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를 위한 새로운 상상력] (12) 스스로 고용하며 일하는 에로스키(Eroski)

지난해 말 스페인 빌바오에 다녀왔다. 국제사회적경제포럼(Gsef·Global Social Economy Forum)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Gsef는 2013년 서울을 시작으로 세계 주요도시의 시장과 국제기구 대표, 사회적경제 분야의 활동가들이 2년에 한 번씩 모여 교류하는 무대. 서울(1·2회)과 퀘벡(3회)에 이어 네 번째로 빌바오에서 열렸다. 개인적으로도 기회만 생긴다면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 세계 최대 노동자협동조합인 몬드라곤이 있어 사회적경제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자, 빌바오 효과(Bibao Effect)라 불릴 정도로 도시재생의 메카가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몬드라곤은 충격이었다! 나를 이 길로 이끌었던, 그래서 그토록 직접 보고 싶었던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게다가 4개 부문(지식, 제조, 유통, 금융) 전부를 조금씩이나마 눈으로 보고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그나마 행운. 하지만 잔뜩 기대하고 다가선 바로 순간부터 내겐 어찌할 수 없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깨몽(?). 책에서나 읽고 사람들에게서 듣고 아는 척 나댔던 내 자신에겐 다시없는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었다. / 필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살아 숨 쉬는 혁신창업의 열정 MTA BB팩토리
② 울마(ULMA)그룹의 협동조합 간 협동, Intercooperation
③ 소비자협동조합 형태의 노동자협동조합 에로스키(Eroski)
④ 협동조합 방식의 사회보장, 라군 아로(Lagun 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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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로스키 소비자협동조합의 하이퍼마켓. /사진 제공=강종우 ⓒ 제주의소리

1000여평 남짓한 1층 하이퍼마켓. 정면 오른쪽 북스토어부터 가전, 핸드폰, 가구, 의류 및 생활용품, 공구, 사무용품, 그리고 식료품코너로 이어지는 우리나라로 치면 이마트나 롯데마트에 버금가는, 아니 온갖 것이 다 있는 그야말로 종합쇼핑센터라 할 만하다. 도심과는 멀리 떨어진 이 조그만 시내(?)-몬드라곤 인구가 3만여명이라는데–에 이런 규모의 매장이 있다니! 오전 10시 넘어 손님들은 우리 일행이 들어선 때부터 아주 많다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꾸준히 들고 난다.

이 매장을 운영하는 곳은 바로 에로스키(Eroski) 소비자협동조합이다. MCC(몬드라곤 협동 복합체) 체제 출범 이후 최근까지 몬드라곤 4개 부문에서 양적, 질적으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곳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에로스키 소비자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유통 부문을 들 것이다. 유통 부문은 20여년 동안 매출액에서 20배가 넘는 성장을 이룩했다. 이는 여타 부문의 성장 속도에 비해 약 5배가 넘는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몬드라곤 전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동시에 몬드라곤의 기업 이미지와 인지도를 개선하고 향상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매출액의 성장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통 부문이 이루어낸 고용 창출 효과다. 1990년 2600명의 노동자로 시작된 유통 부문의 노동자 수는 1995년 1만여명, 2000년 2만5000여명, 2005년 3만4000여 명, 2010년 무려 4만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몬드라곤에서 최근 1년간 창출된 신규 고용의 70%가 바로 유통 부문에서 이루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에로스키는 하이퍼마켓, 맥시마켓, 슈퍼마켓, 판매 지점, 의류, 가정용품 전문 매장, 여행사무소, 헬스클럽 등 소비자들의 생활과 관련된 전 영역으로 사업 분야를 확대했다. 1990년 300여개의 매장을 갖고 있었지만, 2006년에는 스페인 전 지역에 1400여 개의 매장으로 확대되었다. 2010년 현재는 2100여 개 매장에 이르고 있다.

이 시기에 에로스키는 두 개의 거대 유통 사기업을 인수·합병하는 데 성공했다. 첫 번째는 2003년 ‘메르카트’를 인수한 것이었는데, 이 유통기업 인수를 위해 에로스키는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동안 3차에 걸쳐 총 3억 유로의 채권을 발행했다. 두 번째는 2007년 스페인 굴지의 유통 그룹 ‘카프라보’를 인수한 것이었는데, 인수에 들어간 비용은 28억 유로를 웃돌았다. 이렇게 두 유통기업을 인수한 결과 몬드라곤의 유통 부문 매장은 2006년에 비해 50%가량 늘어났고, 고객 수는 250만명이 증가했으며, 노동자 수는 단기적으로 1만2000명 정도 늘어났다. 이로써 에로스키는 스페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통기업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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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roski

또한 이 시기에 해외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됐다. 1999년 이미 프랑스에 3개의 하이퍼마켓과 19개의 슈퍼마켓을 런칭하고, 2002년 프랑스의 유통 그룹 ‘레 모스케테르’와 판매협약을 맺었다.

