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칼럼] 잠녀항쟁과 4.3항쟁으로 이어진 '3.1혁명'

# 3.1운동은 피 흘린 혁명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우리 민족이 3.1헌전(憲典)을 발동한 원기이며 동년 4윌 11일에 13도 대표로 조직된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만들어 반포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전제를 전복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 우리는 대중이 핏방울로 창조한 국가형성의 초석인 대한민국을 절대로 옹호하며 확립함에 같이 싸울 것임." 
-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 建國 綱領)' 중에서

임시정부는 충칭(Chongqing, 中慶) 시기에 임시정부 주변의 한국국민당(金九), 한국독립당(趙素昻), 조선혁명당(池靑天)을 합당함으로써 1940년에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정부 역량을 강화하였다. 이어 1941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공포하였다. 건국강령은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이라 정의하였다.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받아들인 건국강령은 '새로운 민주주의 확립과 사회계급의 타파, 경제적 균등주의의 실현'을 주창하였다. 

"3.1대혁명은 한국 민족이 부흥과 재생을 위해 일으킨 운동이었다. … 우리는 3.1절을 기념할 때 반드시 3.1대혁명의 정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3.1대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바로 반일독립과 민주자유이다. … 자존과 공존, 민주와 단결, 기개와 도의, 자신과 자존이야말로 3.1대혁명 정신의 요체이자 전부라 할 수 있다." 
- 1943년 '대공보(大公報)'에 실린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석(釋) 3.1혁명정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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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출처=오마이뉴스.
1943년 백범 김구는 중국 <대공보> 지에 기고한 '석(釋) 3.1혁명 정신'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3.1경축식을 매년 성대하게 열면서 중국·인도·필리핀·대만·베트남 등지의 독립 운동가들을 초청했는데, 이때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을 '한국혁명과 세계혁명의 조류가 만난 획기적 시점'으로 규정하였다. 

백범 김구는 "마땅히 분발하고 가일층 노력하여 3.1운동을 완성함으로써 미완의 혁명대업을 완수해야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의미를 "3.1대혁명은 한국민족 부흥을 위한 재생적 운동이다. 달리 말해 이 운동은 단순히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운동만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이 5000년 이래로 갈고 닦아온 민족정기와 민족의식을 드높이자는 것이다"라고 더욱 확대시킨다.

백범 김구는 '3.1독립선언'을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의 차원을 넘은, 한민족 안에 있던 '정기'와 '의식'을 새롭게 살리는 운동으로 파악한다. 그가 얘기하는 '3.1대혁명'의 기본정신은 즉 5000년 이래로 갈고닦은 민족정신 네 가지는 ▲자존과 공존정신 ▲민주와 단결정신 ▲기개와 절의 및 도의 정신 ▲자신감과 자존정신이다. 이 같은 민족정신이 '3.1대혁명 중에 최고조로 발양되었다'라고 백범은 3.1절 24주년이 되는 해에 동포들에게 고하며, 이를 계승, 발양(發揚)할 것을 당부했다. 

3.1운동은 민주주의 운동을 함유한 범민족적 투쟁으로 3월 1일에 단순한 독립정신의 의미만을 넣을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3.1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른 것은 비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만이 아니었다. 해방 정국에서 쏟아져 나온 모든 언론은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자연스럽게 불렀다. 1946년부터 진행된 3.1기념식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불렀다. 

2019년 3.1혁명 100년, 대한민국 100년, 임시정부 100년의 해이다. 우리 헌법은 1948년 제헌헌법 이래 1987년 현행 헌법까지 아홉 차례나 바뀌지만, 전문에서 3.1운동이 빠진 적이 없다. 올해는 전국적으로 200만여 명이 참여했던 사상 최대의 민족운동 3.1운동이 100주년을 맞는 해다. 3.1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약속한 '민주혁명'이다. 

이민족(異民族) 전제(專制)와 군주정치(君主政治)의 동시타파! 그 원동력은 3.1이었고, 3.1 대중의 '핏방울'이었다. '혁혁한 혁명'으로서의 '3.1대혁명'의 요체이다. 비폭력투쟁이 변혁의 동력임을 세계사적 모델로 실증해낸 게 우리의 3.1이다. 그야말로 '맨손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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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혁명 당시 광화문 앞에 모인 인파. 출처=오마이뉴스.

