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5주년 기획-3.1운동 100주년 제주항일史] ①제주 첫 무력항일투쟁 ‘의병항쟁’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온 민족이 들고일어난 3.1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3.1운동은 나라 안팎의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줬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체계적이면서 조직화하는 계기가 됐다. 제주에서도 3.1운동 전후로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대한 항쟁이 이어졌다. 제주의병항쟁과 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창간 15주년을 맞은 [제주의소리]가 제주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추가조사를 비롯해 유공자 선정 및 처우개선 등 과제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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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조선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원컨대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최근 방영됐던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의 포스터 내용이다. 구한말 격변의 시대, 불꽃 같은 삶을 산 이름 모를 의병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우리 역사에는 나라가 위태로운 때마다 무수한 의병들이 등장했다. 의병이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조정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백성 스스로 일어나 조직하는 일종의 민군(民軍)을 말한다. 이러한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없다. 의병들의 역사와 인물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다.

<미스터션샤인>은 주로 경인 지방 의병들의 활동을 다뤘지만, 당시 의병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창의(倡義)했다. 변방 취급을 받던 제주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제주도민들조차 일제 강점기 때 제주에서 의병항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

◇ 제주 항일독립운동의 서막…고사훈 필두 10인 ‘항일 비밀결사’ 조직

제주도가 지난 1996년 12월 발간한 「제주항일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소속돼 행정적으로는 하나의 군단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은 다른 군에 비해 활발하게 진행됐다. 본토에서 진행된 항일독립운동에 동참하기도 했고, 독자적으로 항쟁을 진행하기도 했다.

항일운동의 계기는 대한제국 마지막 시기 국권회복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1904년 7월 군사경찰훈령을 만들어 치안권을 빼앗은데 이어 8월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아갔다. 이듬해 11월에는 을사늑약을 체결해 외교권까지 강탈했다. 1907년 7월 고종이 퇴위당하고, 8월 군대가 해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한 백성들이 국권회복을 외치며 의병으로 나서게 된다.

당시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활동은 제주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제주의병항쟁의 서막이다.

제주의병항쟁의 중심에는 고사훈(고승천)이 있다. 고사훈은 1908년 7월 당시 제주군수인 윤원구에게서 제주도가 일본인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전해들으면서 의병을 일이킬 뜻을 지니기 시작한다. 이후 전라도 지역 의병장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비밀리에 제주지역에서의 의병을 계획했다.

고사훈은 이중심(이석공), 김석윤(김석명), 노상옥 등과 더불어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하고, 황사평에서 비빌리에 군사훈련을 추진하는 한편 거사에 필요한 재정을 모으기 시작했다.

1909년 2월25일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병생(조인관)의 집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회합을 도모한다. 의병 창의자는 고사훈 외에 이중심, 김석윤, 노상옥, 김재돌(김문우), 양남석, 한영근, 양만평, 김만석 등 총 10명이었다.

이날 회합에서는 거사일을 1909년 3월3일, 거사 장소를 관덕정으로 정하고 의병장에 고사훈과 이중심을 추대했다.

이들은 거사를 앞둬 격문과 구체적인 행동지침서인 통고문을 각 마을에 발송하고, 의병장 고사훈은 병력 동원을 위해 대정군으로 출발한다.

<격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라 은혜에 대한 충정이요, 부모에 대한 효도이다.
만약 자식으로써 부모의 곤궁함을 구하지 못하면 불효요, 나라의 위급함을 걱정하여 나서지 않는다면 불충이 되는데, 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 교활한 왜적이 병자년 이래 감언이설과 강압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더니,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려 하고 있다.
이제 우리 눈앞에는 왜적의 무리가 강산을 짓밟고 있는데 그대로 두면 이 강토를 송두리째 삼킬 것이요.
우리들은 왜적의 노예가 될 터이니 이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으랴.
오호라 천도가 무심하리오 경향 각지의 충의로운 지사들은 국권 수호를 위해 궐기하였다.
우리 제주 백성들도 충성을 다하여 은혜에 보답하고 자손만대에 조상의 무덤을 지키게 할 때가 왔도다.
피끓는 충의로운 지사는 죽음으로써 왜적을 격퇴해 나라의 국운을 회복하고 성은에 도답할 자는 의성을 같이 불러 삼천리 금수강산을 지키는 데 삶과 죽음을 같이 한다면, 이보다 다행하고, 이보다 더한 충효가 어디 있으랴. 피끓는 충효지사들이여, 팔뚝을 걷어 붙이고 총궐기하라!

