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88년 2월 하순. 서울 종로 2가의 뒷골목 허름한 술집. 27세의 젊은 청년과 회갑을 1년 앞둔 반백의 어른이 한쪽 켠에 자리잡고 앉았다. 대학 졸업식을 마치고 부자(父子)가 술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아들은 그 동안 입지도 못했던 양복 정장 차림이었다. 그래서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들은 어려웠었지만 제법 직장도 마련한 상태였다. 그런데 장소가 아들의 새 출발을 축하해주기에 좀 칙칙했다.

술이 서너 잔 돌고 나서 부친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경계해야 할 말씀을 주시겠단다. 아들은 잔뜩 긴장했다. 워낙 부자간에 대화가 없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부자연스러웠지만 부친의 진지한 모습에 아들은 정신과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자 그 동안 말씀이 없으셨던 부친의 경구(警句)나 마음 한 구석에 새겨보자꾸나!'

그런데 이건 웬걸. 고상한 말씀부터 서두를 장식하지는 않았다. 한 잔 술을 들이켜고 부친은 경험담을 먼저 쏟아 낸다. 부친의 과거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던 아들이었다. '꼬마'라는 표현으로 자식을 소개해왔던 부친이었다. 거기에는 '철부지 네가 내 지난날의 청년시절을 이해나 하겠는가!' 라는 심사가 은연중에 배어 있었던 듯했다. 부친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지난 날 제주에서 살아오면서 삶의 철학으로 굳어져버린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뭔고 하니 바로 체념(滯念)이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무엇보다도 해방공간과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춘을 보냈다. 한국전쟁에도 참전을 했다. 중간에 잠시 언로(言路)가 트인 적도 있었지만 곧 군사정권으로 이어졌다. 무엇 하나 정상적인 진행이 없던 시절의 연속이다. 그런 속에서 내 생각, 내 이념, 내 삶의 방향 어느 하나 터놓고 토로하지 못해 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속내를 감추어야 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이 다 가고 있다. 따라서 너에게 한 가지만은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다. 꼭 유념하거라."

부친의 말씀은 다음에서 끝을 맺었다.

"살면서 항상 최악의 조건을 상정하여 거기서부터 시작해라!"

이제 2003년 8월, 아들은 40대 초반의 장년이 되었다. 부친의 응어리진 생각을 이제는 풀어드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최소한 자신만이라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아들의 각오는 점점 마음속에서 뛰쳐나와 큰 울림을 낸다.

"유·무형의 압력에 결코 자신을 내버리지 않겠다. 내 목소리를 내며 살겠다. 아니 제주민의 소리를 외쳐야겠다. 두 번 다시 부친처럼 제주민들이 체념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용인하지 않으리라. 권력(權力)이, 자본(資本)이, 분단(分斷)이 가로막을지라도…."

2003. 8. 18(월)

<홍기표의 제주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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