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취소 이후 다시 밟은 송악산] 개발의 상처가 보존의 씨앗으로…

일부(?) 지질학자들은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국제적 사기꾼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한 땅.

원수를 대하듯 주민들이 내편네편으로 갈려 끝없이 반목했던 현장.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개발'과 '보전'이 정면으로 부딪친 곳.

결국은 사업승인 취소로 그토록 개발을 열망했던 주민들에겐 씻을수 없는 허탈감을 안겨줬지만, '장밋빛 청사진'에 대한 검증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한 교훈의 현장. 환경단체들에겐 처음으로 값진 승리(?)를 안겨준 존재.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송악산은 이처럼 '국제자유도시'를 꿈꾸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송악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을 뿐이다.

산 어귀와 중턱에선 조랑말과 염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었고, 차량들은 쉴틈없이 관광객들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초입을 조금 지나 동서로 시원스레 뻗은 도로만이 세월이 흘렀음을 일깨웠다.

송악산 입구에 떡 하니 버티어선 현장사무소와 흉물스런 철 구조물만 없었다면 '그때'를 떠올리기 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라 함은 송악산 개발 논란으로 제주사회가 들썩였던 2000년 전후. 현장사무소와 철 구조물은 송악산을 '미래형 리조트'로 개발하겠다며 장밋빛 환상을 심어줬던 개발업체의 상징물이다.

▲ 송악산 초입에 자리한 개발업체 현장사무소와 철 구조물. 개발이 무산되면서 이제는 흉물로 변했다.
'미래형 리조트 타운' 물거품…흉측한 구조물, 장밋빛 환상 좇던 과거 웅변

위치에 따라선 산방산과 형제섬, 단산 등 빼어난 주변 경관을 가릴만큼 큼지막한 철 구조물에는, 믿거나 말거나 당시 이 업체의 '개발구상'이 담겨있다.

'크라시바야 랜드'. 러시아어로 '아름다운 땅'이라고 한다. 업체는 여기서 "신천년을 향한 미래형 리조트 타운을 건설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사업승인(99년 12월30일)이 난지 4년여가 흐른 지금, '신천지'는 구조물 속에서나 유용한, 박제화된 단어가 돼버렸다.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겠다던 약속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흉칙스런 구조물만 남아 한때나마 번영을 꿈꿨던 과거를 말해주고 있다.

오히려 다행인지 모른다. 되지도 않을 개발을 한답시고, 세계적인 화산체를 이리저리 파헤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 멀리 산방산과 한라산이 보인다.
화창했던 13일 오후. 모처럼 송악산을 찾은 일행은 초입에서부터 몸서리를 쳤다. 철 구조물앞에서 '그때'가 생각 난 것이다.

일행은 당시 개발의 반대편에 서서 송악산 보전을 부르짖었던 사람들이다. 개중에는 개발을 반대했다는 이유 하나로 사이버상에서 뭇매를 맞거나, 심지어 형사고소까지 당한 이도 있다. 송악산의 가치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학자도 끼었다.

그런 만큼 오랜만에 송악산을 찾은 이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군유지를 팔았다가 개발이 무산되자 지금은 환매절차를 밟고있는 남제주군은 철 구조물이 사유지에 세워진 것이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파괴는 쉬워도 복원은 어렵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굳게 닫힌 현장사무소, 방치된 호텔 부지 팻말, 한가로이 풀을 뜯는 조랑말…

녹이 슨 채 굳게 잠긴 현장사무소를 착잡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일행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개발업체가 놀이시설을 보관해뒀다는 창고. 쉴새없이 카메라를 눌러대던 정상배 제주환경운동연합 전 사무국장이 궁금했던지 일행을 이끌었다.

▲ 굳게 잠긴 현장사무소와 아직도 남아있는 호텔 부지 팻말.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과는 대조적인 풍경이다.
개발을 둘러싼 대립이 첨예했던 시절 사무국장이었던 정씨는 송악산 보전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만큼 가장 많은 회유와 협박을 받았다.

당시 이 업체는 1억달러 이상을 투자하겠다는 이태리 업체로부터 놀이시설을 들여왔다며, 외자 유치라도 한 양 의기양양했다. 밖에서 들여다본 창고에는 뭐가 있는지 분간할수 없었으나, 군데군데 부서지고, 노후한 구조물이 '빛바랜 영화'를 짐작케 했다.

