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50년 전 헨드릭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한 사건은 조선만이 아니라 변방의 섬 제주도가 세계에 알려진 첫 계기를 이루었다. 이후 제주도는 19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서구 열강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해안 측량과 기독교 선교의 목적으로 서양인들이 다수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서양인들은 제주도를 향후 일방적인 교역시장이나 선교 대상으로 삼았을 따름이었다. 첫 접촉의 의미는 있을지언정 상호 교류를 전제로 하는 문화적 접촉은 아니었던 것이다.

19C, 시장확보를 위해 온 서양인

예컨대 제주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발발한 1901년의 소위 ‘이재수란’의 경우, 일방적인 프랑스 선교사의 포교 방식에 의해 제주도의 전통사회와 문화가 억눌려지는 상황 속에서 전 제주도민의 저항과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혀 외부문화에 대해 수용의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조선정부와 인민들의 태도에 근본 원인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못지않게 외부에서 들어오는 서양세력의 경우도 조선과 제주도를 무시하고 바라보는 전통적 입장에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진 나가사키의 교역

반면 하멜이 표착하였던 17세기에 나가사키를 통한 부분 개방을 허용했던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 비록 교역의 통로를 한정하기는 했지만, 이 통로가 주는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 구멍을 통해 일본에서는 의학ㆍ천문학ㆍ식물학ㆍ어학 등을 축으로 한 난학이 발달했고, 난학은 일본의 전통학문(유학ㆍ국학)과 더불어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의 다양성 위에서 19세기 중반 개항을 수용하고 메이지 유신을 주체적으로 추진해 갈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교훈으로 삼는다면, 향후 하멜 표착기념사업도 한국, 특히 제주도와 네덜란드와의 같은 레벨에서의 문화적 교류를 전제로 하면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하멜과 제주도와의 접촉의 의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점이다.

하멜 표착로는 고대 동북아인의 해양 루트

하멜 기념사업 추진에 맞추어 「남중국-제주-일본 항로」에 대한 재고찰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이 문제는 제주의 고대사ㆍ중세사와 관련해서도 중요하다. 제주도의 역사에는 엄연히 독립된 고대국가 ‘탐라’가 존재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해안을 봉쇄하고 심지어 육지로 나아가는 것을 금지해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는 바다를 무대로 활동했던 해양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해양사로서의 제주역사는 좁은 영토의 네덜란드가 바다를 무대로 활동해 왔던 역사와 연관시켜서도 비교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멜이 타이완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던 중에 제주에 표착했던 이 루트는 단순한 표착의 길이 아니라, 과거 제주 사람들이 밟았던 바닷길이며, 동북아시아의 상인들이 거쳐 갔던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멜 표착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 「남중국-제주-일본 항로」의 바닷길을 재탐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네델란드와 제주 해양 문화 조화가 바람직

최근 하멜 상선이 복원되고, 전시관이 개관되는 시점에서 지방언론의 관심은 다시금 표착지가 어디냐에 집중되고 있다. 그 초점은 지금의 산방산 용머리를 표착 지점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점은 제주대학교의 김동전 교수와 강원대학교의 신동규 박사가 실증적으로 검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표착 지점이 당시 대정현 관할인 것은 하멜표류기와 조선측의 각종 기록를 대비해 보았을 때 명백하다. 헌데 그 정확한 지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대정현 관내에서 표착을 대표적으로 상징해주는 장소를 선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일면 이해된다.

오히려 한라산이 우뚝 솟아있는 제주섬 전체가 표류자에게 구원의 등대 역할을 했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세부적인 장소 논쟁이 썩 유익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정확한 위치의 선정은 학계에 남겨진 몫이라 하겠다. 이러한 표착 지점 논쟁은 순수 학술 논쟁으로 전개되어야 하지, 자칫 지역 주민들 간의 감정싸움에 이용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만 제주의 해양문화를 깡그리 무시하고 네덜란드 문화만 전시하겠다는 발상이나, 용머리 지구 일대의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개발 위주의 사업 추진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2003년 8월 18일(월)
<박찬식의 역사와 현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