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107. 누워서 먹을 팔자라도 움직여야 한다

* 눵 : 누워서(臥, 누울 와)
* 팔저 : 팔자
* 오몽 : 움직임 오몽해사(움직여야)

타고난 대로 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다 저만큼씩 먹을 것은 타고 난다 함이다. 다소 운명론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보기에 따라서는 사람에게 타고난 분(分 혹은 福)이 있는 법이란 얘기다. 예로부터 길흉화복(吉凶禍福)이란 사람의 소관이 아닌, 신의 영역이라 해 온 것이 그 말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과 끊임없이 맞서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왔음을 지나칠 수 없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한 니체의 말은 곧 운명을 개척하라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 해야 옳다. 요즘 대학가를 휩쓰는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가 내면에 품고 있는 바로 그 뜻일 테다.
 
‘누워서 먹을 팔자’란 본래 놀고먹어도 되게끔 복을 타고 났다 함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재물만 축낸대서야 그 재물이 얼마나 가겠는가. 내로라하는 부자도 다 그만큼 일해서 획득하고 축적한 부(富)다. 나름의 활동영역에서 피땀을 흘려 얻은 성과물이다. 
  
일도 않으면서 빈둥거리는 사람은 삶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 몰지각한 사람은 인생을 제대로 세워나가지 못한다. 한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지 모르지만 멀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팔자가 늘어지게 좋은 사람도 알고 보면 무엇인가 일을 찾아 부지런히 일한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누워서 먹을 팔자라도 움직여야만 한다’, ‘움직이다’란 말이 별다른 감각 없이 오는 데 비해 이 말의 제주방언 ‘오몽’은 뉘앙스가 썩 다르다. 자극적이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역동적인 말이다.

어느 단체에서 한라산 등산을 마치고 돌아오는 하산 길에서였다. 산행이 힘든 사람은 산을 내려오는 길이 더 힘들다. 인대에 부담을 줘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앞섰던 사람이 여럿을 향해 “자, 쉬영 갑주” 하자, 다들 “아이고, 살았져” 하며 한숨 돌린다. 꿀 같은 휴식, 십 분쯤 쉬고 나자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친다. “자, 오몽!” 이 명령엔 죽은 시늉을 하면서도 다들 일어나 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움직여!’라는 불같은 명령이다. 어길 수 없는 지엄한 명령의 말 오몽.

‘실퍼도(싦어도) 오몽해야주’, ‘죽을 때꺼진 오몽허여야주. 앉앙 살 팔저라?’ 

예전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이 쓰던 말이다. 지금도 심심찮게 쓰이는 이 ‘오몽’이란 말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강한 뜻과 함께 어감이 부드러워 거부감을 나타내지 못한다. 마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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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조상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밭 일구고 검질(김) 매며 농사지을 때 입에 달고 살던 말, “죽자 사자 오몽해사주”였다. 사진은 짐을 잔뜩 지고 어디론가 바쁘게 가는 나이 든 제주 여성. 2014년 현을생 작가의 전시회 작품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건강 비결로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을 한다. 체험에서 나올 귀중한 말이다. 이 말 속의 ‘걸으면’이 바로 우리 방언으로 ‘오몽’이다. 우리 조상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밭 일구고 검질(김) 매며 농사지을 때 입에 달고 살던 말, “죽자 사자 오몽해사주”였다.

‘누워서 먹을 팔자라도 움직여야 한다.’ 

제주인들의 강인한 정신이 이 말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가슴속에 새겨두었다가 우리 아이들을 훈육(訓育)하면서 꺼내 쓰면 어떨까 싶다.

‘꿰떡도 누엉 먹젱 허민 눈에 가시 든다’
(깨떡도 누워서 먹으려면 눈에 티끌이 든다)

‘눵 먹을 팔저라도~’ 와 유사한 말이다.’ 깨떡은 참기름을 짜다 남은 찌꺼기 곧 깻묵으로 만든 떡으로 한 끼가 아쉽던 가난한 시절에 아주 귀한 떡이었다.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게 났으니까 쉬이 맛볼 수 없었다. 한데 그 깨떡도 똑바로 앉아 먹지 않고 비스듬히 앉거나 드러누워서 먹으면 눈에 떡 부스러기가 들어가서 곤혹을 치르게 된다는 말이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만만하게 여겼다가 한바탕 부대끼게 될 때, 쉬운 일도 얕잡거나 업신여겼다 화를 당할 때를 일깨우는 말로 쓴다.

살아있는 한 움직여야 한다. 움직인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움직여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법이다. 얻고 또 이룰 수 있다. 제주 방언 ‘오몽!’이 듣는 이를 생광(生光)케 한다. 움직여야 한다. 운명과 맞서는 길이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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