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주 설문대 신화에서 떠올리는 명주실과 DNA
[기고] 제주 설문대 신화에서 떠올리는 명주실과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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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북대 전자공학부 초빙교수 이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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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은 아들 500명에게 젖을 먹이는 설문대 할망의 모습을 만든 설문대할망 테마공원의 조형물. 오른쪽은 명주 실타래. 제공=이문호. ⓒ제주의소리

설문대 할망 전설은 제주 섬의 탄생 과정이 담겨 있다.

태초에 탐라에는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설문대할망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누워서 자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앉아 방귀를 뀌었더니 천지가 창조되기 시작했다. 불꽃 섬은 굉음을 내며 요동을 치고,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할머니는 바닷물과 흙을 삽으로 퍼서 불을 끄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날라 부지런히 한라산을 만들었다. 한 치마폭의 흙으로 한라산을 이루고 치맛자락 터진 구멍으로 흘러내린 흙과 돌들이 모여서 오름들이 생겼다. 또 할망이 싸는 오줌발에 성산포 땅이 뜯겨 나가 소섬이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몸속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풍요로웠다. 탐라 백성들은 할머니의 부드러운 살 위에 밭을 갈았다. 할머니의 털은 풀과 나무가 되고, 할머니가 싸는 힘찬 오줌 줄기로부터 온갖 해초와 문어, 전복, 소라, 물고기들이 나와 바다를 풍성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물질하는 잠녀가 생겨났다.

할머니는 헌 치마 한 벌밖에 없었기 때문에 늘 빨래를 해야만 했다. 한라산에 엉덩이를 깔고 앉고, 한쪽 다리는 관탈섬에 놓고, 또 한쪽 다리는 서귀포시 앞바다 지귀섬에 놓고서, 성산봉을 빨래바구니 삼고, 소섬은 빨랫돌 삼아 빨래를 했다. 가끔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워 발끝은 바닷물에 담그고 물장구를 쳤다. 그때마다 섬 주위에는 하얀 거품이 파도와 물결을 이루었고, 몸을 움직이고 발을 바꿀 때마다 거대한 폭풍처럼 바다가 요동쳤다. 한라산에서 엉덩이를 들고일어나 한 발로 한라산을 딛고, 또 한 발로 성산봉을 딛고, 관탈섬을 빨랫돌 삼으면, 세상은 또 한 번 다른 세상으로 바뀐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풍요로움의 근원인 설문대 할망도 거대함으로 인해 불행했다. 할머니는 키가 너무 커서 옷을 제대로 입을 수가 없었다. 터지고 헌 치마를 입고는 있었지만 고래굴 같은 자신의 음문(性門)을 가릴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항상 탐라 백성들을 위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 주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속옷 한 벌만 만들어 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했다. 할머니의 속옷을 만드는 데는 명주(明紬) 100통이 필요했다. 탐라 백성들이 명주를 다 모아도 99통 밖에 안 되었다. 99통을 베어 짜서 속옷을 만드는데, 속옷 한 벌을 다 만들지 못했다. 인간 세상에 명주(明紬)가 별로 없을 때라서, 사람들은 모자람과 안타까움 탓에 속이 상했고, 할머니는 음문이 살며시 드러난 미완성의 속옷에 부끄럽고 화가 났다. 할머니는 육지까지 다리 놓는 걸 포기해 버렸고, 그때부터 제주는 물로 막힌 섬이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신의 키가 큰 것을 늘 자랑하였다. 용연물이 깊다고 하기에 들어섰더니 발등에 겨우 닿았고, 홍리물은 무릎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한라산 물장오리 물은 밑이 없는 연못이라 나오려는 순간 빠져죽고 말았다는 전설이다.

표선면 표선리 포구 ‘당캐’(place) 할망당에 가보면 그림에서 보듯, 세명주 신당이 지금도 남아있다. ‘세명주’란 이름을 가진 신당(堂神)은 제주도 내에 거의 없는데, 구좌면 송당리의 신화에는 그 이름만 남았고 표선면 표선리에서는 어엿한 마을 수호신중의 하나로 여신을 모시고 있다. 

《제주신당기행》(1989)의 저자 고대경 씨는 표선리 주민들은 신(神)을 세명주라고 부르면서 설문대 여신과 동일시한다고 쓰고 있다. 표선리에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세명주는 한라산에 솟아난 여신으로 오백장군의 어머니로서 많은 아들을 낳아 각 마을의 수호신으로 보냈다. 자신은 표선리로 내려와 주민을 돌봤다. 표선리는 넓은 포구 때문에 주민들이 살지 못 할 지경이었는데, 큰바람이 불면 높은 파도가 그대로 들어와 포구를 한 바퀴 돈 다음 회오리치면서 마을을 덮치곤 했다. 

