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신문, 6월30일부터 7월3일까지 제주 현장취재...토벌대 만행, 민중들 고통 등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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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신문이 4.3 당시 제주를 현장 취재한 후 보도한 르포 기사 '동란의 제주도를 찾아서'.
[기사수정] 1948년 제주4.3 당시 3박4일 동안 제주에 머물면서 르포 형식으로 엄혹한 당시 상황과 참혹상 등을 생생하게 전한 신문 자료가 발굴됐다.

당시 이 매체는 취재 과정에서 해안경비대사령부의 도움을 얻었지만, 중립적 입장에서 무자비한 '탄압'이 아니라 '교화선무책'을 사용해야 한다는 논지를 펴 눈길을 끈다.

호남신문은 1948년 7월15일부터 22일까지 '동란의 제주도를 찾아서'라는 타이틀로 7회에 걸쳐 제주4.3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호남신문의 제주4.3 르포 기사의 존재는 최근 '4.3도민연대'가 주최한 '제주4.3과 여순항쟁 70주년 기념토론회'를 통해 외부로 알려졌다. 

호남신문은 4.3이 발발한 지 약 3개월 지난 6월30일부터 7월3일까지 3박4일간 김상화 기자, 이경모 사진기자 등 3~4명을 '재광기자단'이란 이름으로 제주도에 파견, 르포 형식의 기사를 작성했다.

특히 3박4일 동안 제주를 일주하며 직접 취재한 생생한 내용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1신은 '제주여 말하라! 민족의 비극은 왜 초래했나'라는 제하의 기사로 제주4.3이 발발한 후 "동족상잔의 참극은 3000만 민족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하고 있다"며 취재 이유를 설명했다.

2신은 '짓밟힌 평화향(平和鄕)!' 제하의 기사로 7월1일 열린 '제주도 군수읍면장 연석회의'를 취재했다.

1948년 7월 1일 열린 '제주도 군수.읍면장 연석회의'에는 임관호 제주도지사와 김봉호 제주경찰감찰청장, 최경록 경비대 연대장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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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신문이 4.3 당시 제주를 현장 취재한 후 보도한 르포 기사 '동란의 제주도를 찾아서'.
신문은 이날 회의에서 6월 현재 소실가옥 421호, 양민 사망 292명, 경상 98명, 납치 35명이라는 각 면장 보고를 소개했다.

4.3 발발 초기이고, 초토화작전 이전이어서 사망자 숫자가 비교적 적었다.

새로 취임한 경찰청장은 교통차단 해제, 제주-목포간 교통복구, 생업종사자의 증명발행제 철폐를 약속했다. 

경비연대장은 "사태수습은 무력만으로 진압시키기는 곤란하니 각 행정기관에서 교화해야 한다. 경비대는 어디까지나 동족상잔을 피하여 행동한다"는 발언도 소개했다.

또한 소위 '폭도'측에서 압수한 무기가 패전한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로 쓰지 못할 정도로 파괴된 것이 태반이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연대장 멘트를 인용해 "무기라 해야 요 따위 것으로 과히 염려할 것은 아니며 육지에 유포된 팔로군이 왔느니, 일본 패잔병이 있느니 하는 것은 무책임한 허위날조의 풍설"이라고 보도했다.

3신은 제주 일주 르포를 본격 담고 있다. 제주 민중에 대한 인터뷰에서 "이래서는 살 수 없다. 제발 좀 살게 해달라"고 기자들에게 하소연한다.

호남신문은 "먼 곳의 총탄은 무섭지 않고, 가까운 총뿌리가 무서워서 못살겠다"는 도민의 목소리를 전하며 산사람보다 토벌대의 만행을 고발하기도 했다.

4신은 조천과 함덕지역의 상황을 담았다. 

조천 모 지서는 4.3 이후 4차례에 걸쳐서 습격을 받았는데 총구멍이 무수히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조천과 함덕 지역에서는 청년은 구경할 수 없고, 정들어 살던 집은 텅텅 비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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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신문이 4.3 당시 제주를 현장 취재한 후 보도한 르포 기사 '동란의 제주도를 찾아서'.
이와 함께 주민들은 취재진에게 "선무강연에서 시계를 뺏기고, 처녀를 내놓으라고 조르고, 가재도구를 부시고(부수고), 돼지를 잡아가버렸다"고 하소연했다.

