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21) 엘렌 디사나야케(1992/1995년)《미학적 인간》김한영 옮김(2016년), 연암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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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오늘날 ‘미학적(aesthetic)’ 이라는 수사는 그 사용이 남발되면서 의미가 오염됐다고들 개탄한다. 거기다 ‘예술’은 또한 어떠한가? 예술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예술일 수 있다는 듯이 구호처럼 들리는 ‘예술’ 또한 난무하여 덩달아 다양한 욕구들을 분출하고 있다. 

현대 예술가들은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덧없는 것이나 어수선한 것을 예술의 지위로 끌어올리고, 사소하고 단순한 것이 까다롭고 복잡한 것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등, 예술을 더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다. 말하자면 개인적 충동으로 자연적인 것이 미적으로 간주되면 모든 것이 예술이 된다는 식이다.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1989)의 저자 데이비드 하비의 지적처럼, 어쩌면 현대인들은 지금·여기(Hic et Nunc) 생활의 덧없음, 파편화, 단절, 혼돈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다보니, ‘미학적’이라든가 ‘예술’이라는 말(의미)을 중화하거나 초월하려는 시도나, 그 속에서 어떤 불변의 요소들을 정의하려고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대예술의 주된 흐름엔 ‘예술’이라는 깃발 아래 기존의 엘리트주의적이고 배타적이고 자기만족적인 태도를 폭로하는 동시에, 사회적 문제(소비사회, 청년실업, 젠더, 난민 등)와 문화적 곤경(개인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무관심 등)을 예술작품에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예술’에 신성, 미, 특권, 세련, 평정과 같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는 일반대중들에겐 이들 현대예술작품들이 상품화, 도발, 폭로, 변덕, 저속함 등으로 혼란스럽고, 충격적이고 때론 불쾌하거나 당황스럽다. 이처럼 예술작품과 일반대중 사이의 미적 정서 나아가 미적 경험이 한층 분열되고 있는 것이 어쩌면 현대예술의 현주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번 서평에 소개할 책, 엘렌 디사나야케의《미학적 인간》은 여러모로 흥미롭고, 현대예술이 껴안고 있는 딜레마를 어쩌면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해준다. 이 책은 최근 200년 사이 개념 및 관념의 놀이에 갇힌 예술에 대한 태도에 분통 터트리기나 다름없는 열정으로 쓴 책이다. ‘해체’라는 미명하에 예술에서 실체를 지우고 해석만을 덧씌우며 공허한 말장난을 과도하게 즐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론에 대한 비판서라 해도 무방하다.

저자 엘렌 디사나야케는 원시사회부터 문명사회에 걸친 폭넓은 연구를 통해 ‘예술’이 문화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과, 인간이 선천적으로 미학적이고 예술적임을 밝혀온 인류학자다. 본서 이외에도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1992, 1995), 《예술과 친밀성》(2000)을 저술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해 온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라는 ‘다윈주의 미학’을 방대한 이론적·실험적 증거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예술을 인간의 보편 행동으로 보고, ‘진화미학’ 차원에서 그 기원을 찾는 자신의 관점을 ‘종중심주의(species-centrism, 다윈주의)’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인 예술 경험의 핵심을 좋은 기분, 즉 ‘쾌감’으로 규정한다. 다윈주의 관점에서 인간의 쾌감은 뇌 발생 및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길잡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차원의 쾌감은 인간의 감정 및 사회성과 연관되고, ‘특별화하기(making special)’와 향상의 충동과 직결된다. 이 책의 제목 ‘미학적 인간(호모 에스테티쿠스)’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저자가 말하는 ‘예술’은 비단 조형예술 혹은 미술이라 분류되는 협소한 의미의 예술이 아닌 인간의 문화에서 미학적인 ‘특별화하기’ 행위 전반에 걸쳐 있는 포괄적 영역임을 밝혀둔다. 

