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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 생존수형인 故현창용 할아버지가 7일 오전 6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다.빈소는 제주 S-중앙병원 6분향소에 마련됐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4.3재심 청구인 17명 남기고 홀로 눈 감아...10일 장례식장 빈소에 4.3단체 등 조문 행렬
 
“억울하잖아. 제주4.3이 완전히 해결돼야 내가 눈을 감지”
 
제주4.3 재심사건의 역사적 시작에 있었던 그가 살아생전에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4.3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생존수형인 故현창용 할아버지가 7일 오전 6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다.
 
빈소는 S-중앙병원 장례식장 6분향실에 마련됐다. 일포인 10일 오전부터 장례식장에는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등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4.3재심 청구인 18명 중 고인을 제외한 6명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나마 거동이 가능한 양근방, 양일화, 박동수, 조병태 할아버지와 김평국, 오희춘 할머니가 떠나는 길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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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생존수형인인 김평국(왼쪽) 할머니와 조병태(오른쪽) 할아버지가 김영란(가운데) 제주4.3도민연대 조사연구원의 부축을 받으며 장례식장에 들어서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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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생존수형인인 양근방 할아버지가 10일 오전 故현창용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아 분향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현 할아버지는 만 16세이던 1948년 9월26일 제주시 노형동 자택에서 잠을 자다 한밤중에 어머니와 함께 월랑부락 토벌대에 끌려갔다.
 
경찰 앞에 선 10대 청년을 향해 ‘너 폭도냐. 삐라 뿌렸나. 시위에 참가했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우물쭈물하는 그에게 돌아 온 건 폭행과 모진 고문이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 경찰이 조작한 조서에 어쩔 수 없이 손 도장을 찍었다. 1948년 12월8일 현 할아버지는 형법 제77조 내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아 인천형무소로 향했다.
 
한 평(3.3㎡) 조금 남짓한 방에 5~6명 함께 생활했다. 제주에서 함께 끌려간 수형인만 100명을 넘었다. 제대로 된 재판은 없었다. 자신의 죄명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수감생활 중 한국전쟁까지 터졌다. 인민군이 들이 닥치면서 수형인들은 형무소를 빠져나갔다. 현 할아버지는 피난 생활을 하던 1953년 붙잡혀 형무소로 다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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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생존수형인인 양근방, 박동수, 양일화, 조병태 할아버지(왼쪽부터)가 10일 오전 故현창용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아 분향과 헌화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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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생존수형인인 양근방 할아버지가 10일 오전 故현창용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아 미망인인 김성아(왼쪽) 여사를 위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재판도 없이 대구형무소로 이송돼 무기징역 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형량이 줄면서 1960년대 말에야 자유의 몸이 됐다. 16살 이던 학생은 출소 후 30대 중반이 돼 있었다.
 
고향인 제주로 내려와 늦은 나이에 결혼도 했다. 슬하에 1남1녀를 두었지만 4.3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아내에게도 4.3은 숨기고 싶은 과거이자 아픔이었다.
 
미만인인 김성아(76)씨는 “가족들에게 4.3얘기는 입 밖에 꺼내지 않는 사람이었다”며 “재심청구 후에는 4.3 해결의 끝을 보고 가야한다면서 희망을 잊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총명한 딸이 공직에 오르지 못한 일이 벌어자 재심 청구를 결심했다. 억울하게 내란죄로 얽힌 삶이 원통했다. 공직자가 되기 못한 딸을 보면 연좌제가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내 변호사들을 찾아다니며 재심 청구를 물었지만 공소장과 판결문조차 없는 사건에 선뜻 손을 내민 법조인은 없었다. 2015년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를 만나기 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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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 생존수형인 故현창용 할아버지가 7일 오전 6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다.빈소는 제주 S-중앙병원 6분향소에 마련됐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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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동윤(왼쪽)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대표가 10일 故양창용 4.3생존수형인의 빈소를 찾아 유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양 대표는 “어르신은 생존수형인 18명 중 가장 먼저 재심청구를 이야기하고 적극적이었다”며 “재판을 끝까지 보기 위해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정말 의지의 사나이였다”고 회상했다.
 
변호인단이 2017년 4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면서 역사적 재판은 시작됐다. 현 할아버지는 2018년 3월19일 청구인 첫 진술을 위해 불편한 다리를 끌며 법정까지 출석했다.
 
지병으로 쓰러지기를 반복했지만 의지를 꺽을수는 없었다.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지고 그해 11월26일 피고인 심문을 위해 법원을 찾았지만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몸은 쇠약해졌다.
 
급기야 2019년 1월17일 역사적 선고일에는 법정에 출석하지 못했다. 이날 법원은 70년 전 공소 자체가 무효라며 무죄 취지의 공소기각 결정을 내렸다. 
 
재심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임재성 변호사는 “생존수형인 모두 고령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정부와 정치권이 더 이상 늦추지 말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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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완익 변호사가 10일 오후 故현창용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아 헌화와 분향을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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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생존수형인 재심사건을 맡은 변호인단이 10일 오후 故현창용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아 유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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