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레바논, 새싹처럼 희망으로 피어라
사람들은 은 30냥에 예수를 팔았던 가롯 유다를 비난하지만 그들 또한 은 30냥도 안되는 추잡한 것을 위해 예수를 파는 일에 너무도 익숙해 있다. 신념을 가지고 하든 요구를 하든 너무 쉽게 팔고, 강요한다. 그나마 소수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어 위로를 받는다. <편집자 주> |
이스라엘의 악의적인 무차별 공습으로 군인이 아닌 민간인, 어른도 아닌 아이들까지 희생양이 되는 레바논의 현실. 분노를 느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싫어질 때가 있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이라크를 침공하여 평화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미국을 보면서도 분노를 느끼지만, 그 역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서 공허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믿는 신에게 이렇게 기도를 한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그들을 벌하여 주옵소서. 지금 당장…." 그러나 응답이 없다. 어떤 이들은 이 두 국가가 기독교 국가이니 당신과 같은 종교를 가진 나라를 지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당신 미친 것 아니냐?"고 한다. 그러면 오히려 그들은 나에게 "미쳤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편으로부터는 전쟁을 일으킨 나라에서 온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도매급으로 나쁜 놈 취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유구무언이다. 틀린 말도 아니다. 기독교 국가이니 지지하라고? 미친 것 아닌가?
결국 예수는 불의한 자들과 위선자들의 합작으로 하나님을 모독한 자,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정치범으로 처형을 당했다. 바꿔 말하면 예수는 죽기까지 그들을 미워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요, 그것은 동시에 작은 것, 즉 소외되고 헐벗은 이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의 이런 메시지는 왜곡되어 버렸다. 강대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예수로, 지배권력의 욕망을 채워주는 예수로 전락했다. 예수가 변하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이용하는 인간이 타락한 것이다. 예수의 가장 큰 적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된 것이다. 지금 레바논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가 죽어가고 있다. 이라크에서 평화의 이름으로 평화가 갈기갈기 찢어지듯이 말이다. 만일, 오늘 서울에 예수가 온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강대국의 횡포 속에서 분노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심정으로 예수의 죽음을 다시 바라보기만 해야 할지도 모른다. 레바논에서는 예수가 죽어가고 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 후 언론을 통해서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의 주검을 들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린이들을 죽이는 자들, 그들이 부르는 신과 내가 믿는 신의 이름은 같다. 그들과 나는 같은 신을 믿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쉽게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수없이 하나님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팔아먹는 이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나도 때론 그 중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은 30냥에 예수를 팔았던 가롯 유다를 비난하지만, 그들 또한 은 30냥도 안되는 추잡한 것을 위해 예수를 파는 일에 너무도 익숙해 있다. 신념을 가지고 하든 요구를 하든, 너무 쉽게 팔고 강요한다. 그나마 소수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어 위로를 받는다. 새싹처럼, 꽃몽우리처럼 레바논도...
그래, 이렇게 작은 새싹처럼, 꽃 몽우리처럼 피어나는 거야. 그들에게 미래가 있어 희망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지금 그 모습 그대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머물기만 하는 것 같은데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는 그들, 피어나는 그들을 보면서 삶의 힘을 얻는 것이다. 새싹과 꽃 몽우리를 보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레바논, 새싹처럼, 꽃 몽우리처럼 피어나소서!" 보기만 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명구가 떠오르는 꽃, 지금 이스라엘로 인해 레바논은 더럽혀졌지만 이내 그 곳에 아름다운 꽃 피어나듯 레바논의 평화가 피어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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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의 기사제휴 협약에 의해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