책 전반에 걸쳐 반복·강조 되는 세부내용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책의 전반적인 흐름을 가늠할 수 있도록 몇몇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가령, <제1장 서론: 왜 종중심주의인가?>에서 ‘인간성 또는 인문학’에 대한 서양의 ‘문화 중심적’ 지적패러다임을 재고하며, 서양 전통 바깥으로 눈을 돌려 인간의 보편적 성향을 탐구해야 한다는 대목이다. 즉 ‘서양’ 밖, ‘책’ 밖의 세상에 눈을 뜨라는 주문이다.

서양문명은 인류에게 정의, 자유, 이성적 탐구, 박애, 중용, 선, 진리, 미 같은 유력한 인문학 개념들을 부여했다. 이 개념들은 종종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 속에 담겨 있다. 이런 자격으로 그 개념들은 서구의 교육, 법률, 정치, 예술, 과학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종중심주의’ 관점에서 보면 ‘읽고 쓰는’ 능력은 최근에 나온 발명품이고, 널리 보급된 것은 훨씬 더 나중 일이다. 지상에 존재했던 인간들 중 99퍼센트가 고전이든, 책이든, 심지어 어떤 글이든 단 한 줄도 읽어보지 못했을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고 이들 ‘문맹인’들이 문화적 지혜를 습득하지 못했다고 우리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사회는 ‘책’이 아니더라도 구전(口傳)과 제의 속에 암호화되고 표현되어 있는 전통적 믿음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영구적인 가치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 개인과 집단의 경험을 이해하고자 하는 보편적 성향이 있다.”(36쪽)

종중심주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신, 사회, 문화가 탄생하게 되는데, 신, 사회, 문화는 이미 존재하는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필요’와 잠재력에서 나온 산물이자 해답이며 구현물이다(일반적으로 인간본성을 신, 사회, 문화의 산물로 생각하지만). 따라서 인문학이 제공하는 ‘문화 중심적’ 자기이해의 밑바닥에는 인간성에 대한 ‘종중심적’ 의미가 잠재해있음을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한편, <제3장 예술의 핵심: 특별화하기>에서 예술의 탄생과 발달을 생존과 관련된 인간의 활동들과 결부시켜 설명하는 대목이다. 

“예술의 탄생과 발달을 촉진한 진화의 주요한 맥락은 생존과 관련된 활동들에 있었다. 무한한 세월을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인간이 사물이나 경험을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출생, 사춘기, 결혼, 죽음 같은 중요한 이행과 관련된 제의 속의 사물들과 활동들, 식량을 구하고 풍년을 기원하고 여성과 대지의 다산성을 확보하는 것, 병자를 치료하는 것, 전쟁을 벌이거나 갈등을 해결하는 것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133~4쪽) 

저자는 예술의 탄생이 바로 위와 같은 인간의 ‘특별화하기’ 생존 행위들에서 발생되었음을 피력한다. 바로 이러한 선천적으로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생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예술에 집착하고, 혼란을 느끼고, 유혹에 빠지고, 예술로부터 기적을 바라고, 예술 때문에 우쭐해지거나 의기소침해지고 작금의 예술 때문에 배반감을 느끼는 등의 현상을 보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현대예술이 점점 그 기원과 멀어져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이고, 도발적이며 기계적·합리적·비자연적으로 변할수록 ‘자신 속에 존재하는 원시성’에 열중하는 징후 또는 몸부림이 일부 예술작품들 속에 녹아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제7장 글쓰기는 예술을 지우는가?>에서 문화에 종속된 “포스트모더니즘의 허무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체물”(368쪽)로서 저자가 ‘생물학적 종(species)으로서의 인간’을 중심에 두고 새로운 예술론을 펼치는 대목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 나타난 예술이론으로, 모든 주의와 운동이 끝났고 더 이상의 이론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소비자 중심주의, 대중매체와 그 이미지의 증식, 다국적 자본주의 경제 등으로 인해 이전 사회들과 현격히 달라진 다원적이고 불안정한 사회를 반영하겠노라고 공언했다. 이때 예술가들도 어떤 독자적인 특권이나 객관적인 진리를 통해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문화적 감각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소외계층들에게 배타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억압적인 고급예술을 전복시키거나 문제시 하고, 이를 위해 종종 그런 예술을 패러디하거나 조롱하곤 했다. 지금도 여전하다. 또 권위적인 박물관의 후광을 애써 피해 길거리나 외진 사막에서 예술을 창조하고, 허름하고 사소한 물건과 재료에서 예술을 발견한다. 또 예술 장르의 고결함에 도전하는 의미에서 혼성 매체들도 과감히 도입한다. 

