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갈등이 사라진다. 생산수단의 공유(共有)가 이루어진다. 비록 내용은 달라도 모두들 노동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그런 평등한 공동체적 인류사회가 과연 가능할까?

자유를 빙자하며 부(富)와 권력(權力)에의 무제한적 추구를 갈망한다. 물질만능의 저급한 속도 경쟁만이 전부이다. 나와 너는 인간이기에 앞서 그 수준과 능력에 차별적이다. 물고 물리는 그런 인류사회는 끝없이 펼쳐지는가?

인권과 사상의 자유가 침탈 당하는 체제도, 적자생존과 경쟁의 원리만 내세우는 체제도 더 이상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늘 '양심(良心)'에 비추어 '새로움을 추구하는 정신' 이것만 제대로 구현해 가면 된다.

'이건 아닌데…' 라는 마음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첫 출발점이다. '이젠 (그 정도면) 됐어…' 라는 마음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보수적 속성으로 타협을 유도하여 발목을 붙잡는 논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변화와 개혁'은 인류사회를 역동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원리가 된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를 가르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나는 과거가 중요한 사람이다' 와 '나는 미래가 중요한 사람이다' 라는 말이다. 과거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는 것도 필요하고, 미지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포인트는 미래다. 과거의 소중함도 올바른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데 교훈으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에 대한 평가' 는 오늘의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훗날 후세들의 몫인 것이다. 후세의 몫까지 오늘의 우리가 단정짓는 것은 월권(越權)이다.

마치 산과 바다, 숲과 갯벌 등 자연 환경은 우리가 후손에게서 빌려쓰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쾌적한 자연 환경을 후손들은 누릴 권리가 있다. 오늘날 우리만 향유하고 개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를 잘 보존하고 가꾸어 후손에게 물려줄 의무까지도 있는 것이다. 권리만 내세우지 말고 의무를 다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자세야말로 오늘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다.

그렇다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오늘의 우리들 의무는 과연 무엇일까? 이분법적이라 비판도 많겠지만, 아래의 '기조(基調)'들이 그 해답이 된다.

" 전쟁보다는 평화를/ 성장보다는 분배를/ 개발보다는 보존을/ 경쟁보다는 상부상조를/ 이기(利己)보다는 이타(利他)를/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을/ 갈등보다는 포용을/ 축재(蓄財)보다는 기부(寄附)를/ 정략적(政略的) 정당(政黨)보다는 국민을/ 국수적 민족주의보다는 평화로운 인류 공영체를/ 그래서 종국에는 국익보다 인류애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이미 한반도의 북과 남에서 그 실험을 끝내고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은 이제 외래사상을 한국화시키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21세기 통일 한국의 지도이념은 우리 내부에서 합의를 거쳐 탄생해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시시콜콜 각 분야별 합의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그 작업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계속 진행형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 제시한 '기조'들을 곧 우리의 지표로 삼으면 된다.

2003. 8. 25(월)
<홍기표의 제주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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