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12) 다이아나 퍼러스, 《사라 바트만》, 이석호 역, 아프리카,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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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아나 퍼러스, 《사라 바트만》, 이석호 역, 아프리카, 2011. 출처=알라딘.

아프리카의 시인 다이아나 퍼러스의 눈물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프리카의 여성 시인 다이아나 퍼러스(Diana Ferrus, 1953~)는 주체할 수 없는 벅찬 감흥으로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그의 시가 그의 고향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 무려 1만4000여㎞ 떨어진 한국에서 시노래 형식을 띠고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비록 그의 시는 한국어로 불리워졌지만 그의 시가 지닌 심상은 시노래로써 재해석된 채 커다란 감동의 파문을 일으켰다. 

2011년 인천에서 개최된 AALA문학포럼(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포럼)의 폐막식 공연으로 준비된 ‘시노래 콘서트: 신비의 혀와 대지의 박동’에서 다이아나 퍼러스의 시 <나, 당신을 고향에 모시러 왔나이다>가 한국어로 번역돼 시노래로 불리워진 것이다. 우리는 이 시노래를 들으면서 시적 화자인 ‘나’가 고향에 모시러 가고 싶은 대상을 향한 간절한 바람에 모골이 송연해졌음을 고백해야겠다. 왜, 시인이 그토록 애타게 ‘당신’이라 불리우는 그 누군가를 고향으로 귀환시키고 싶어하는지를 헤아려볼 수 있다. 다이아나 퍼러스에게 ‘당신’은 단순히 ‘너’를 개별적으로 지칭하는 2인칭 대명사가 아닌, 문명의 탈을 쓴 서구에 의해 철저히 야만의 낙인과 구속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한 채 서구에서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아프리카의 뭇여성을 범칭한다. 

물론,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당신’은 200여년 전 남아프리카의 부시먼으로 불리는 코이코이(Khoikhoi)족의 여성 사르끼 바트만(Saartjie Baartman, 1790~1815)으로, 1810년 영국의 군의관을 따라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인들에게 ‘인종전시’를 당하면서 인간 이하의 온갖 모욕과 굴욕을 겪는다. 유럽인들과 구별되는 유달리 돌출한 둔부를 지닌 사르끼 바트만은 그 당시 유럽인들에게 둔부와 성기를 보여주는 인종전시를 당하면서, 유럽인의 신체와 다른 이유가 흑인의 성욕이 과잉되었기 때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그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는 반이성적 태도의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아니, 사르끼 바트만에 대한 유럽인의 이러한 태도는 그들 스스로 이성과 문명의 미명 아래 얼마나 심하게 반이성적·반문명적·반인류적 도그마에 눈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기실 그 당시 남아프리카를 오가던 서구인은 유목민의 삶을 살고 있는 코이코이족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코이코이족을 가장 우수한 ‘유인원’으로 간주하여 ‘코이코이’로 부르는 대신 열등하다는 뜻을 지닌 ‘호텐토트(Hottentot)’로 부르곤 하는 데서 알 수 있듯, 유럽인의 시각에서 유럽과 다른 아프리카의 모든 것들, 특히 인종 차별의 휘장으로 덧씌어진 유럽이야말로 반이성적 이데올로기의 노예와 다를 바 없다.

평화를 위한 아프리카의 박동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86년 동안 프랑스의 박물관에 소장되었던 뇌와 생식기가 분리된 사르끼 바트만의 석고화된 시신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반환하기 위한 지리한 외교적 과정이 있었는데, 다이아나 퍼러스의 시 <나, 당신을 고향에 모시러 왔나이다>가 프랑스의 상원 의원 앞에서 낭송되자 즉각적으로 유해 반환이 결정되었다. 시의 권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 당신을 해방시키려 여기 왔나이다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의
집요한 눈들로부터
제국주의의 마수를 가지고
어둠 속을 살아내는 괴물
당신의 육체를 산산이 조각내고
당신의 영혼을 사탄의 영혼이라 말하며
스스로를 궁극의 신이라 선언한 괴물로부터!

나, 당신의 무거운 가슴을 달래고,
지친 당신의 영혼에 내 가슴을 포개러 왔나이다.
나, 손바닥으로 당신의 얼굴을 가리고,
당신의 목선을 따라 내 입술을 훔치려 하나이다.
아름다운 당신의 모습을 보며 흥겨운 내 두 눈을 어찌 하오리까,
나, 당신을 위해 노래를 하려 하나이다.
나, 당신에게 평화를 선사하러 왔나이다.

- <나, 당신을 고향에 모시러 왔나이다> 부분

사르끼 바트만의 본명은 휘발된 채 ‘호텐토트 비너스’ 혹은 ‘사라 바트만’으로 불리우며 아프리카의 여성은 서구의 집요한 관음증적 시선에 의해 영혼과 육신이 송두리째 발가벗겨졌다. 시인은 평화의 노래, 위무의 노래, 해원(解寃)의 노래를 부른다. 하여, 시인은 “그녀의 이야기가 그녀의 후손들에게뿐만 아니라 국민들, 특히 우리나라(남아프리카공화국-인용자)와 전 세계 출신의 여성들을 계속 치유해주길 기대”한다. 더욱이 “스스로를 궁극의 신이라 선언한 괴물”, 즉 서구의 제국들이 치열한 반성적 성찰을 하기를 기대한다.
 
이 같은 시적 염원의 밑자리에는 시인이 태어난 아프리카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과 사랑이 깃들어 있으며, 아프리카인으로서 자기인식의 투철성을 한 순간도 망각하고 있지 않다. 

