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5주년 특집-생존수형인 4.3을 말하다] ① 송순희 할머니, 4.3이 낳은 기구한 삶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 군법회의를 통해 민간인들이 전국의 교도소로 끌려갔다. 수형인명부로 확인된 인원만 2530명에 이른다. 생존수형인 18명이 70년만에 재심 청구에 나서면서 사실상 무죄에 해당하는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사법부가 군법회의의 부당성을 인정한 역사적 결정이었다. [제주의소리]는 창간 15주년을 맞아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전국 각지에 거주하고 있는 생존수형인들을 만나 당시 처참했던 4.3의 실상을 전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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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생존수형인 송순희(95) 할머니는 스물네살이던 1948년 가을 4.3의 광풍을 맞았다. 인천에서 만난 송 할머니가 70년전 그 기구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 사진은 30대에 찍은 사진.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이른 봄
쇠창살로
햇살이 숨어든다
 
어느 날 빨갱이 기집이라고 느닷없이 잡혀갔을 때 내 등엔 세 살짜리 딸이 업혀 있었고, 새 생명 하나 움트고 있었지. 이유도 물을 새 없이 몽둥이찜질 당했지. 비바람치던 어느 겨울 밤 난생 처음 배를 타 봤어. 어디로 가는 건지 왜 나를 끌고 가는지,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어. 죽음보다 더한 공포, 물을 수가 없었어. 동물적 본능이었을까 시퍼렇게 참던 아이. 맞은 다리 찢기어 썩어들고 진물 나고 흰 뼈가 다 드러나도록 신음 한 번 안낸 거야. 어미라는 작자가 제 세끼 아픈 것도 모른 거야. 마지막 의식인 듯 어미젖 부여잡고 싸늘한 입맞춤으로 작별인사 하고 갔어. 전주형무소 공동묘지, 거기가 어디였을까? 묻어두고 안동으로 이감되는 날, 벚꽃 핀 걸 보았어.
 
딸아이
옹알이처럼
내려앉고
있었어
 
 - 벚꽃이 피면 (김영란作)
 
4.3생존수형인 송순희(95) 할머니와 마주 앉은 김영란 시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예순을 훌쩍 넘긴 딸들의 얼굴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70년 전 엄마 모습이었다.
 
인천에서 만난 송 할머니는 아흔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굴곡진 인생사를 쏟아냈다. 4.3의 광풍 속에서 한 여자가 겪은 기구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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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생존수형인 송순희(95) 할머니는 스물네살이던 1948년 4.3 당시 폭도로 내몰려 갖은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당시 뱃속에는 셋째딸, 등에는 세 살배기 둘째 딸이 업혀 있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송 할머니는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출신이다. 열일곱 살이던 1941년 제주에 주둔한 일본군들이 마을 처녀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체력이 좋은 송 할머니는 그때도 돋보였다.
 
군사훈련 1년 후 청년들은 일본 북해도로 보내졌다. 이후 살아 돌아오는 이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결혼한 여성은 차출에서 열외 시킨다는 소문에 송 할머니도 서둘러 짝을 만났다.
 
남편은 옆 동네인 의귀리 출신 훈남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뒷날 학업을 마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졸업 후 1년이 지나서야 새색시 앞에 나타났다. 당시 송 할머니는 19살이었다.
 
애처가인 남편과 두 딸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4.3의 광풍은 피해가지 못했다. 1948년 10월 출장을 간다던 남편이 자취를 감췄다. 시집을 찾아가도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는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시작되면서 조용했던 마을은 불바다로 변했다. 총칼을 피해 사람들은 숲과 궤(바위동굴)로 몸을 숨겼다.
 
첫째 딸은 할머니 손에 이끌렸다. 송 할머니는 세 살배기 둘째딸을 등에 업고 중산간 내창(하천) 옆 궤로 몸을 피했다. 해가 지면 마을로 돌아가 남편을 수소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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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에서 만난 제주4.3생존수형인 송순희(95) 할머니가 30대 시절 찍은 사진을 꺼내 보이며 4.3 당시 겪은 기구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며칠 후 마을 아낙들이 숨어 지내던 산 중턱에 총을 든 군인과 경찰들이 나타났다. 닥치는 대로 대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노인, 여성도 가리지 않았다.
 
“내 옆에 세 살짜리를 업은 여자가 또 있었어. 군인이 대검으로 허벅지를 찌르더라고. 피가 쏟아지고 끌고 갈 수 없으니 총으로 쏴 죽였어. 애기는 데려가다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송 할머니는 토평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갔다. 구경 나온듯한 사람들이 세 살배기를 등에 업은 송 할머니를 향해 ‘빨갱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송된 서귀포경찰서에서는 매질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으로 쌀을 몇 가마니 올렸냐는 추궁이 이어졌다. ‘먹을 쌀도 없는데 뭘 올리냐’ 싶었다. 순간 몽둥이가 쉴 새 없이 온몸을 강타했다.
 