주변 경관을 감상하며 부지런히 뭔가를 메모하느라 일행보다 뒤처진 신상범 제주환경연구센터 이사장이 '크라시바야 호텔 제주' 간판이 아직도 남아있는 둔턱에서 한마디했다.

"얼마나 기막힌 풍경이냐?" 단순한 경관 예찬이 아니었다. 송악산 보전에 대한 절절한 메시지였다. 당시 업체는 지금 신씨가 서있는 자리를 호텔 부지로 점찍었던 것이다.

고희를 넘긴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신씨는 평소에도 활동적이다. 이날도 신씨는 가장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그도 송악산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한창일 때 많은 고초를 겪었다.

▲ 형제섬이 손에 잡힐 듯 하다.
송악산은 자신이 품고 있는 분화구 말고도 주변에 빼어난 절경지와 함께 역사문화 유적이 많아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특히 선사시대 새발자국과 사람발자국 등 발견 장소가 잇닿아있다.

이번에는 강순석 박사 차례였다. 얼마전까지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연구원으로 일했던 강 박사는 지질·고생물학 전공자 답게 지난 99년 처음으로 송악산 개발과 관련한 공식적인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송악산 보전 운동에 학문적으로 단초를 제공했다.

강 박사는 이날 송악산 탐방 내내 분화구의 형성시기와 탄생과정, 화산지질학적 가치 등에 대해 자세한 설명으로 흥미를 더했다.

파괴 막으면서 관광자원화 꾀할 방안은?…'송악산녹색연대'(가칭) 해법 모색

일행은 송악산 북서쪽으로 에돌아 가면서 제1분화구-제2분화구-정상으로 향했다. '이중 분화구' 논쟁에 휘말렸던 곳이다. 사업승인 이전만 해도 '이중 분화구'라고 자랑해 마지않던 제주도가 개발이 암초에 부딪치자 돌연 이중분화구가 아니라고 우겨댔던 아이러니한 현장이다. 송악산 정상 표지석에도 '이중화산'이란 단어는 선명히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 송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제2분화구.

"우길 걸 우겨야지. 스스로 한 말까지 하루아침에 뒤집는 법이 어딨어?"

인터넷 상에서 '사이비'란 비난까지 들어가며 개발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파헤쳤던 중앙일보 양성철 기자가 내뱉었다.

그러나 '반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행은 저마다 송악산을 관광자원화할 대안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보전을 전제로 했다.

신씨와, 김학모 제주환경연구센터 사무처장은 즉석에서 '말타고 한바퀴 순회' 상품을 제안하기도 했다. 분화구를 파헤치는 대규모 시설이 아니더라도 관광객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아이디어는 얼마든지 짜낼수 있고, 지역주민이나 자치단체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송재호 제주대 교수도 거들었다. 송 교수는 분화구 정상을 가리키며 "이런게 진짜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생태문화관광포럼 대표를 맡고있는 송 교수는 그러잖아도 송악산 보존에 뜻을 두고 있었다며 이날 탐방에 기꺼이 참여했다.

▲ 분화구 정상을 밟은 정상배 환경운동연합 전 사무국장, 신상범 환경연구센터 이사장, 김학모 사무처장, 송재호 제주대 교수, 강순석 박사, 양성철 기자(왼쪽부터). 너머로 산방산이 보인다.
정상을 밟는 순간 일행은 또한번 몸을 떨었다. 개발계획 대로라면 일행이 서 있는 자리엔 곤돌라가 세워지고, 발밑에는 워터파크와 위락시설이 들어섰을 것이다.

사실 이날 송악산 탐방은 '우연'이 아니었다.

송악산 개발 반대 운동을 계기로 그 일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모여 송악산 보존을 위해 의미있는 활동을 펴자고 의기투합했고, 그 첫 행보가 송악산 탐방이었다. 그렇다고 일체의 개발을 반대하자는 것은 아니다. 파괴는 막으면서도 관광자원화 방안을 모색해 보자는 게 이들의 한결같은 고민이다.

얼마없어 정식 출범할 가칭 '송악산녹색연대'가 첫 발을 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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