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현장을 가다] 빵은 준 게 아니라 제조법을 가르쳐 준 칠레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지 한달여. 일반농민들은 FTA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대부분의 농민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칠레 농산물이 국내에 들어오면 우리농업은 위기에 빠진다'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이미 농민뿐만 아니라 전 국민들의 관심사였던 한국 최초의 FTA 당사국인 칠레는 어떤 나라인지, FTA로 인한 농업전략 수립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펼쳐야 하는지에 대한 이렇다 할 자료조차 없는 게 우리 농업의 현주소이다.

칠레 현지 취재를 통해 칠레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에 대해 심층 접근하고 칠레 농정당국과 생산자, 다국적기업으로부터 농업정책과 수출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 칠레, 어떤 나라인가

칠레의 중심도시인 산티에고에서 만난 칠레 교포인 김상철씨는 "칠레는 지형적으로 매우 특이한 나라다. 세로로 길고 가로로 좁은 지형의 칠레는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로 4200km의 길이와 평균 177km의 넓이를 가졌고 남미의 남서부 해안을 끼고 안데스 산맥을 타고 내리면서 태평양을 안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지리적인 이유로 북부에서는 사막과 아열대기후, 중부에서는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남부에서는 춥고 장마진 기후가 나타난다"며 "지리적여건과 다양한 기후로 인해 다른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동식물이 있으며 많은 종류의 과일이 생산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씨에 의하면 칠레의 산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고 한다. 그중 첫째는 구리를 포함한 광업으로 칠레산업 전체의 50% 가량을 차지하며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 구리 이외에도 철광석과 초석, 몰리브덴의 비중도 높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가 30% 정도 차지하는 농업과 임업이다.

칠레는 자연조건이 포도와 사과, 멜론, 복숭아, 키위 등 다양한 과일재배가 가능하고 길게 뻗은 지형 탓으로 남부와 북부의 생장기가 교대로 반복되기 때문에 매우 유리한 환경이다. 세 번째가 수산업. 수산업의 비중은 20% 정도이며 길게 뻗은 해안선과 풍부한 자원의 보고인 남극을 소유하고 있어 수산물 어획량이 매우 많으며 대부분 고단백 가축사료인 어분으로 가공되고 있다.

칠레는 현재 미국과 한국을 포함해 캐나다, 멕시코, EU 15개국 등과 자유무역협정을 맺고 있으며 볼리비아, 콜롬비아, 페루, 브라질, 이르헨티나, 우루과이,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등과 경제보완협정을 체결했다.

▲ 칠레 과일, 정말 위협적인가

칠레농업을 제대로 보기 위해 일반 포도농장과 과일전문 유통업체를 방문했다. 사실 칠레에서 일반농장과 유통업체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대부분의 농장들이 생산과 유통 모두를 하고 있는데다 자체브랜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들 농장들은 자체적으로 수출을 위한 전담부서를 만들어 생산량의 70% 이상을 해외로 수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농장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대부분의 칠레 농촌지역의 주민들은 이러한 농장들의 직원들이다. 대도시 일반회사의 월 급여보다 보수가 많고 전망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칠레 과일농장 방문을 통해 칠레농업의 현주소를 가늠해본다.

# 바라몬떼 포도농장

산티아고에서 버스로 한 시간정도 걸려 도착한 곳은 '카사브랑카'라는 농촌지역. 이미 이곳에 다다르기 전부터 포도농장이 눈에 띠었다. 칠레 현지인이 주인이고 미국인과 동업을 하고 있다는 '바라몬떼'농장의 면적은 3000ha. 약 9백만평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포도농장이다. 이 농장은 1992년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해 4년 후인 1996년에 첫 수확을 했다.

▲ 칠레 포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레네 이바스게스씨.
농장관계자는 "그리 큰 포도농장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생산된 포도로 직접 와인을 만들어 세계시장에 수출한다"고 말하고 "포도의 당도가 21~23도 정도로 높고 품질이 좋아 생산되는 와인도 명성이 높아 꽤 인기 있는 포도농장 중 하나"라고 농장을 소개했다.

농장관계자는 "전체 3000ha중 400ha 정도에 포도나무가 심어졌고 3~5월 사이에 수작업과 기계작업을 병행해 수확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지금은 약간의 화학비료를 사용하고 있지만 4년후에는 모든 면적에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재배할 계획으로 있으며 일부 면적에는 유기농업을 하고 있다"이라고 강조했다.

농장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레네 이바스게스씨는 "와인의 경우 수확시 조금씩 품질이 다르기 때문에 선별?가공공정에서 같은 품질로 만든다"며 "우리 농장에서 25만 상자를 생산해 90%정도를 외국으로 수출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주요 수출국은 미국과 유럽이며 수출과 관련한 업무는 모두 자체 전담직원들이 직접 처리한다"고 말했다.

이 농장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모두 200여명으로 생산과 관리, 기획(마케팅), 금융 등 4개 부서에 소속돼 있다.

