇나’란 한 말을 빼 놓지 못한다. 농사철, 일에 묻혀 살 때는 하도 바쁜 나머지 소변을 보고도 뒤처리도 제대로 못하는 수가 있다 함이다. ‘털 저를 엇다’고 참 스스럼없이 털어 낸 말이 아닌가.

옛날 우리 농민들이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었다. 

‘일에 미쳔 살단 보난 정신이 호나도 엇다게.’
(일에 미쳐 살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오줌을 누고 난 뒤 뒤처리하는 행위를 조금도 거북함 없이 담고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오죽 바빴으면 그렇겠는가. 농촌의 실상을 알고도 남겠다. 실제가 그렇지 않다 손치더라도 그만큼 바빠서 딴 데 신경 쓸 경황이 눈곱만치도 없음을 빗댄 것이다. 체면불고하고 말한 그 순직함에 이르러 혀를 차게 된다.

눈썹에 구경 도랑도랑
눈썹에 불 부터도 끌 저를 엇나
오줌 눵 털 저를 엇나
모두 따지고 보면, 그만 그만한 것이고 거기기서 거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농촌의 바쁜 삶을 말하면서도 표현이 조금씩 다르고 빗댄 맛깔이 저만큼씩 독특하다.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속담에 비해 제주 속담이 갖는 지역적 특성이다. 제주인들에겐 이렇게 말 만드는 DNA가 있는 게 아닐까.

그나저나 우리 선인들 바쁘기는 되게 바빴다. 문득 ‘기느니 공’이란 말이 떠오른다. 돌랭이(밭뙈기)에 농사 지어 사는 형편에 간세했다(게을렀다) 망쳐서 될 일인가. 씨 뿌리고 검질(김)매고 거름 주고 거둬들여 장만하고 허리가 다 휘었다. 비 오는 날이 공치는 날이라고 다리 한 번 벋고 쉴 겨를이 없는 삶이었다. 이 속담들,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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