세명주는 어느 날 밤, 마을에 있는 우마들을 총동원하여 인근 매오름 동쪽 기슭의 울창한 숲인 남추곶의 아름드리 나무들을 베어다가 포구를 메웠다. 사람들은 밤새우뢰가 치는 듯 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안의 우마는 모두 등이 터져 있었고 도끼들은 모두 날이 망가져 있었다. 흙과 나무를 밤이 새도록 자르고 나르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포구는 어느새 메워져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래가 쌓여 지금의 백사장이 되었다. 백사장은 넓은 모래밭이란 뜻으로 ‘한모살’이라 불렀다. 주민들은 이를 고마워하여 그 여신을 위한 당(堂)을 만들고 그녀를 수호신으로 모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제를 지냈다. 주민들은 이 여신을 설맹디 또는 세명주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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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표선포구에있는 설맹디 신당이다.신당 안 제사상 위 지방(紙榜)상에 명주실이 걸쳐있다. 제공=이문호. ⓒ제주의소리

그러면, 설문대 할망의 어원은 무엇인가?

기원전 4세기부터 제주에 사람이 살았다는 설이 있는데, 당시 한라산은 온통 눈으로 덮힌 설산, 모슬포 정남쪽에서 한라산을 보면 영락없는 큰사람 할망으로 보인다. 설문대는 설명주(雪明紬)가 설맹디(세명주)로 바뀌고 구개음화 과정을 거쳐 설문대가 된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제주인들은 눈 쌓인 한라산을 의인화해서 한라산 모양을 사람, 할망으로 봤고 한라산 키(height)를 흰 명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설문대 할망인 한라산은 오늘도 제주를 굽어보면서 제주를 지켜주고 있다.

# 왜, 명주실인가?

인체의 모든 DNA유전정보는 명주실통같은 세포핵에 압축되어 담겨 있다. 외모는 물론 인체를 구성하는 210여 개의 장기를 만들어내는 정보가 여기에 모여 있다. DNA의 길이가 얼마나 되기에 이렇게 많은 정보를 담아낼 수 있을까?

DNA는 A, G, T, C라는 4개의 염기(Base)로 구성돼 있다. 세포 하나에 들어 있는 DNA에는 30억 개의 염기가 있다. 염기들 사이의 간격은 0.34nm(나노미터, 1nm는 10억분의 1m)다. 그렇다면 DNA를 쭉 펴서 일렬로 나열하면 그 길이는 약 1m(0.34nm×30억)에 이른다.

우리 몸의 세포 수를 대략 100조 개로 볼 때 모든 세포의 DNA를 꺼내서 붙이면 1000억km에 달한다. 제주밭담 길이가 2만2000Km로 지구둘레의 절반인데 DNA는 지구 둘레가 4만 km이니까 지구 둘레를 250만 번 회전할 수 있다. 인간은 이 엄청난 길이의 DNA를 몸에 감고 다니는 셈이다. 흥미롭게도 사람의 세포는 지름 8μm(마이크로미터, 1μm는 100만분의 1m)∼15μm에 불과하다. 이런 작은 ‘그릇’ 안에 어떻게 1m 길이의 DNA가 들어갈 수 있을까. DNA는 그냥 일렬로 나열돼 있지 않고 수없이 꼬인(packing) 명주실통의 아주 작은 모양으로 존재한다. 그 덕분에 1m 길이가 1400nm 정도로 줄어든다. 마치 노란 고무줄을 계속 꼬면 차곡차곡 접히면서 길이가 짧아지는 것과 같다.

설문대할망 전설은 사람의 인체구조 DNA를 알아서 명주실 이야기를 한 것인가. 표선리 포구 설맹디 신당 지방함 위에 걸쳐있는 명주실 타래의 비밀이 반쯤은 풀리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표선 한모살 포구에 하얀 파도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시 한 수를 남긴다.

한라산 설문대 할망
이문호

흰 눈 덮힌 한라산 높이
'자(尺)로 잴 수 없을까?'

세상에서 가장 키 큰 설문대 할망
소중이는
흰 명주 백통
그런데,
한통 모자란 아흔아홉통
한라산 어승생 계곡도 아흔아홉

흰 명주실(雪明紬)로
돌담 밭에서
오름 발에서

흰 명주실(雪明紬)은
한라산 바람에 날려
세명주에서
설맹디로
입맛 닮은 설문대로

하나가 모자라 전설이 된

'한라산 설문대 할망'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으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RMIT대학, 독일 뮌헨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기술부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 공학부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에 선정됐다. 
현재 감귤과 커피나무 유전자 DNA 결합을 후성유전자 현상 관점에서 연구 중이다. 더불어 제주의 전통 문화의 과학화, 밭담의 세계문화유산등재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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