이바스게스씨는 농업전문직에 대해 "이 나라에서 가장 권해주고 싶은 게 농업전문직"이라며 "와인용 포도의 경우 ha당 12톤 정도를 생산하는데 1톤당 1000불 정도의 매출이 발생하므로 ha당 12000불의 매출을 올릴 수 있고 4000불 정도의 관리비용과 생산원가를 제하고 나면 나머지 8000불은 소득"이라고 강조하고 "월평균 250불 정도의 일반근로자 봉급을 고려하면 꽤 높은 소득이며 농업은 매우 전망이 밝다"고 힘있게 말했다.

# 로바제도르시장

수출농산물을 제외한 과일과 야채가 반드시 거쳐간다는 로바제도르시장. 아침 일찍 이곳을 둘러보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경매제도가 없는 칠레에선 과일의 95%가 외국으로 수출되고 5%만이 국내에 소비되고 있어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시장 책임자인 '게르만 파운데스'씨는 "이 시장의 총 규모는 7만2000평이며 일일취급물량이 과일 100톤과 야채 120톤이 매일 이곳을 거쳐서 소비자들에게 공급된다"며 "이 시장의 주인은 상인들이다. 800여곳의 과일과 야채가게 주인들이 조합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며 독특한 시장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 게르만 파운데스씨가 칠레 국내농산물 유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파운데스씨는 "7만2000평 규모의 광할한 면적의 주인은 모두 상인"이라며 "시장운영을 위한 사무실과 각종 경비는 과일과 야채를 싣고 오는 트럭들로부터 받는 주차비로 모두 충당된다"고 말하고 과일의 생산조정에 대해 묻자 "생산자들이 정하는 것이지 유통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고 의아해 했다.

400kg이 들어가는 거대한 과일상자에는 사과와 배, 키위, 자두, 감귤 등 여러 종류의 과일이 자리 잡고 있었고 아침시간인 만큼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장을 돌아보면서 취재기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칠레자국 내에서 판매되는 사과와 배, 키위의 경우 400kg 큰상자가 8만원정도에 판매되고 있었고 자두는 4만원이었다.

5월 6일 현재 서울 가락동농수산물시장에서 사과(후지?상)가 15kg 상자당 5만8000원 정도에 거래되는 점을 감안하면 20배 이상 싼 가격이다.

칠레의 최대 농산물시장인 '로바제도르시장'은 민간에 의해 생산자와 상인이 모여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곳이다. 순수하게 민간자본에 의해 자생적으로 설립된 시장이지만 농산물의 흐름이 원활하고 거래가 매우 잘 이뤄지며 연중 농산물 가격변동이 거의 없다는 게 시장책임자의 설명이다.

생산자단체인 농협 등에서 설립해 운영하는 전국의 농산물공판장과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자유시장 경쟁체제 하에서 칠레농민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자율적인 유통시스템에 의한 효율적인 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로바제도르시장. 키위와 포도 등이 400kg 상자에 가득 쌓여 있다.

# 우니쁘리띠(Unifrutty)

산티에고 시내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에 '리나레'라는 곳에 위치한 우니쁘리띠. 이태리 계열의 기업으로 설립된 지 8년된 제법 규모가 큰 회사다.

당초 칠레과일을 수입하던 회사였으며 8년전 아예 칠레 현지에다가 회사를 설립했다. 현재 이 회사는 칠레 전 지역에 7개의 농장을 소유하고 있어서 생산은 물론 선별과 수출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스템이 일원화 돼 있다.

▲ 생산에서부터 수출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설명을 해준 호르혜 오피스씨.
이 회사의 기술담당 매니저인 '호르혜 오피스'씨는 "복숭아와 자두, 포도, 키위, 체리, 배 등 사과만 빼고 모든 과일을 취급하고 연중 작업이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3~4월에 포도와 자두작업을 하고 4월부터 키위작업에 들어가는데 10월까지 작업을 한다"며 "10월 이후에는 복숭아와 기타 과일작업을 벌이기 때문에 연중작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특히 여기서 생산된 키위는 전량 수출을 하며 이미 한국에도 수출을 하고 있었다.

호르혜 오피스씨에 따르면 "칠레에는 기업형 수출농가가 200~250여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고 "우리처럼 대규모로 운영되는 곳은 5개 정도며 그 중 우니쁘리띠가 2~3번째 정도로 규모가 큰 편"이라며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최상의 품질이 중요한 것이고 우리 회사 투자자들도 모두 과일산업에 종사하던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우니쁘리띠는 칠레를 비롯해 이태리, 필리핀, 터키, 미국 등지에도 회사가 있으며 유럽에도 유통망이 있고 중동지역을 매우 중요한 수출시장"이라는 호르혜 오피스씨는 "칠레의 기업농들은 자체적으로 수출국가들이 있고 우리처럼 규모가 큰 회사는 전 세계 곳곳에 농산물을 수출한다"며 "우리의 경우 북미로 15~20%, 라틴아메리카 20%, 유럽 15~20%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들은 아시아권에서는 키위열매가 큰 것을 원하고 남미에서는 작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수입국가 취향에 맞춰 보내고 있으며 신선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 우니쁘리띠의 키위 선과 장면.
최근엔 뉴질랜드에서 개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골드키위를 자체 개발해 세계시장에 내 놓을 예정으로 있어 생산과 판매뿐만 아니라 우수한 품종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니쁘리띠'는 키위를 5~6개월 정도 저장하는데 수확 당시 30℃정도인 키위를 2℃ 정도로 급냉시켜 장기간 저장한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도 "한국은 칠레와 더불어 양국간 이익을 볼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며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아시아시장이 주요 시장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밝혔다.