오, 심장 중의 심장이여,
문명의 요람이여,
나, 당신의 본질에서 솟아오른
혈통을 따라
이 세상 구석구석을 찾아가나이다.
당신은 생명을 주셨고, 박동을 멈추지 않음으로,
피를 쏟아 이 땅을 살아있게 하나이다.
당신의 혈액은행에서 낯선 이방인들은 피를 뽑고,
흡혈귀들로 그 자리를 채우며, 당신이 피로, 피를 보지요,
당신이 흘리는 피 중의 피는 당신을 관통해 흐르는 고결한 그 길을 오염시키지요.
희생의 상징이여, 당신이 박동을 멈추는 순간 이 땅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 <아프리카, 나의 심장이여> 전문

시인이 아프리카인에 대한 투철한 자기인식은 아프리카 대지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구쳐 들리는 대지의 박동 때문이다. 대지의 박동은 대지의 심장이며, 이것은 곧 시인의 심장이고,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인의 심장이다. 이 심장은 아프리카 문명의 요람이다. 원시 본연의 생의 충일성으로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튀는 대지의 싱그러운 박동이다. 아무리 서구의 근대가 아프리카의 박동을 멈추게 하고, 그리하여 그 피를 뽑아내고자 안간 힘을 써보지만, 아프리카의 심장과 박동을 쉽게 멈추도록 할 수 없다. 

아프리카의 고단한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아프리카의 신생을 향한 삶의 노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시인은 아프리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열쇠를 거머”쥘 것이다(<노예들이 머물던 숙소에 부치는 노래>). 그렇다고 시인은 막무가내로 아프리카를 숭배하지 않는다. 시인이 늘 경계하는 것은 혹 예전의 서구가 아프리카를 식민통치하면서 그랬듯이, 지배자의 언어가 피지배자의 언어 위에 군림하면서 마치 그 질서를 근대의 미덕인 양 강요하거나, 그 질서에 아프리카인을 순응시켜 협력하도록 함으로써 아프리카인이 민주주의의 퇴행성을 몰각하는 현실이다. 때문에 시인은 아프리카의 민주화를 향한 투쟁이 서구가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통치를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힘주어 노래한다.

그러나 루스 동지, 모든 냉소와,
질문과, 의심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민주주의입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우리의 생각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다툼을 벌이고, 싸우고, 편이 갈라지고,
서로 경합을 하고, 불신하고, 반박을 한다 해도,
우리를 침묵하게 만드는 편지 폭탄만큼은 제발!

- <루스 퍼스트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부분

시인이 사르끼 바트만의 맺힌 한을 달래고, 아프리카의 박동과 심장이 펄떡펄떡 계속하여 뛰도록 하고, 아프리카인에 대한 자의식을 뚜렷이 하는 것은, 가령 ‘아파르트헤이트’와 ‘호텐토트’처럼 흑인과 코이코이족을 대상으로 한 “우리를 규정하는 말과,/우리를 구속하는 말”(<이십 년 간의 자유>)에 투쟁하고, “어떻게 폭력을 멈출 수 있을까”(<폭력>)의 숙고 속에서 “내 몸과 영혼을 부수는/당신을 거부합니다.”(<저것을 넘어서>)와 같은 숭고한 결단에 이르기 위해서이다. 하여, 시인은 “우리 땅에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날”(<그날>) 평화롭게 흐르는 강을 보기를 욕망한다.

사르끼 바트만‘들’의 대화적 상상력을 기대하며

하마터면 망각될 뻔 했던, 아니 신기한 볼 것 정도로만 간주될 뻔 했던 사르끼 바트만이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그동안 청맹과니를 자처하며 그의 말을 듣는 것을 거부하였다. 서구의 프레임에 의해 그는 인류를 고고학적 혹은 해부학적으로 탐구한다는 썩 그럴듯한 요사스런 말들의 휘장에 가려진 채 그의 역사적 진실이 은폐돼 있었다. 이것을 아프리카 여성 시인 다이아나 퍼러스는 마치 영매(靈媒)로서 사르끼 바트만에 빙의된 것처럼 그의 통한을 전해준다.
 
이제 사르끼 바트만은 고유명사가 결코 아니다. 서구 제국주의의 일방적 근대가 비서구에 가한 폭력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아마도 여성일 터이다. 특히 제국의 식민통치 아래 하위주체로서 여성이 겪어야 할 온갖 폭력은 몸에 큰 상처로 남아 있다. 근대적 문명의 위장막 안에서는 차마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폭력의 광기로 가득 차 있다. 인간으로서 죽음이 아닌, 벌레만도 못한 끔찍한 죽음에 속수무책이다. 

돌이켜보면, 이 세상에는, 사르끼 바트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도 비서구는 서구의 다양한 관음증을 만족시켜줌으로써 비서구의 존립 기반을 보증받으려고 하지 않는가. 언제면, 서구라는 단어에 부정의 표징이 붙지 않고, 저절로 이 단어가 소멸함으로써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개별자들이 서로의 존재 가치를 존중하는, 참으로 문명화된 현실이 구현될까. 여기서 비서구의 개별 문학적 상상력이 평화적으로 연대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르끼 바트만‘들’의 말의 문양(紋樣)이 서구 중심의 문학을 전복시켜 도래할 새로운 문학의 밑그림을 차곡차곡 채워 넣었으면 한다. 그것이 아프리카의 눈물을 닦아주는 문학적 치유이다.

▷ 고명철 교수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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