호남신문 취재단은 '상식적으로 생각도 안되는 이런 만행은 도대체 누가 범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토벌대의 만행을 지적했다.

5신은 '복수행위를 삼가라'라는 제하의 기사로 구좌 세화부터 서귀포, 한경면 저지마을까지 돌아본 것을 보도했다.

구좌 세화에서 지서원이 자신의 가족에 대한 가해 혐의를 놓고 혐의자의 가족과 친척에 이르기까지 복수하면서 목숨까지 빼앗고 있다고 보도했다.

산사람들에 의해 면사무소, 구장집, 사설단체(서청이나 대청) 주택 등이 불에 타버린 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했다.

특히 저지마을은 치열한 전쟁터 마냥 전체 300호 중 200호가 좌우 양측에서 복수적으로 방화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대정면에선 7월1일 경비대원 11명이 무기를 휴대하고 탈주해서 3명이 체포됐고, 탈주시킨 최고지휘자는 2개월 전에 탈주한 해안경비대 장교로 사살됐다고 보도했다.

취재진는 폭도란 용어를 '산악부대'라고 칭하며 '왜 이렇게까지 집권자에 대해 총검을 겨누고 봉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나'라고 의문을 제시하기도 했다.

취재진은 적잖은 포로들은 대부분 흙냄새 풍기는 평범한 농민이며, 또는 그들의 자제들이라고 평가했다. 

6신은 '도민의 진정파악이 수습의 요체'라는 제하의 보도에서 제주도의 문화와 교육수준 등을 알렸다.

취재진은 "육지의 1면 1국민학교에 반하여 제주도는 1부락 1국민하고, 1면 1중학교로 교육시설이 발달돼 있다"며 "봉건제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느 특권층을 용납하지 않는 균등사회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도민은 극히 개방적이고 근로관념이 철저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줄 아는 미풍과 의타심없는 생활전통이 계승돼 있다"며 "일본과 직접 교류해 본토보다 문화수준이 높다"고 덧붙였다. 

제주도민을 무시하고 타도에서 들어간 인사들과 청년 단체원(서청, 대청)의 도를 넘은 행동이 도민들로부터 불만을 갖게 했다고 지적했다.

취재진은 "무자비한 일제도 제주도민에게 완화정책을 쓰게할 정도로 강한 투쟁력을 보여줬다"며 "사설단체원들의 불순한 정치적 모략은 몽매하고 순박한 양민까지 '빨갱이'라는 낙인을 덮어 씌우고 있다고 모 당국자가 말하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남로당계열의 정치야욕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1947년 2.7총파업이 벌어졌는데 이 틈을 타서 정치야욕을 채우려는 남로당 계열이 암약했으리라는 점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7신은 '폭도 이외의 무고한 양민엔 교화선무책이 긴요'라는 제하의 보도를 했다.

취재진은 "도민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육지에서 파견한 토벌대를 조속히 돌려보내고 민중의 원한에 있는 사설단체의 행동을 시정하는 동시에 과거 일부 당국의 잘못은 잘못대로 인정하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새로운 청장이 부임하면서 완화정책을 시행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웠다"면서도 "당국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남로당 계열의 책동이라고 하더라도 왜 민중이 그 책동에 따라갈 구실을 주게 했느냐는 것이 안타깝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제주도 실정을 모르는 각 기관의 간부 및 직원은 제주도의 진정을 파악하고 도민과 유리되지 않고, 사정을 잘 하는 인물로 배치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제주도를 '조선의 화약고'라고 칭하면서 "화약고 안에서는 금연이 필수조건임을 인식해야 한다"며 "한번 불이 나면 그 피해는 민족 전체에 미친다"고 제안했다. 

한편 호남신문은 1946년부터 1962년까지 호남지역에서 발행된 지방일간지다. 대한민국 신문 중 최초로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경영난으로 1962년 전남일보와 통폐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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