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를 읽고...

   
 
 
갈레노스는 고대 그리스의 페르가몬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여유로운 삶을 멀리하고 험난한 여행과 방대한 학문 연구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그는 의학을 주술이나 미신과 구별짓고 과학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집대성해 마침내 근대 의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고향에서 학문에 발을 들여놓기까지

그가 태어난 페르가몬은 산 위에 지어진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곳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도서를 소장하고 있는 큰 도서관이 있었다. 페르가몬에서 학교에 입학한 갈레노스는 모국어인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

그가 살던 시대는 에우클리이데스(수학), 아르키메데스(과학), 헤로도토스(역사), 플라톤(철학) 등이 화려한 학문의 꽃을 피운 시대였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갈레노스는 기하학, 과학, 철학에 관심을 갖고 이들 과목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페르가몬에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을 모시는 웅장한 신전이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인데, 몸이 아프거나 우울한 사람들은 이 신전에서 도움을 얻으려 했다. 어린 시절에 이 신전에서 봉사 활동을 했던 갈레노스는 아버지 니콘의 설득으로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아스클레이도스 신전에 있는 도서관에는 의학, 과학, 철학에 대한 많은 책들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갈레노스는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심취했고, 4원소설을 주장했던 과학자 엠페도클레스에 대해 공부했다.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과 4가지 체액설에 경도된 갈레노스는 인체에 혈액, 점액, 노란 담즙, 검은 담즙이 있고, 이들 4가지 체액의 균형으로 건강이 유지된다는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을 신봉했다.

페르가몬에서 의학 공부를 마칠 때까지 갈레노스가 가장 존경하는 의사는 히포크라테스였다. 갈레노스는 "의사라면 자기 환자의 생활 방식을 알 필요가 있고, 의사는 반드시 환자의 환경을 이해해야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주장을 신봉했다.

갈레노스의 오랜 여행

   
 
▲ 여객선이 없었던 시기에 갈레노스는 상선을 얻어 타고 지중해를 횡단하였다.ⓒ 실천문학사
 
갈레노스가 아스피오클레스 신전에서 공부를 마쳤을 때, 그의 아버지 니콘이 죽었다. 그는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게 되어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페르가몬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우선 로마의 영토에 있던 스미르나로 가서 의학, 식물학, 철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식물학에 푹 빠져서 아시아 지방을 여행했다. 여행에서 그 지방 사람들이 약으로 사용하는 식물을 조사하고 수집했다.

이후 그는 에게 해를 건너 그리스의 본토인 코린트로 건너간 이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알렉산드리아에는 '무세이온'이라는 대학습원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선생님들과 학생들, 극작가들과 시인들, 역사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과 철학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공부하며 살고 있었다.

당시 '인체 해부'는 금기 사항이었지만, 무세이온에서 갈레노스는 처음으로 인체 골격을 직접 연구할 수 있었다. 무세이온에는 인체의 골격이 두 세트 있었다. 하나는 독수리들이 쪼아 먹어서 남은 뼈였고, 다른 하나는 조직이 모두 나일 강물에 씻겨 나가 생긴 것이었다. 뼈를 연구하며 인체의 구조에 대해 경탄한 갈레노스는 자연스레 근육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동물 해부를 통해 인체에 관한 이론을 세워나갔다.

의사로서의 삶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를 마친 갈레노스는 고향인 페르가몬으로 돌아와서 그곳에서 검투사 학교의 의사가 되었다. 검투사들은 투기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싸우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들과 싸우기도 했다. 당시 로마인들에게 검투사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은 삶의 일부였다.

검투사들의 훈련은 가혹했고, 싸움에 나가는 검투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갈레노스는 검투사들의 상처를 고대의 관습대로 적포도주를 사용해서 살균했고, 항생제로 꿀을 사용했다. 뼈가 부러지면 다양한 길이의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으며, 붕대가 겹쳐진 사이사이에 왁스와 밀랍을 섞어 발랐다.

검투사들을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 갈레노스 의학는 자신의 의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상처를 꿰맬 때 피부 아래로 신경과 근육, 인대를 볼 수 있었고, 충격으로 한쪽 뇌에 손상을 입었을 때 반대쪽 몸이 마비된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검투사의 흉부에 심한 상처를 입었을 때 갈레노스는 검투사의 뛰는 심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갈레노스에게 검투사의 상처는 인체 내부로 열린 창문이었다.

페르가몬에서 4년을 보낸 갈레노스는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유력인사들의 주치의가 되었다. 뛰어난 의술로 인해 갈레노스는 로마에서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그 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부실험과 의학강연을 할 수 있었다. 갈레노스의 의학강연에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강연에서 갈레노스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다른 의사들의 탐욕과 무지를 주저 없이 조롱했다. 그는 "어떤 의사들은 그의 기술이 아니라 많은 재산으로 더 유명하다"며 비난했다.

갈레노스 의학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갈레노스는 대부분 로마에서 머물면서 조용하게 저작활동을 전념했다. 그는 약리에 관한 책 30권과 생리학 책 17권, 동물과 식물에 관한 책 9권, 병리학 책 6권에 수필이나 편지 등을 합해 모두 78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는 그의 나이 87세가 되던 216년 혹은 217년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그리스 의학을 수정해서 로마에 전해주었고, 그가 체계화한 의학 지식은 로마에서 사방으로 뻗은 길을 통해 세계 전역으로 전해졌다. 그는 의학적인 지식들 중 주술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을 구별했고, 사람의 마음이 병을 낫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또 환자의 꿈을 통해 신체의 이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명의 그리스 귀족에 그칠 뻔했던 갈레노스가 1300여 년 동안 사용될 의학의 텍스트를 완성하여 근대 의학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안락한 생활을 멀리하고 자신의 호기심과 모험심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남다른 열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책에 대하여  

출판사 : 실천문학사

글, 그림 : 진 벤딕(Jeanne Bendick)
뉴욕의 타슨스 디자인 학교를 졸업하고 과학 분야의 책을 쓰면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중이다.

옮긴이 : 전찬수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의과대학에서 정신과 의사가 되기위해 공부하고 있다.

갈레노스 (서기 129~ 200?)
고대 로마시대의 의사.
소아시의 페르가몬 출신으로,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검투사들을 돌보는 것으로 의사생활을 시작하다가 명망이 높아져 황제의 주치의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동물을 해부하여 당대에 알려져 있던 바와 같이 동맥이 공기를 운반하는 것이 아니라,혈액이 산소를 운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그리스,로마의 의학을 집대성하여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 등의 체계를 세웠다.

가격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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