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한 마리 잡고 온 가족이 행복해 하다
"아빠 심심해."
가을답지 않게 낮에는 덥다가 아침, 저녁으론 쌀쌀하더니 아들 원재가 그만 감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토요일도 집안에서 하루 종일 지내려니 무척 무료한가 봅니다. 저 역시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 한가로이 뒹굴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빨간 돼지 저금통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돼지 잡을까?"
제 말에 원재도 아내도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동전이 생길 때마다 계속 집어넣은 빨간 돼지저금통이 배가 불러 일주일 전부터 잡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혼자 들기도 벅찬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가르는 것을 원재도 아내도 참 재미있어 합니다.
▲ 열달 가까이 걸려 모은 돼지 저금통, 이번에는 조금 기간이 빨랐습니다. |
ⓒ 강충민 |
아내는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저는 낑낑대며 돼지를 옮겨 왔습니다. 살찐 돼지는 정말 무거웠고 만약에 도둑이 들어도 갖고 가기 힘들겠다고 한마디했습니다. 더 이상 동전을 삼킬 여력이 없던 돼지 옆에는 흡사 토해 놓은 것처럼 동전들이 흩어져 있었고요. 토요일 오후 우리 가족 경건한 마음으로 빨간 돼지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돼지배를 가르는 의식은 우리 집 재무를 담당하는 아내가 했습니다.
▲ 드디어 갈랐습니다. 아내가 담당했습니다. 지운이가 "돈"하며 먼저 다가갑니다. |
ⓒ 강충민 |
▲ 동전이 쏟아졌습니다. 큰 맘먹고 집어 놓은 몇 장의 지폐도 보입니다. |
ⓒ 강충민 |
제 월급날에도 한 달 제 용돈을 빼고 고스란히 아내의 통장으로 입금시키면 다 아내가 알아서 합니다. 아주 가끔 용돈이 부족할 때는 아양 떨어서 아내에게 타 쓰기도 하고 그런 것 알아봤자 머리만 아프다고 느낄 뿐입니다. 가끔 아내가 제 신분증을 달라고 하면 무언가 만기되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집안에 머리 아픈 사람 아내 한 사람으로 족하다고 느끼는 거지요. 오죽하면 오래 전 아내와 부부싸움을 한 끝에 내 명의로 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발견한 것이 한 달에 8700원인가 하는 케이블 TV시청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유일한 재테크가 있으니 바로 오늘의 빨간 돼지 저금통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의 이 재테크는 군대갔다 온 기간을 제외하고는 쭉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돼지는 참 요긴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제 방안에 있는 대학 때 산 현대문학 전집도 이것의 배를 갈라 장만했고, 학생 신분일 때도 어머니에게 용돈도 드릴 수 있었고요. 물론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가끔 어머니도 돼지 안 잡았냐고 물어오기도 하지요.
▲ 아내와 원재가 열심히 분류하고 있습니다. |
ⓒ 강충민 |
동전을 분류하다 아내가 한 마디 합니다. 퇴근하고 주머니에 동전이 남으면 자기도 집어 넣었다는 겁니다. 하긴 시장 보고 난 후 남는 동전은 자연스레 내가 챙겼으니까 아내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닙니다. 딸 지운이는 쌓인 동전이 마냥 신기한 듯 그것들을 갖고 이리저리 장난을 칩니다.
비닐팩에 따로 따로 동전을 모아 놓는데 지운이가 자꾸 장난칩니다. 그래서 오백원을 모아놓은 팩에 백원짜리가 섞이기도 하고 오십원짜리는 어느 틈엔가 모조리 뒤섞이고 말았습니다.
▲ 지운이가 자꾸 훼방을 놓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들쳐 업었습니다. |
ⓒ 강충민 |
"이십 만원은 되겠다."
이번에는 의외로 오백원 동전이 많아 그걸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일일이 세어보는 것은 결혼하면서 자연스레 생략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는 새마을금고에 십오년 넘게 근무합니다. 아내의 사무실에 동전계수기가 있고 거기에 분류한 동전을 쏟아부으면 한 묶음씩 포장되어 떨어지니까요.
▲ 드디어 분류를 끝냈습니다. 원재에게는 비누로 손 깨끗이 씻으라고 했습니다. |
ⓒ 강충민 |
"난 가디건…."
아들과 아내가 분류된 동전을 두고 저와 흥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그 말에 아주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아내와 아들은 "아싸!"하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저는 대충 책과 가디건의 금액을 헤아리다 그러고도 남으면 오랜만에 연한 소고기를 사서 구워 먹을까 생각했습니다. 이가 불편한 어머니도 잘 드시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열 달 동안의 산고를 거친 빨간 돼지를 갈랐고 단위별로 분류된 동전비닐을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재우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눈이 마주쳤고 둘 다 머리맡에 놓인 동전들을 같이 떠올렸는지 한참이나 킥킥대며 웃었습니다. "도둑 들면 안 되는데…" 하는 아내의 말이 더욱 압권이었습니다.
엄청 부자가 된 토요일은 그렇게 갔습니다.
▲ 원재에게 저금통의 돈으로 책 사준다고 했더니 기분이 좋아서 지운이 자전거태워주기를 자청합니다. |
ⓒ 강충민 |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