예를 들어 1917년 뉴욕독립미술가전에 출품한 마르셀 뒤샹의 악명높은 소변기 <샘fountain>은 고급예술이란 제방에 난 틈에서 나온 반체제적 이론과 그 이론의 구현물들 중 대표적이다. 

이러한 예술운동이 예술의 해방과 민주화에 기여하해 온 것은 사실이다. 저자 역시 이 부분을 일정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저자의 실질적 주장(문제제기)은 여기서 부터다. 

“모든 것이 똑같이 가치 있다면, 그 어떤 것이든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제멋대로 퍼져가는 난잡함이 편협한 엘리트주의에 대한 진정한 개선책인가? 절대적 상대주의는 절대적 권위보다 믿을 만한 견해인가?”(367쪽)

라고 물으며, 저자 엘렌 디사나야케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의 결함 또는 편협함을 지적하고, 이러한 사고들이 가능케 한 장본인으로 ‘읽고 쓰기’, 즉 식자 능력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 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결코 의식의 새로운 양상이 아니라, 자체적인 수단에 의해 언어, 사고, 실재에 대한 자신의 가정에 속박되어 있고 더구나 인간 행동에 대한 포괄적이고 진정으로 보편적인 이해에 필요한 진화론에 내포된 의미들을 아직도 고려하지 않고 있는 어느 편협한 철학 전통의 불가피한 결론이다.”(368)

일찍이 철학자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말>(1986) 논문에서 선언했듯이, 이제 예술은 증발했고, 오로지 예술에 대한 (읽고 쓰기의) 의식으로만 남게 된 것이다.

예술이 증발하고 나머지는 차가운 벼랑 끝에 내몰리는 위기 앞에서 저자 엘렌 디사나야케는 인간의 오래된 본성(우리 몸속 깊이 각인된 공통의 성향과 욕구)에서 예술의 희망을 본다. 달리 말해 인간적 의미와 인간적 실재를 재조명함과 동시에 예술(해석 및 이해)에 대한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경험은 유전적으로 부여받은 선천적 경향들이 담긴 생물종 꾸러미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 선천적 경향들은 우리가 주변 환경과 그 행동유도성들에 대해 생각하거나 반응하는 패턴과, 우리가 환경으로부터 물질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필요로 하거나 찾아야 하는 것들―결속, 애착, 공유와 상호호혜, 자기초월, 조직과 분류, 집단에 합류하여 세계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확인하는 것, 양육하기, 양육받기, 우리의 존재양식과 활동이 자신과 남에게 유용하고 가치 있음을 인식하기―을 준비시켜준다. 우리가 말로 분명히 표현하든 못하든 그리고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든 간에 우리는 그런 행동을 한다. 문화에 따라 방식과 강조점이 달라도 우리 자신의 인간 본성 때문에 의미는 존재한다.”(385~6쪽)

만일 이러한 의미, 즉 보편적이고 종(種)-포괄적인 의미가 없다면, 그 행동들은 진화하여 존속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을 실행하도록 도와주는 언어 역시 진화하여 존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우리의 말하기, 일하기, 운동, 유희, 사회화, 학습, 사랑, 보살핌 같은 인간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행위와 관심사들처럼 ‘예술’ 또한 진화의 산물로서 모든 사람이 인식하고, 장려하고, 개발해야 할 인간의 정상적이고 필연적인 행동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 모두는 다름 아닌 ‘미학적 인간’이다. 사족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평소 필자가 구상하는 ‘제주미학’의 가능성과 실마리를 엿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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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자 박사.

▷고영자(미학자·번역가)

(사)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대표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근·현대 문화매체론, 제주기록·제주미학론. 제주도 ‘형태기록’ 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 《미얀마 산책》(2008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 《新제주순력담》(2016년), 韓東亀 편저 《제주도: 삼다의 통곡사》(2017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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