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고통을 받아들이는 삶의 기술
상처와 고통을 받아들이는 삶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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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世通, 제주 읽기] (124) 토드 메이, 변진경 역, 부서지기 쉬운 삶, 돌베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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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드 메이, 변진경 역, 《부서지기 쉬운 삶》, 돌베개, 2018. 출처=알라딘.

사이코패스(psychopath)는 ‘공감 제로’의 인간이다. 그들은 죄책감, 걱정, 두려움이 없거나 약하다고 한다. 악마의 현실 버전에 가까울 그들이 무섭고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법. 사이코패스가 악랄한 범행을 저지르고도 태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윤리적 측면을 제외한다면, 그들이 걱정과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대목에서는 기묘하게 부러운 생각마저 든다. 나는 그들과 반대로 지나치게 많은 걱정과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이코패스와 반대로 윤리와 공감의 화신이라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대체로 쉽게 상처 받고 오래 고통 받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의 고통과 상처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문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어쩌면 알게 모르게 그 이유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은 상처와 고통 없이 살 수는 없는 걸까? 반갑게도 철학자인 토드 메이(Todd May)도 이런 고민을 해왔던 모양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찾아오곤 하는 우울증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어느 대목에서는 자신이 걱정이 많은데다 모든 일을 계획대로 해야 안심하는 통제광이라고 말한다.

부서지기 쉬운 삶은 ‘vulnerability’ 즉, 상처 입을 가능성이나 취약성이라고도 불리는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을 다룬 책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동물인 까닭에 신체적으로 상처에 열려 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을, 필멸의 존재이다. 게다가 동물보다 우리가 더 고통 받는 이유도 있다. 우리는 당면한 상처와 고통뿐만 아니라 앞으로 당할 고통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그 생각으로 고통 받을 수 있다. 인간은 보통 동물보다 수명이 길기 때문에 살아가는 동안 받을 고통의 총량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신체의 고통뿐만 아니다. 우리는 마음을 지닌 심리적 존재로서, 언제나 마음의 고통 앞에 속수무책이다. 아무리 불굴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거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도 마음의 고통은 존재할 수 있다. 언젠가 적어도 우리는 한 번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게 될 테니까. 신체적 고통, 심리적 고통을 받지 않더라도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어떤 식으로든 관계 안에서 고통 받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의 표현대로 인간은 ‘삶의 과제’(projects)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과제를 수행하고, 과제에 관여하고, 우리가 관여한 과제를 통해 삶을 형성한다.”
(20쪽) 

예를 들어, 맛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과제가 아니지만 요리사가 되는 것은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우정과 사랑이라는 관계는, 저자가 강조한 것처럼, 우리 삶에서 ‘중심 과제’(central projects)이므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제를 위해서는 시간의 경과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삶의 과제를 통해 삶에서 의미를 얻는다. 하지만 거꾸로 삶의 과제가 중요한 만큼 우리는 과제를 성취하지 못하거나 실패한다면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교사나 요리사를 꿈꾸던 사람이 꿈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면 그것은 크나큰 고통이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인생에서 크고 작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므로 또한 상처 입기 쉬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상처와 고통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주력한다. 우리 삶이 상처와 고통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면 그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저자는 철학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삶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서구의 고대 철학자들에게 철학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면 상처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 삶에 대처하는 방법은 없을까? 상처와 고통 받기 쉽다는 것이 인간의 근본 조건이라면, 아주 오랫동안 인간들은 그에 대처해 왔을 것이다. 종교와 신앙 역시 그러한 대응의 한 방식이었다.  

철학과 사상에서도 상처를 받지 않는 태도가 있어 왔다. 저자는 이러한 철학을 ‘invulnerabilism’ 즉 ‘상처 받지 않는 태도’나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이라는 조어로 표현한다. 동양의 불교와 도교는 종교 이전에 하나의 철학적 사유로서 상처에 무심한 태도를 권해 왔다. 서양의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 역시 상처로부터 초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가르쳤다. 영적 훈련을 통해서 삶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노력을 행하라고 대중에게 권하는 현대의 철학자들도 존재한다. 과거의 회한과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현재를 살아가라는 지혜도 고통 속에 허우적대는 우리를 조금은 위로한다.