어깨를 패더니 분에 안 찬 듯 허리를 마구 두들겼다. 매질을 당할 때 등에 업은 둘째 딸의 다리가 난타를 당했다. 어린 아이의 다리 살이 뜯기고 하얀 뼈가 훤히 드러났다.  
 
다시 제주경찰서로 끌려갔다. 몸이 이상했다. 그제서야 뱃 속에 셋째가 꿈틀 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피멍이 든 엄마 몸뚱이에, 다리에, 피범벅이 된 딸까지 앞날이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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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생존수형인 송순희(95) 할머니는 4.3 당시 모진 폭행과 고문을 겪은 뒤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그 곳에서 등에 업은 둘째를 먼저 떠나보냈다. 안동형무소로 이감된 후에는 옥중에서 셋째를 낳았다. 출소 후 재혼 했지만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이 살아 돌아왔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불법적인 군법회의를 거쳐 송 할머니는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전주형무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의 죄명과 형량을 정확히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주형무소에 도착하니 둘째 딸이 점차 의식을 잃어갔다. 살이 썩어 곪아들어갔지만 형무소에서 치료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입소 20일 후 그렇게 둘째는 차디찬 주검으로 엄마 품을 떠났다.
 
이듬해 3월 송 할머니는 동료들과 안동형무소로 이감됐다. 화차를 타고 가는 길, 차창 밖으로 벚꽃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떠나보낸 둘째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산에서 교도소로 끌려 올 때까지 제대로 먹이지도 못했지. 간수도 살이 썩어가는 아이를 보면서 울었어. 불쌍하다고. 그리고 죽은 아이를 데리고 갔지. 거기가 형무소 공동묘지였어...”
 
송 할머니는 그해 여름 안동형무소에서 셋째 딸을 낳았다. 함께 수감됐던 제주 출신의 한 50대 아주머니가 아이를 받았다. 출산 소식에 교도소에서 미역으로 채워진 국을 내놓았다.
 
둘째를 떠나보내고 셋째를 품에 안은 형무소 생활은 형량보다 두 달 빠른 1949년 10월 끝이 났다. 기차를 타고 목포를 거쳐 목선에 올랐다. 고향 제주로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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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에서 만난 제주4.3생존수형인 송순희(95) 할머니가 30대 시절 찍은 사진을 꺼내 보이며 4.3 당시 겪은 기구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쑥대밭이 된 집 대신 제주시 화북의 고모댁으로 향했다. 남편의 생사를 물었지만 역시나 행방불명이었다. 시어머니까지 돌아가시면서 첫째 딸은 새로운 가정의 수양 딸이 돼 있었다.
 
가슴이 턱턱 막히던 순간, 이번에는 셋째 딸이었다. 엄마 뱃속에서 고문과 폭행을 함께 견뎌냈지만 거기까지였다. 결국 세상에 나온지 7개월만에 둘째 언니를 따라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가족과 남편, 아이 셋까지 잃고 홀로 된 송 할머니를 향해 시삼촌은 재가를 권유했다. 1남 2녀를 둔 제주 출신 남자와 만나 인천에서 살기로 약조했다.
 
6.25가 터지고 몇 달 뒤 아이가 들어섰다. 새 가정을 꾸려 인천으로 향하려던 찰나, 재가를 권했던 시삼촌이 남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먹먹한 가슴을 두드리며 제주를 떠났다. 1959년 동생 결혼식 참석차 제주를 찾은 그때, 전 남편과 조우했다. 오매불망 찾아나선지 11년, 재혼과 함께 제주를 떠난지 8년이 지난 때였다.
 
“다시 만났는데 말이 안 나오더라고. 남편은 술을 먹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지. 남편도 재혼해서 애를 낳았어. 우리가 시국을 잘못 만난거지. 그 사람, 결국 얼마 못가 죽었어”
 
“참 기구하지. 마지막 소원? 소원이 뭐 있나. 4.3같은 세상이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4.3으로 내 인생을 다 버렸어. 내 세상을 모두 다 버렸어. 그게 억울하지. 억울해...” / 인천=김정호 기자
 
▲ 제주4.3생존수형인 송순희(95) 할머니 왼손에 끼워진 결혼 반지. 송 할머니는 전주형무소에 수감돼 그곳에서 등에 업은 둘째를 먼저 떠나보냈다. 안동형무소로 이감된 후에는 옥중에서 셋째를 낳았다. 출소후 재혼 했지만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살아 돌아왔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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