# 대한민국 헌법과 3.1혁명 
 
​"3.1민족운동이라는 것이 일본정부의 유인(裕仁, 히로히토)정권 밑에서 제도를 고치자는 혁명이 아닙니다. 대한이 일본에게 뺏겼던 그 놈을 광구(匡救)하자는 운동인 만큼 혁명은 아닙니다. '항쟁'이라고 할지언정 혁명은 아니요. 혁명은 국내적 일이라는 게 혁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태조가 고려왕조를 전복시킨 것이 혁명이고, 갑오의 운동이 혁명운동이고 우리 조선이 일본하고 항쟁하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여기다가 '혁명'을 쓴다면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이 '혁명'글자를 변경해서 '항쟁'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조국현(曺國鉉) 국회의원, 제헌국회 속기록에서 
 
​해방 후 제헌국회의 헌법 조문 축조심의에서 '혁명', '항쟁', '운동' 등의 명칭이 논의되다가 '3.1운동'으로 결정됐다. 외세에 대한 저항을 '혁명'으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몇몇 의원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을 중국은 '5·4운동'과 함께 '5·4혁명'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3.1절이라는 명칭은 역사적 유산에 걸맞은 이름이 아니다. 5․10총선거 이후 헌법을 제정할 때, 전문 초안에도 '3.1혁명'으로 표현됐다. 그러나 한민당의 조국현 의원이 "독립운동은 혁명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3.1혁명이란 명칭에 거부감을 나타냈고, 기존의 '혁명'이란 명칭을 사용하던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후 '기미삼일운동'이란 명칭으로 헌법 전문 수정안이 제출되었고, 사회를 맡은 이승만이 토론을 막은 채 수정안을 표결에 붙여 '재석의원 157인 중 가 91, 부 16'으로 통과됨으로써 3.1운동이란 명칭이 사용됐다. 반일독립의 민족운동의 시야로만 3.1운동을 해석하게 된 것이다.1948년 제헌국회가 개원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완수하기 위한 헌법 제정에 돌입했을 때3.1혁명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이다. ​유진오를 중심으로 한 헌법기초위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는 문구로 헌법 전문을 초안했다. 3.1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고 곧 서른 명의 제헌 국회의원들도 찬동을 표했다.

그러자 이에 기존까지 3.1혁명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던 이승만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미삼일운동'이란 단어에 찬동을 표한다. 혁명이란 것이 국내의 정부를 번복한다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가 이 땅을 지배한 것을 두고 '혁명'이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논리에서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때 한인자유대회에서 3.1운동을 '1919년 혁명', '역사상에서 최초로 있었던 혁명', '비폭력 혁명', '새로운 혁명' 등으로 언급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욱이 3.1혁명이라는 표현은 중국 관내의 언론이나 진독수(陳獨秀)같은 지식인도 사용했고, 심지어는 미국의 매체에서조차 '혁명봉기(Revolutionary Uprising)' 등으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유구한 역사의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 제도를 수립하며…."
- 1948년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헌법수정안 
# 잠녀항쟁의 배후 혁우동맹 

1919년 3.1혁명 이후 제주도(島)에서도 항일운동은 전개되었다. 제주도 내의 사회주의자들은 1925년 3월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청년 운동이다. 신인회의 활동이 일제의 탄압을 받자 1925년 9월 제주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제주청년연합회는 청년 조직의 정비에 주력하고자 1928년 4월 10일 모슬포에서 제주청년연합회 총회를 열어 제주청년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로 핵심 인물이 체포되고 제주청년동맹과 지부의 집회가 봉쇄되는 등의 탄압으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그 중에서도 1933년에 결성된 '제주도농민조합 사건'으로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일제에 붙잡혀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으로는 가장 많은 인원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사회주의 청년들은 '혁우동맹(革友同盟)' 등의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소년 운동이나 잠녀항쟁, 동아통항조합, 농민운동 등 생산 현장에서의 반일 활동의 배후로 활동하였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야체이카운동이자  잠녀항쟁을 지도한 '혁우동맹 사건'. 잠녀들은 일어선다. 1930년 이후 펼쳐진 잠녀항쟁의 주체로 그들이 등장한다. 그건 스스로를 지키려는 생존투쟁이었으며, 거기엔 잠녀들의 의식이 깨어있었기에 가능했다. 