모병은 1만명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대정군에서만 약 400~500명이 의병으로 가세했고, 제주군 중면에서는 60여명의 무장돌격대가 나섰다. 도 전역에서 2000여명이 참여할 정도, 대규모 항일 무장투쟁이었다.

하지만 무장투쟁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거사를 눈치 챈 대정군수 김종하가 마을 장정을 동원해 의병 집결지(광청리)를 기습하면서 의병들이 흩어지게 됐고, 의병장 고사훈과 김만석은 3월1일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고사훈과 김만석은 항복을 권유받았으나 항쟁의 뜻을 굽히지 않아 3월4일 대정군 안성리 인근에서 총살당하고 만다.

당시 의병장 고사훈의 기개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항복해서 협력하면 고관에 천거하겠다고 회유하던 일본경찰을 향해 “차라리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결기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핵심참모 김석윤이 체포되고, 나머지 지휘부들도 육지부로 탈출하면서 거사는 모병 단계에서 좌절하고 만다. 고후삼, 김재형, 부우기, 한영갑 등은 창의자는 아니었지만 창의에 호응해 모병을 준비하다 발각돼 모진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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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사, 조천만세, 해녀항쟁으로 이어지는 제주 항일투쟁 기틀 마련

 

제주의병항쟁은 비록 모병단계에서 좌절되고 말았지만 일제의 침탈에 맞선 제주 최초의 무력 항일투쟁이라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특히 일제 침략에 대한 도민의 주체적 대응이었다는 점, 경제적 침략에 맞선 생존권 투쟁으로 평가받는다.

또 당시 의병운동이 가장 거세게 전개되고 있던 전라도 지역 의병장들과의 교류를 통해 섬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大義) 앞에 계급적 이해관계를 초월했다는 점도 평가받을만 하다.

당시 제주 향촌사회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양반 유생뿐만 아니라 하층민들까지 의병에 동참, 일본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계급적 이해관계를 초월했다.

무엇보다 제주의병항쟁은 제주도민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됐다.

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제주해녀항일운동, 제주농민조합운동 등 일제 강점기 동안 이어진 항일운동의 기반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김석윤은 일제에 체포돼 내란죄로 10년 유배형을 언도받아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뒤 법정사 창건을 위해 노력,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했다.

◇ 멈춰버린 제주 항일운동사 연구…정당한 평가․예우 위한 추가조사 및 유공자 심사 필요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8월15일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구한말 의병운동으로 시작한 우리의 독립운동은 3.1운동을 거치며 국민주권을 찾는 치열한 항전이 됐다”고 말했다.

특히 “친일의 역사는 결코 우리 역사의 주류가 아니었다”고 말해, 친일 잔재의 청산이야먈로 시대의 소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름 없는 비운의 독립투사, 의병들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는 것은 후세들의 몫이다.

제주의병항쟁 창의자는 10명이지만 지금까지 4명(고사훈, 김만석, 김석윤, 김재돌)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당시 대정군에서 가세한 400~500명의 의병, 제주군 중면에서 나선 60여명의 무장돌격대는 이름 한 줄 없다.

제주보훈청에 따르면 제주출신 독립유공자는 179명. 독립운동단체의 명부와 판결문, 기관지 및 신문에 보도된 기사, 정보기관의 보고서 등을 종합해볼 때 제주지역 독립투사는 5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당국이 더욱 분발해야 하는 이유다.

강혜선 광복회 제주지부 사무국장은 “공적이 있는데도 입증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번번이 탈락하는 경우가 많다”며 “고령이 된 후손들 대신 보훈당국이 먼저 입증자료 찾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멈춰버린 제주 항일운동사 연구 재개도 필요하다.

제주 항일운동 관련 기록물은 제주도가 1996년 발간한 「제주항일독립운동사」가 큰 뼈대를 이루고 있다. 당시 향토사학자들과 교수들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항일운동 관련 판결문 등을 입수해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 관련 연구는 사실상 멈춰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은 “1996년 「제주항일독립운동사」를 펴내면서 큰 틀에서는 어느 정도 정기가 됐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며 “제주 항일운동 기록에 대한 세부적인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박 센터장은 “제주 항일운동사 연구가 거의 2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관련 인물사․문화사 연구를 위한 당국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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