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필이가 만난 사람들' 여섯번째…'오일장 사람들'

   
 
 
그의 말투는 여전히 어눌했다. 무게 10kg의 카메라를 통해 '음지에서 양지'로 끄집어내는 일을 하고 있는 사진작가 곽상필(52).

아직도 '편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한 가운데 커다란 벽으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에서 그는 어쩌면 '소통의 전령사'다.

그의 흑백사진 속 인물들은 침묵 속에서 한결같이 평화에 차 있고 작은 소망을 안고 살아간다.

언어소통 조차 힘든 그이지만 그의 카메라를 통해 만난 사람들은 성실하고 열심히 배우려는 의욕적인 삶으로 바뀐다. 왜 일까.

   
 
 
어쩌면 이는 사물을 따뜻하게 보려는 그의 따뜻한 애정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똑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누구보다 진한 애정어린 관심과 시전, 사회적 약자에게 자연스레 눈이 가는 그의 눈빛은 오롯이 앵글에 담긴 채 훈훈한 기운이 서린다.

숱한 흑백 영상 속에서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봤을지 모를 그는 만나는 사람들의 기억을 차곡차곡 모아 '상필이가 만난 사람들'을 하나 둘씩 내기 시작했다.

2000년 제1집에 이어 2집(2002년 1월)을 낸 그는 3집 '상필이가 만난 사람들-Ⅲ'(2003년)에서 제주시, 서귀포시, 남제주군, 북제주군, 추자도와 우도에서 만난 장애인과 그들의 삶의 열정이 담아냈다.

이후 우리 사회 소수자 인권와 차별의 현실을 드러낸 인권사진집 '눈.밖에.나다'(휴머니스트)의 전국 9명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새벽 동문재래시장에서 만난 상인들의 일상과 생생한 삶의 현장을 포착한 제4집 '상필이가 만난 사람들Ⅳ'(2004)은 시장사람들의 이야기다. 지난해에는 '상필이가 만난 사람들’의 다섯 번째 이야기로 생사를 넘나드는 소방관 영상일지'를 통해 보이지 않았던 소방관의 고내와 애정, 그리고 훈훈한 온정을 담아냈다.

그가 다시 올해 여섯번째 사진집과 함께 '오일장 이야기'를 다룬다.(8.8~13. 문예회관 제1전시실)

4년 동안 도내 모든 오일장들을 찾아 쉴새 없이 찾아다닌 사각 앵글은 과일가게, 어물전, 잡화상, 화초가게, 잡곡상, 그릇가게, 채소가게, 할머니 장터, 순대집 등 모든 세상 만사와 만났다.

   
 
 

좌판을 사이에 놓고 가격 흥정을 하는 손님과 아주머니, 장바구니와 함께 가득 마음을 채운 어머니, 깜빡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못한 아저씨...오가는 온정을 주고 받는 시장 사람들과 옥신각신 살아가는 향기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 있다.

   
 
 
늘 아쉬운 마음만 가득하다는 그의 사진들은 어쩌면 매우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오래 시선이 머물지 않는, 무심코 지나쳐 버렸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면역성'을 잔잔하게 일깨우곤 한다.

오랜 병고를 거치고 난 후 그의 정신과 마음은 점점 맑아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손끝에서 잡아낸 프레임의 강렬한 이미지는 오늘도 삶의 향기를 전하려는 듯  '인권의 사각지대'를 헤치며 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그의 흑백의 앵글은 말한다.

"눈.밖.에 난 사람들의 치열하고 정열적인 삶을 보라'

그리고 '소록도에 다녀왔던 그 때의 소중한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그는  늘 아이들처럼 해 맑은 웃음으로 우리에게 나지막하게 들려준다.

"그저 미안해요"

▲ 후원문의 064)757-6925  후원금 입금계좌 제주은행 01-01-233131  예금주:곽상필

   
 
 

<사진 작가 곽상필은?...잃어버린 반쪽 그 속에서 얻은 희망>

▲ 사진작가 곽상필
1980년대 초부터 사진기자 생활을 하다 지난 92년 뇌경색으로 오른손이 마비된 그는 왼손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덧 장애인만을 찍는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나름대로 장애인들의 생활상을 주목한다.

 무게 10kg의 카메라를 통해 '음지에서 양지'로 끄집어내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센병 환자촌을 소재로 한 '소록도 풍경'을 비롯해 '상필이가 만난 사람들'이라는 연재물은 그의 따스한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여 년 전 신문사에 입사한 그는 카메라 한 대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었던 그였만 소리없이 찾아온 병마는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1992년 어느 날 ‘뇌경색’이라는 복병을 만나 몸 반쪽의 자유를 잃은 것. 소위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반신불수’.

산으로, 들로, 심지어 물 속까지 뛰어드는 자신만만함은 점점 잃어갔다. 그 후 생활은 엉망이 됐고 4년이 넘도록 ‘자포자기’로 지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사진기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김순택 세종의원 원장과의 끈질긴 인연은 삶을 바꿔 놓았다.

"그 때 고비를 넘기자 곽씨가 ‘카메라를 만지고 싶다’고 해서 ‘왼손으로 연습을 해보라’고 권유했지요"

결국 1997년 여름 김 원장이 지도위원으로 있던 한센병 환자 돕기 제주지역 봉사단체인 ‘다미안회’와 함께 소록도를 따라 나선 게 ‘터닝포인트’가 됐다.

‘나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의 눈에 비친 소록도의 풍경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2박3일 동안 그 곳에서 살면서 그는 왼손으로 쉴새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소록도를 다녀온 후 희망과 용기를 얻고 재기를 다짐했다는 그는 여린 상처를 마음의 눈으로 딛고 두번째 삶을 살고 있다. 지금도 틈틈히 김 원장을 비롯해 몇몇 후원자가 남몰래 그를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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