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명 희생자는 '어디서 죽고, 묻혔나' …끝나지 않은 4.3
5.18 민주화공원서 순례 마무리…"진상조사권' 포함돼야
목포형무소는 제주에서 600여명이 끌려갔다. 하지만 수형인 중 114명이 희생됐다는 것만 밝혀졌을 뿐 나머지 500여명은 행방불명된 채 반세기 이상 진상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추정은 가능하다. 당시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던 수형인들에 대한 학살터가 목포시내 곳곳에 산재돼 있기 때문이다.
목포 지역주민의 증언으로는 1949년 탈옥사건 당시 형무소에서 20~50여구의 시체를 옮겨와 '둠벙'에 묻었다고 한다. 당시 목포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던 수형인이 1400여명이었기 때문에 4.3 희생자는 얼마나 희생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시 의용소방대에서 근무했던 김금출씨(79)는 "탈옥사건 후 지금의 교회 옆 야산에서 경찰이 7명의 수형인을 데려와 삽자루를 준 후 구덩이를 파게하고,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했다"며 "저희는 죽은 시체를 구덩이에 넣고 흙으로 덮고 내려갔다"고 진술했다.
경찰서 뒷편의 학살터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유골을 수습한 적이 없기 때문에 7구의 사체가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또 이곳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예비검속으로 수많은 좌익희생자들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도 높다는 증언이 있다.
목포 주민들은 집단 학살터를 '문둥이 계곡 학살터'라고 불렀다. 지금은 개사육장으로 변해 버렸지만 땅을 조금만 파내면 뼈조각이 나온다고 증언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내화촌 구루마 잔등 학살터'였다. 마차와 마부들이 모여 있던 곳이라고 해서 '구루마 잔등'이라고 불리었던 조그만 야산이 이어진 곳이다.
실제로 산등성이 도로를 개설할 때 유골이 200여구나 발견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4곳의 집단학살터와 매장지를 둘러 봤지만 4.3 희생자에 사체와 진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막막한 상황이다. 막연한 추정과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끝나지 않은 4.3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민주의 문'과 '민주광장', '추념문'을 지나 참배광장에는 40m 높이의 거대한 '5.18민중항쟁 추모탑'이 서 있다.
순례에 참여했던 한 유족은 "4.3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훨씬 넘고 있어 앞으로 10년만 더 지나면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며 "4.3의 경우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아직도 어떻게 희생되고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해 진상규명 작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순례단은 결의문에서 "옛 목포형무소 터와 4.3 희생자가 있는 곳을 순례해 진혼제를 봉행했다"며 "진혼제에서는 확인된 희생자 114명위 신위를 진설했지만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500영령에 대해서는 '무명신위'의 위패만을 진설한 채 봉행했다"고 밝혔다.
또 "4.3특별법 개정안은 재검토해 진상규명과 보고서 작성, 진상조사권한을 명시한 개정을 강력히 요구한다"며 "올바른 4.3 역사 정립을 위해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결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