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27)] 제8대 전인홍 도지사 ③

추석을 하루 앞둔 1959년 9월16일 각 가정에서는 명절 준비로 크게 들떠 있었다. 또 제주도청을 비롯한 도내 행정기관에서도 일찍 업무를 끝내고 대부분의 직원들이 추석을 맞기 위해 귀향한 상태였다. 당시만 해도 측후소의 기상예보는 거의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라디오 보급률마저 낮아 기상예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밤이 점점 깊어지면서 비바람이 더욱 거세져 주민들을 불안케 했다.

이날 밤부터 추석인 다음날인 9월17일 아침까지 도 전역을 휩쓴 「사라호」태풍은 순간 최대풍속 39m의 강풍을 동반, 도민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항·포구에 피항하고 있던 선박들이 침몰됐고 해안이 유실됐으며 가옥 상당수가 파손됐다.

추석날인 9월17일 새벽 도청에 나온 전 지사는 공무원들에게 비상근무령을 내리는 한편 피해상황을 보고 받았다. 심상치 않은 태풍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전 지사는 날이 밝기도 전에 도청으로 나왔던 것이다.

총피해액 32억5천만원…11명 사망·123명 부상…가옥전파만 1967동

태풍이 지나간 나흘 후에 최종 집계된 피해액은 총 32억5000만환으로 조사됐다. 사망·실종자가 11명, 부상 127명, 가옥전파 1967동, 가옥반파 1만768동, 가옥유실 40동, 가옥침수 1956동, 선박전파 146척, 선박반파 149척, 선박침몰 31척, 공공건물 전파 29동, 공공건물 102동에 이르렀다.

  도 전역을 쑥밭으로 만든 사라호 태풍은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안겨 줬다.
전인홍 지사는 망연자실했다. 전 지사는 급히 도청 국·과장들으로 구성된 피해조사반을 전역으로 보냈다. 사라호 태풍이 지나간 제주도는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 라디오에서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태풍피해상황만 보도되자 피해복구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주민들의 항의소동이 벌어졌다. 전 지사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빨리 알아보라"고 간부 공무원들을 다그치고 당장 중앙에 제주지역 피해상황을 자세히 보고하라고 야단했다.

전 지사는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제주지역의 피해상황이 제대로 전달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피해조사반의 조사결과가 나오는 대로 상경, 중앙에 피해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 복구지원이 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전 지사는 또 도민들에게 인보(隣保)정신으로 태풍피해를 극복해나가자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사반의 최종피해집계결과 제주도는 전국에서 경상북도 다음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각계에서는 「풍수해대책위원회」를 구성, 이재민들에 대한 성금모금운동에 나섰다. 제주도의 태풍소식을 들은 길성운 前지사(당시 평안남도지사)가 성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정부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복구예산 지원에 난색

전 지사는 9월23일 조사반이 집계한 내용을 가지고 복구대책협의차 상경했다. 그러나 중앙부처들의 반응은 아주 냉정했다.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 지사는 제주지방의 피해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정 믿지 못하겠다면 제주현지로 사람을 내려보내 살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하고 도민들의 생활상과 피해복구의 절실함을 주장했다.

이 같은 전 지사의 노력으로 가옥복구에 필요한 8300만환과 구호미 2531석이 긴급 배정됐다. 또 세계구호위원회와 미8군, 가톨릭봉사대, 국회조사반 등이 피해상황을 돌아보기 위해 속속 제주에 왔다.

  도내에서는 도의회의장인 김도준 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도풍수해대책위원회를 긴급 발족시켰다. 
닷새간의 서울 출장을 마치고 귀임한 전 지사는 복구문제에 대해서 "정부가 제주도 수해에 대한 긴급복구비로서 책정한 예산은 40억환에 이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아직 확보된 것이 아니며, 전국피해에 대한 복구비도 얼마가 되는지 정확히 모른 실정이다"고 말함으로써 피해복구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음을 시사했다. 전 지사는 이같은 발표에 피해주민들의 실망이 클 것으로 보고 "제주도당국에서는 구체적인 복구대책을 세워 나가겠으나 제주도 예산의 완급을 가리어 복구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전 지사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0월5일부터 이틀간 피해지역에 대한 시찰에 직접 나섰다. 태풍피해지역은 그때까지도 일손이 부족해 복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공무원들의 모습도 보기 힘들었다.   전 지사는 순시직후 공무원비상근무령을 내리고 "모든 공무원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출근해 전도민의 피해복구대열에 앞장서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전 지사는 특히 서귀농업고등학교의 교실이 모두 파손돼 서귀읍민관을 임시로 빌어 사용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모슬포에 있는 前육군훈련소 건물 100동을 임시교실로 사용하도록 조치했다. 이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미8군에서는 천막 13톤을 보내왔다. 또 국회 태풍재해대책특별위원회는 피해복구비 32억3753만환을 제주도에 긴급 배정키로 결의했다.


이와 함께 민간단체인 제주도풍수해대책위원회는 10월2일 상경하고 구호양곡 1004석과 여러 가지 생필품을 받아왔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수재민을 위한 가두모금에 나섰다.

태풍재해복구비 지원금 10% 재해의연금으로 공제…도민들 반발

  그러나 문제는 이상한 곳에서 터졌다.
그것은 가옥복구비로서 태풍 피해가구에 지원된 복구비 가운데 지원액의 10%를 재해의연금 명목으로 공제한 때문이었다. 일선 시·군에서는 정부가 각 시·군에 할당한 의연금 목표액을 채울 방법이 없자 복구비 중에서 반파가옥에 대해서는 5000환, 전파가옥에 대해서는 3000환을 의연금으로 공제해 말썽을 샀다. 더구나 피해주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재해복구비가 엉뚱한 사람에게 배정되는 경우도 일어났다.

주민들은 "피해주민들을 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수재의연금에서 의연금을 떼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강력히 항의했다.   전 지사는 태풍피해 주민들의 원성의 목소리가 높자 도청 공무원들을 각 시>군에 보내 지금까지 받은 의연금을 모두 주민에게 돌려주라고 긴급 지시했다.

부임 이후 크고 작은 사건과 행사가 계속 일어나면서 그때까지 도정방침조차 마련하지 못했던 전인홍 지사는 사라호 태풍에 대한 피해복구가 어느 정도 끝나 갈 즈음이었던 그 해 12월2일 제주도의회에 출석, 비로소 모양을 갖춘 도정방침을 밝혔다.

전 지사는 "제주도의 행정은 정부의 일관된 시책을 지방실정에 부합되도록 추진해야 하는 것이나 제주도는 재정이 빈약해 큰 시책을 펴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이를 극복하여 도민복지증진과 도정발전에 적극 힘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전 지사는 이를 위해 도정방침을 △행정강화 △건설사업촉진 △복지사업강화 △교학의 충실과 문맹퇴치 △농업증산과 산림조성 △상공진흥과 공예품 장려 △지방재정확립 △공복(公僕)행정강화 △관광사업개발 △치안확보 등 10개항에 두겠다고 밝혔다.

전 지사는 이듬해인 1960년에 치러질 정.부 대통령선거와 관련해서 모든 공무원은 참된 민중의 공복이라는 점을 명심해 법규를 준수하고 민폐를 근절시키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도의회는 사흘 뒤에 개최된 도의회 상임위원회에서 1960년도 예산에 계상된 도민들의 복지증진비가 다른 사업비에 비해 적어 전인홍 지사의 도정방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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