2005년에는 독일의 유통 그룹 ‘에데카’와 판매협약을 맺었는데, 이 그룹은 유럽 전역의 1만 7000여 개 매장과 거래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 부문에서 국제 거래는 점점 증가할 것으로 보이며, 해외 판매망 확대는 에로스키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에로스키에게는 해결해야할 또 다른 과제가 남아 있다. 매우 공격적인 확장 전략을 전개함에 따라 이곳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조합원화가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몬드라곤 전체 피고용자 대비 조합원의 비율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에로스키는 설립 초기부터 소비자협동조합의 성격과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에로스키 조합원 총회는 소비자 조합원 총회와 노동자 조합원 총회로 이루어지고, 각각에서 50%의 이사진을 구성하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했다. 보통의 소비자협동조합들이 소비자 조합원을 대표하는 이사진과 피고용인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의 단체협상을 통해 노사관계를 조정하는데, 이것과 비교한다면 에로스키는 소비자협동조합운동계의 ‘이단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노동자 조합원들의 절대 숫자는 증가하고 있는데도 전체 종사자들 속에서 그 비중이 점점 떨어지는 것은 에로스키의 근본적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낳는 요인이 되고 있다. 판매기업에서 비조합원 노동자(주로 판매원)가 노동자 조합원이 되려면 약 1만 유로에 가까운 출자금을 내야한다. 에로스키 경영진은 이들의 조합원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협동조합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피인수·합병 기업의 노동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2007년 에로스키의 임시 조합원 총회는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결의를 했다. 즉 유통 부문의 모든 회사를 협동조합으로 전환시킨다는 기본 방침을 채택한 것이다. 2010년 현재 이 결의의 성과는 빠른 속도로 가시화되고 있다. 아마도 2~3년 내에 이 부문의 노동자들 75% 이상이 노동자 조합원으로 전환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비조합원으로 남을 경우에도 이들과 조합원 노동자들의 월급 차이는 현재와 같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빠르게 성장하면서 수익을 내는 회사의 소유권을 갖지 않으려는 노동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본다. 더욱이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데 필요한 출자금을 노동인민금고에서 쉽게 빌릴 수도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건 이들 노동자가 협동조합 문화에 얼마나 짧은 시간 안에 적응하느냐이다.

에로스키는 소비자협동조합의 형태를 띠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협동조합(출자금은 1만5000유로)이다. 소비자는 가입비 5유로만 내면 되는 회원제여서 우리는 소비자가 출자하고 참여하는 우리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 몬드라곤 조합원이 되기 위해서는 1~3년의 수습과정을 거쳐야 하고 본인의 가입여부를 협동조합과 협의한다. 협동조합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자유롭게 가입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월 급여가 잉여금 중 노동배당을 선수금 형태로 분할해서 미리 받는 것이고 협동조합 조합원 모두가 이익과 손해를 같이 공유한다는 소리에 멘붕. ULMA를 방문해서 비로소 알게 된 이 노동배당은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월급과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매년 확정된 사업계획 상 잉여금 중 노동배당을 선수금 형태로 12월로 분할해서 미리 받는 것. 그래서 계획보다 잉여가 추가로 발생하면 조합원 개인별 자본계정(출자금계정)에 총회를 거쳐 더 받고 손해가 나면 뱉어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몬드라곤에서 노동자가 일하는 사람이면서 회사의 주인이란 기본 원칙이 생겼고 그걸 보장해 주는 민주주의적 조직방식이 협동조합임을 자각한 게 아닐까 싶다.

빌바오 연수 가기 전 사전 학습 때 생산자든, 소비자든, 학교든, 농업이든 협동조합 형태는 달라도 다 노동자협동조합이라는 주워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농업협동조합 조합원도 투여 노동시간에 따라 급여를 받는다며. 노동자란 Worker(일하는 사람)이지 우리의 Labor(피고용인으로서의 직원)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게다가 스페인 정부에서 몬드라곤 노동자협동조합을 자영업자로 간주했다는 소리엔 경악스러움을 감출 길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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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종우 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그저 우리나라 직원협동조합의 좋은 원형질 정도라는 생각이 앞섰던 나를 반성해보는 기회였다. 어쩌면 내가 알고 있던 Workers Collective(스스로 고용하는 일하는 사람들의 집합체)와 가장 엇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몬드라곤, 바로 현장에 와서야 비로소 노동자협동조합의 개념과 원리를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 강종우 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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