제주지역에서는 법정사 항일투쟁, 조천만세운동과 함께 잠녀항쟁을 3대 항일운동으로 부른다. 그러나 잠녀항쟁은 다른 항일운동과 달리 여성이 주체였던 어민투쟁이었다. 잠녀항쟁은 1931~1932년에 걸쳐 구좌·성산·우도의 잠녀들이 생존권을 침해하는 일제와 해녀조합에 항거한 여성어민집단의 생존권 수호를 위한 운동이었다.

더구나 여성이 주체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야학을 개설했던 사회주의 계열 혁우동맹 청년들의 역할이 컸다. 혁우동맹은 1930년 3월 세화리 문도배의 집에서 결성됐다. 사회주의 항일 단체로 강관순(康寬順), 신재홍(申才弘), 오문규(吳文奎), 문도배(文道培), 김시곤(金時坤), 김성오(金聲五) 등이 중심이 되었다. 

1932년 1월부터 구좌읍에서 잠녀항쟁이 일어나면서 비밀 결사가 탄로되어 관련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체포된 인물은 강관순을 비롯하여 김성오, 신재홍, 우봉준(禹奉俊), 이두삼(李斗三), 고자화, 정찬식(鄭贊植), 공덕봉(孔德奉), 고기창(高基昌), 강희준(姜熙俊), 양봉윤(梁奉潤), 윤대홍(尹大弘) 등이었다.

잠녀항쟁은 성산과 우도, 구좌 잠녀들을 중심으로 일제의 생존권 수탈에 항거하여 일으킨 운동이다. 이들은 혁우동맹 산하 하도강습소 1기 졸업생들로서 야학을 통해 민족교육을 받았던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차동(고순효), 김계석 등의 잠녀 대표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운동은 청년 민족 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잠녀항쟁을 단순한 생존권 투쟁의 차원에서 항일운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하였다.
 
# 4.3항쟁 도화선은 3.1절 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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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간으로 피신한 제주섬 사람들. 출처=Thoughts of Hyungjk 블로그.

항쟁(抗爭, resistance)은 국가 권력자들이 부당한 폭력을 휘두를 때 맞서 폭력을 쓰며 싸우는 것이다. 폭동은 사회에 폭력을 벌이는 것에 중점을 뒀지만, 항쟁은 특정 상대를 향해 맞서 싸우는 걸 말한다. 폭동이 감정 적에 더 가깝다면 항쟁은 이성에 따른 것에 가깝다. 

4.3항쟁의 도화선(導火線)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내에서 3.1혁명 시위 군중에게 경찰이 무차별 발포, 사상자를 내면서 비롯되었다. 바로 3.1혁명 기념일이 바로 4.3항쟁의 시발점이다. 3.1혁명 제28주년 기념대회에서 '3.1혁명정신으로 한국의 통일독립을 쟁취하자', '미국은 남한에서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평화적 집회를 가졌다.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답은 경찰 기마대의 무차별 발포였다. 결국 6명의 사망자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은 발포 사건을 정당 방위로 주장, 민심 수습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3월 10일부터 제주에서는 세계사에서도 드문 민관(民官)합동 대규모 총파업이 전개되었다. 이 파업은 발포 경관의 처벌, 경찰 수뇌부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 했다. 파업에는 제주도청을 비롯한 도내 165개 관공서 국영기업 단체들이 참여했다.  도내 초․중등학교가 항의 휴교를 했고, 상점들도 이에 동참해 문을 닫았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전 기관단체가 총파업을 실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제주출신 경찰관 일부가 파업에 동참했다가 파면당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본토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이 대거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군은 즉시 철수 하라!", "망국 단독선거 절대반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투옥 중인 애국인사 석방하라!" 

제주도지사가 외지 사람으로 교체됐고, 제주출신 경찰관들이 사표를 내거나 뒷전으로 밀렸다. 본토에서 파견된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조금이라도 불평하는 주민들은 무자비하게 연행․ 투옥·고문했다. 심지어 억지로 죄인을 만들아 금품을 갈취하는 등 백색테러가 잇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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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후 작가.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긴장 상황은 계속되었다. 4.3 발발 직전까지 1년간 2500여 명이 구금되었다. 특히 1948년 3월에 들어서면서 조천․ 모슬포 지서 등지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 사회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때마침 '5․10 단선' 결정으로 전국의 정치상항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좌파뿐만 아니라 김구․ 김규식 등 일부 우파와 중도파에서도 '5․10 단선' 반대 대열에 나섰다. 제주 민중 역시 5․10 단선 반대투쟁에 점화, 1948년 4월 3일 경찰관서를 습격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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