상처 받지 않음을 지지하는 사람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 안에 평화의 장소, 근본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거나 흔들리지 않는 무심함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그리고 많은 이들에 따르면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중심이다. 이 중심을 개발함으로써 우리에게 불행이 들이닥쳐도 궁극적으로 상처 받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사이에 있는 거리를 감추게 함으로써, 우리가 어느 정도 영향을 받더라도(상처 받지 않음의 관점들은 이 점에서 제각기 상이하게 나타난다) 존재의 중심에서는 흔들리지 않게 한다. (18쪽)

하지만, 이 책의 부제는 ‘상처 입을 가능성을 받아들이기’(Accepting Our Vulnerability)이다. 상처 입지 않는 마음의 태도를 상세히 일러주거나 그 태도를 옹호하기보다 오히려 그 태도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상처 입을 가능성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보기에 상처로부터 초연한 태도는 문제가 있다.

“첫째, 이 시각들에는 ‘내면’ 지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관심을 우선시하므로 정치적 문제보다는 개인적인 문제로 주의를 이끌기 쉽다.”(156쪽) 세상의 온갖 부정의에 대한 항거와 변혁의 움직임에는 고뇌가 출발점이다. 부정과 부당함에 대한 투쟁의 주요한 자극이 없다면 세상은 더욱 고통스러운 곳으로 변할 수 있다. 자기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만 애쓰는 힐링 문화의 유행이 달갑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둘째, 죽음을 받아들이는 초연한 태도만이 필멸에 대한 지혜는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삶에 애착을 지니는 것은 인생을 잘 살아오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강렬함을 갖고 삶을 살아왔다는 것일 수도 있다. 셋째,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독일 장교는 과연 그 시도의 실패에 초연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가 실망하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상할 것이다. 넷째, 상처에 초연한 태도는 우리 삶에 의미 있었던 사람의 죽음에 초연하라고 가르치지만, 애도는 우리 삶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사람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이처럼 저자는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상처 입지 않는 초연한 태도의 철학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인간의 상처 입을 가능성이 타인에 대한 윤리와 정치적 저항의 의미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상처 입을 가능성’을 ‘타인의 고통을 보고 느끼는 고통’으로 분명하게 표현한 철학자는 레비나스다.) 

토드 메이는 상처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삶의 기술로 제시한다.

‘받아들임’은 허무주의자의 것도,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을 지지하는 사람의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자신의 삶이 기반하고 있는 비참한 역사를 인식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과거에 대해 취약함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받아들임’의 자세는 우리가 그 비참한 역사를 긍정할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받아들임은 그런 식으로 허무주의와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 사이에서 노선을 취한다. 우리의 존재를 난처한—과거를 긍정하는 것도, 과거로부터의 도피를 인정하는 것도 아닌—것으로 본다. 우리는 위태로운 존재이지만, 반드시 파멸할 운명인 것은 아니다. (207쪽)

물론 많은 사람들은 평정심을 위한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한 태도를 때때로 사소한 상처와 고통에 적용해보길 원하고 그것은 실제로 훌륭한 삶의 기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처 받음을 지지하는 사람’(vulnerabilist)은 모든 상처와 모든 고통스러운 순간에 초연한 평정심을 유지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상처 받지 않는 게 아니라 그저 ‘덜’ 상처 받으며 사는 걸 바라기 때문이다. 받아들임에도 한계는 있기 때문이다.

상처 입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상처에 초연한 태도와 달리 세계와 감정적 거리를 두지 않는 것이다. 고통과 기쁨이 뒤범벅된 채로, 세상은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받아들임을 통해서 고통을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상처와 고통을 초월하는 태도가 아니라, 기꺼이 그 고통을 들여다보거나 때로는 고통을 껴안는 삶의 방식 또한 어쩌면 삶의 지혜가 될 것이다.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될지도 모른다.

▷ 노대원 제주대 교수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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