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다가온 제주의 꽃들(33)

이번에 소개해 드릴 꽃은 새의 이름을 닮은 '박새'입니다. 식물 이름에 '새'(鳥)와 관련된 이름이 있는 것들도 많은데 매발톱꽃, 꿩의 다리, 까치취,두견화(진달래),까마귀오줌통, 제비꽃. 방울새난 등 재미있는 이름들이 많습니다.

박새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해(2003년) 이른 봄이었습니다. 중산간도로변의 숲을 산책하던 중 눈 속에서 새 순을 내는 푸릇한 싹을 보고는 무슨 란(蘭) 종류인가 했습니다. 란종류라면 가리지 않고 캐가는 사람들 때문에 뿌리를 내리고 한 곳에 있기도 힘이들었을 터인데 옹캐도 버텼구나 했는데 날이 다르게 쑥쑥 자라더군요.

▲ 4월초 박새의 꽃몽우리.
그렇게 쑥쑥 봄바람과 봄비, 그리고 간혹은 꽃샘추위와 때늦은 폭설로 갖은 고난을 다 겪으면서도 피어나는 박새를 보니 아마도 1948년 4월의 어느 햇살 따스한 날 중산간에 몸을 피해 있었던 그 누군가도 이 꽃의 싹을 보고, 조금 이르게 피어난 꽃도 보았겠구나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고, 그런 생각에 미치니 너무도 무성하게 피어난 복수초나 현호색, 개별꽃, 섬세신, 노루귀 등의 만개한 모습을 보기 위해 조심조심 발을 옮겨도 언젠가 밟혀 짓물러지는 박새의 이파리에게 미안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짓밟혀도 피어나리라.
그의 생명력을 믿기도 하고, 또 그렇게 자연의 상태에서 자라는 것들은 오히려 밟히면 밟히수록 강인해 진다니 일부러 밟을 필요는 없겠지만 무심코 밟게 되는 것들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은 덜 수 있을 듯 합니다.

박새의 꽃은 5월초부터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무던히 오랜 시간 준비를 한 셈입니다. 그 뿌리로 동면을 한 계절을 뺀다고 해도 겨우내 쌓인 눈이 녹기 전부터 싹을 내기 시작하고, 기다란 줄기를 내고 수많은 꽃망울들을 다느라 시간이 걸렸는지도 모를일입니다. 그렇다해도 싹을 낸 후 꽃을 피우기까지 최소한 3개월 여의 시간인데 그렇게 공들여 피운 꽃이라면 화려할 만도 한데 그저 아이보리색도 아니고 푸른빛이 도는 수수한 꽃을 올망졸망 피우고는 숲 속의 그늘진 곳에 수줍은 듯 숨어있으니 마치 시골의 수줍음을 잘 타는 아낙을 보는 듯도 합니다.

▲ 5월초 개화가 시작된 박새.
그런데 그렇게 수수하게 보인다는 것이 그렇게 큰 매력일런지 몰랐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한 송이 한 송이 보니 꽃 마다 그렇게 예쁘고 여물진지 이렇게 예쁜 꽃이 이렇게 산에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지난 해 태풍 매미가 왔을 때 성판악에는 폭우도 내렸습니다. 그 후에 만난 박새는 쓰러지고, 찢겨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쓰러진 가운데에서도 다 헤어진 꽃을 화들짝 피우고 있는데 그 꽃이 주는 아름다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아, 시골 아낙같이 그렇게 수수하더니만 그 살아가는 모습도 그를 닮았구나!'

그냥 바람이 불면 바람부는대로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그 순수함만은 어느 누구도 해할 수 없다는 듯 피어난 박새는 어쩌면 제주 민중들의 삶을 닮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역사의 격동기에는 늘 끈질기게 투쟁을 했던 제주 민중들의 삶을 닮았습니다. 멀리는 삼별초항쟁, 항일항쟁, 그리고 4.3항쟁 등 굵직한 역사를 이끌어오고 오늘 우리가 있게 한 그 역사의 주체는 바로 전면에 나서지 않던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 5월중순, 줄기마다 무성한 박새의 꽃.
봄의 꽃, 여름꽃들은 대체로 화사합니다.
앙증맞기도 한 꽃들이 많은데 그렇게 오랜 시간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을 했으면서도 수수하게 피어나 숲 속의 그늘에 수줍은 듯 피어있는 박새, 그 박새의 아름다움이 참 돋보이는 초여름입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