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야만'을 '영웅'으로 모시는 나라

1980년 5월, 내가 미시건 주에 유학 온 지 1년 남짓했던 때였습니다.

전북대 의대 교수인 조 아무개씨와 룸메이트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 분은 전라도 분인데도 박정희 정권을 얼마나 치켜 세우는 지 주말 어떤 때는 밤을 세워가면서 입씨름을 하곤 했었지요.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도 아주 호의적 평가를 하곤 하더군요.

그러시던 분이 갑자기 돌변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1980년 5월이었습니다. 광주시내 도청 코앞에 노모와 처자들을 두고 온 그 교수님은 돌연 금식상태로 들어갔고, 시바스 레갈(박통이 즐기다 간 마지막 양주)을 하룻 밤 새 3병씩이나 거덜네는 알코올 중독자로 변신하더군요. 비좁은 방은 온통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요...

광주로 들어가는 모든 교통과 통신이 두절되었으니깐요, 얼마나 안절부절했겠습니까.

그 분 형님이 전주에서 새마을 사업 지도자급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분을 전화로 부추겨 광주 시내로 도보로 들어가도록 하더군요. 며칠 후 광주 시내를 들어갔다 나온 형님이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진입로가 군인들의 삼엄한 경비로 민간인 진입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군부대장에게 통사정해서 출입을 허락받았었는데 목숨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조건으로..."

들어가서 살펴보고 온 소식은 "광주시내는 질서 정연하다는 것이었고 아무런 약탈사고가 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폭풍전야처럼 조용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사 조 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더군요.

미국 TV 방송에서는 광주의 진압작전을 생중계로 보여주었습니다. 데모대에 가담한 한 경찰관에게 타임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왜 당신은 경찰인데 데모대에 가담했는가?" 그 경찰은 "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하더군요. 데모 군중들이 '인공기'를 흔들어댔다는 것은 사실무근인 유언비어였습니다.

군화발에 짓밟히고 곤봉에 짐승이 얻어 맞듯 당하는 군중들...임신한 유부녀가 대검에 찔려 쓰러진 모습...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마지막 전남도청 '탈환작전'으로 숨져간 박 아무개라는 목사는 시궁창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광주 5.18은 '빨갱이'들의 선동에 의해서 저질러진 난동이었다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전두환의 나팔수가 되어갔습니다.

소위 '광주사태'가 진압되고 난 몇달 후에 그 교수님 사모님이 미국에 있는 남편을 방문하러 와서 전해 주는 광주사태는 너무나도 끔찍했습니다.

1948년 제주에서 발생했던 4.3항쟁 진압이나 광주항쟁 진압이나 그 야만의 모습에서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 야만의 수령 전두환은 아직도 전직 대통령이란 예우를 깍듯이 받고 있는 대한민국이니 너무나도 슬퍼서 말이 안나옵니다. 아직도 그 똘마니(노태우 등)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입니다.

제주4.3 유족분들과 함께 광주 5.18 공동묘역을 몇 번 참배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구 묘역과 신 묘역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전두환은 집권 당시 구 묘역을 철거하여버리려고 부단 노력을 했지만 광주 시민들의 단결된 힘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거기에는 꽃망울이 채 피어보지도 못한 제주소녀 고 아무개도 영면해 있어 더욱 가슴을 뭉클하게 하더이다.

구 묘역 입구에 들어서면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가 세겨진 비석이 길바닥에 눕혀져 있습니다.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그 이름 석자를 밟아주라고...

나는 한 몇 번 밟아주고 침을 뱉어주고 왔었지요. 5월이 오면 남도의 원한은 다시 소쩍새같은 피울음을 웁니다.

기가찰 노릇은 김대중 대통령이 참배하러 온다면서 유가족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묘역밖 도로에 내팽겨쳐 통곡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참여정부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한자리 하며 잘먹고 잘사는 높으신 '양반'들이 전시행렬 행사가 아니잖아요.

영령들에게 고개를 숙여 빕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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