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다가온 제주의 꽃들(33)
박새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해(2003년) 이른 봄이었습니다. 중산간도로변의 숲을 산책하던 중 눈 속에서 새 순을 내는 푸릇한 싹을 보고는 무슨 란(蘭) 종류인가 했습니다. 란종류라면 가리지 않고 캐가는 사람들 때문에 뿌리를 내리고 한 곳에 있기도 힘이들었을 터인데 옹캐도 버텼구나 했는데 날이 다르게 쑥쑥 자라더군요.
그렇게 짓밟혀도 피어나리라.
그의 생명력을 믿기도 하고, 또 그렇게 자연의 상태에서 자라는 것들은 오히려 밟히면 밟히수록 강인해 진다니 일부러 밟을 필요는 없겠지만 무심코 밟게 되는 것들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은 덜 수 있을 듯 합니다.
박새의 꽃은 5월초부터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무던히 오랜 시간 준비를 한 셈입니다. 그 뿌리로 동면을 한 계절을 뺀다고 해도 겨우내 쌓인 눈이 녹기 전부터 싹을 내기 시작하고, 기다란 줄기를 내고 수많은 꽃망울들을 다느라 시간이 걸렸는지도 모를일입니다. 그렇다해도 싹을 낸 후 꽃을 피우기까지 최소한 3개월 여의 시간인데 그렇게 공들여 피운 꽃이라면 화려할 만도 한데 그저 아이보리색도 아니고 푸른빛이 도는 수수한 꽃을 올망졸망 피우고는 숲 속의 그늘진 곳에 수줍은 듯 숨어있으니 마치 시골의 수줍음을 잘 타는 아낙을 보는 듯도 합니다.
지난 해 태풍 매미가 왔을 때 성판악에는 폭우도 내렸습니다. 그 후에 만난 박새는 쓰러지고, 찢겨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쓰러진 가운데에서도 다 헤어진 꽃을 화들짝 피우고 있는데 그 꽃이 주는 아름다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아, 시골 아낙같이 그렇게 수수하더니만 그 살아가는 모습도 그를 닮았구나!'
그냥 바람이 불면 바람부는대로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그 순수함만은 어느 누구도 해할 수 없다는 듯 피어난 박새는 어쩌면 제주 민중들의 삶을 닮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역사의 격동기에는 늘 끈질기게 투쟁을 했던 제주 민중들의 삶을 닮았습니다. 멀리는 삼별초항쟁, 항일항쟁, 그리고 4.3항쟁 등 굵직한 역사를 이끌어오고 오늘 우리가 있게 한 그 역사의 주체는 바로 전면에 나서지 않던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앙증맞기도 한 꽃들이 많은데 그렇게 오랜 시간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을 했으면서도 수수하게 피어나 숲 속의 그늘에 수줍은 듯 피어있는 박새, 그 박새의 아름다움이 참 돋보이는 초여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