▲ 키위품질규정집. 약 105페이지에 이르는 품질등급 규정집이다. 회사 스스로 과일품목별로 품질등급 규정집을 마련해 놓고 있다.
무엇보다 우니쁘리띠에서 기자를 놀라게 했던 점은 '키위 품질 규정집'이었다. 100페이지가 넘은 이 자체 규정집은 회사가 품질관리를 위해 스스로 만든 규정집으로 키위 외에도 포도와 배, 복숭아, 자두, 체리 등의 품목별 규정집이 따로 있는 것은 물론 선과장의 각 단계별 품질관리사와 철저한 위생시스템으로 최상의 품질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주감귤류의 품질규정이 종이 한 장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는 대목이다. 감귤을 비롯한 농산물 관련 토론회나 세미나, 강연회 등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들을 수 있는 고품질 농산물. 말만 있고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우리네 실정에선 공염불에 불과하다.

▲ 칠레농업, 극복방안 없나

칠레 최대의 농산물시장과 대기업농장 방문을 통해 그들의 농업실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재배기술과 효과적인 마케팅을 통해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칠레농업.

칠레는 경쟁력 있는 농산물 수출을 증대 시키기 위해 개방화정책을 지향하는 나라이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신선과일을 중심으로 한 수출증대가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한-칠레 FTA를 놓고 국회논란이 있을 무렵 국내 중앙 언론들은 애써 칠레가 농업선진국이 아님을 강조한 바가 있다. 하지만 취재를 통해 바라본 칠레농업은 세계 최강이었다.

칠레는 기본적으로 자연환경이 농업하기에 매우 적당하다. 지형과 기후가 사계절 농업이 가능하다는 것 말고도 병해충이 적은 나라다. 동으로는 만년설이 있는 안데스산맥이 길게 막고 있고 서쪽으로는 태평양이 가로막고 남으로는 남극의 빙해가 있다. 이로 인해 병해충이 거의 없어 과수재배시 농약 쓸 일이 별로 없다는 것.

이미 대부분의 농장들이 환경농업을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웰빙 시대가 도래해 환경농산물이 각광을 받고 있는 지금 칠레 농산물은 매우 경쟁력 있다고 판단된다.

칠레가 자랑하는 포도의 경우 품종마다 다르긴 하지만 20브릭스가 넘는 경우가 많다. 10브릭스를 놓고 상품의 정도를 논하는 제주감귤과는 비교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도심지 소비자들이 칠레산 포도를 먹고 난 후 감귤을 먹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칠레정부는 이러한 농장이나 기업들에게 수출과 품질관리를 위한 그 어떤 지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농장들이 자체적으로 생산과 품질관리, 수출을 위해 엄격한 기준을 마련하고 브랜드를 개발하고 외국의 바이어를 만나는 등 일종의 종합시스템을 갖춘 형태를 띤다.

다만 12ha 미만을 경작하는 농가를 소농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농업여건 마련을 위해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환경농업을 토대로 토양증진이나 관수시설 기술지원이나 자금지원과 농민자녀를 위한 교육지원이 대부분이다.

▲ 우니쁘리띠에서 한국으로 수출되는 키위에 부착되는 표시사항. 회사 시설을 둘러보던 중 우연하게 발견되자 회사관계자는 당황해 했다.
함께 동행 했던 한 농민은 "농사짓고 싶은 생각이 없다. 천혜의 자연조건과 농업기술 그리고 정부의 농업정책 모두 우리보다 낫다"며 "차라리 칠레에서 농사를 짓는 게 더욱 효과적이겠다"고 말하고 "정부차원에서 칠레농업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경쟁력 있는 농업만들기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농민은 "칠레농업을 보니 빵을 주지 말고 빵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라는 옛말이 생각난다"며 "그 동안 우리 정부는 농민들에게 항상 모자랄 정도의 빵만을 줬다"며 "차라리 정부가 칠레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훨씬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칠레의 농업은 자연조건에 의해서만 이뤄진 게 아니다. 정부의 농업정책과 무역정책이 제대로 입안 돼 실천되는 것과 함께 기본적으로 대규모 영농이 가능한 기업농중심의 생산과 유통, 수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국내 과일 생산농가들이 칠레의 다국적 자본을 앞세운 대규모 기업농과의 경쟁에서 맞대응하기 위해서는 국내 소비자기호에 맞는 품종개발과 철저한 품질관리이다. 칠레 대기업농에서의 예처럼 품질관리에 관한 규정집을 품목별로 마련해두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품질관리사를 두는 등 철저한 선별과 위생관리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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