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 출판부 번역서 '20세기의 대량학살과 제노사이드'

▲ 1952년 군 지프를 타고 제주도를 순시중인 이승만 대통령. 뒷줄은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과 제1훈련소장 장도영 준장. ⓒ 국가기록원 소장.
1948년 12월 9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는 92개 회원국의 찬성을 얻어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하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학살의 공포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기뻐했던 바로 그 날, 한반도의 남단 제주에서는 '반도(叛徒)'들에 대한 토벌작전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영문을 모른 채 죽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유엔이 '협약'을 통해 보호하고자 했던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었다.

▲ 원제:Final Solutions : Mass Killing and Genocide in the Twentieth Century(벤자민 발렌티노 저/장원석,허호준 역/제주대학교출판부/1만5000원)
그로부터 2년 뒤인 1950년 10월 14일 한국은 '협약'에 가입했지만 지금까지도 협약이 실효를 거두기 위한 이행 입법을 제정하지 않고 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대량학살은 피할 수 없는 사태인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대량학살의 시대'였던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가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대량학살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도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카나마을에 대한 공습으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학살되면서 세계가 경악했다. 인류의 학살은 피할 수 없는 일인가. 그렇다면 대량학살의 원인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제주대 출판부가 펴낸 '20세기의 대량학살과 제노사이드'(벤자민 발렌티노 지음, 장원석.허호준 옮김)는 이에 대한 답을 엿볼 수 있는 이론서로 꼽힌다. 제노사이드 관련 이론서로서는 '현대사회와 제노사이드(2005.제주대 출판부)'에 이어 두번째.

대량학살에 대한 이해가 광범위한 사회구조적 요인 대신에 소수의 정치, 군사 지도자가 취했던 전략적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모색한 이 책은 대량학살의 역사적 사례들을 추적해 이론화했다.

"지금까지 제노사이드나 대량학살과 관련된 설명은 사회구조, 정부형태 또는 해당 사회의 집단심리 속에서 사건의 원인을 찾으며 통찰력을 제공하고는 있지만 중대한 한계를 보여줬다"는 저자는 "역사상 최대의 유혈사태를 낳은 몇몇 대량학살은 상대적으로 동질적 사회속에서 발생했으며 따라서 인종적, 종족적, 민족적, 종교적 분열과 같은 구조적 요소들은 신뢰할 만한 지표를 주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 미 육군역사연구소 윌슨 컬렉션에서 발견된 사진으로 형무소 집단 학살 현장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제노사이드'라는 정의가 지닌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대량학살은 "대규모의 비전투원들에 대한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정의한다. 특히 그는 대량학살의 3가지 개념 요소를 구체화했다.

첫째 대량학살은 의도적이어야 하며 둘째, 5년 이내에 적어도 5만명 이상의 '대규모' 죽음을 의미한다고 규정했다. 그렇다고 제주4.3과 같이 2만~3만여명이 희생된 것을 '대량학살'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수적 논의가 소규모 집단들에게 가해진 위협이 연구할 가치가없거나, 이들 집단이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세째, '비전투원'은 조직화된 군사집단의 구성원이 아니며 가담하지 않은 비무장 민간인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저자는 3가지의 특징을 학살의 동기로 제시했다.

먼저 ▲ 대량학살은 자신의 이익, 사상, 증오, 두려움, 오해 등에 따라 활동하는 비교적 소수의 강력한 정치 지도자들이나 군사 지도자들에 의해 대체로 기획되고 조직되며  ▲ 또 소집단들이 대량학살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균열, 증오와 차별, 비민주적 정부 형태와 같은 사회일반의 특성은 대량학살의 위험에 처해 있는 사회를 식별하는데 제한적인 효용을 가질 뿐이라고 말한다.

특히 ▲ 대량학살은 대개 도구적, 전략적 계산에 의해 추진돼 가해자들은 대량학살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다고 지적했다

저자의 대게릴라전 대량학살 이론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과테말라와 아프가니스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제주4.3 진압과정에서 나타난 대테러, 강제이주(소개), 초토와 작전, 선무활동 등의 전략은 대게릴라전 전술로서 세계 도처에서 진압군이 사용했던 보편적인 작전이고 현상이었다.

'4.3에 대한 관심의 확장' 차원에서 번역을 맡은 장원석 제주대 교수(정치외교학과)와 허호준 제주대 평화연구소 특별연구원(한겨레신문 기자)은 "4.3당시 수많은 섬 사람들이 학살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 학살이 이뤄진 사회적, 정치적 구조는 무언인지에 대해 고민했다"며 "제주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의 근본적 원인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서로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4.3의 전개과정에서도 나타나듯이 이 이론서는 제주4.3 당시 수만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된 이유를 단편적으로나마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역자들은 말한다.

이는 발발 동기와 진행과정의 체계성, 파괴의 정도와 결과를 살펴볼 때, 4·3은 역사상 수 없이 발생했던 집단학살의 일부가 아니라 근대국가의 탄생 이후 등장한 가공할 제노사이드의 한 가지 사례로 받아들여지는 추세를 반영한다.

 즉, 4·3은 냉전이 고조된 시기에 미국의 후원을 받는 가운데 이승만 정권이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실행에 옮긴 억압적 성격의 정치적 제노사이드였다는 추적이 가능하다.

하지만 북촌리 대학살 사건 대 '적 사살 경험'을 쌓게한다는 명분으로 하루에만 300여명이 넘는 남녀노소를 학살한 군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지는 앞으로도 여전히 풀어야할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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